83. 치킨 레이스.-4-
백하은 쿡의 충격적인 비밀고백을 들은 뒤, 같은 날 저녁.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밤늦게까지 연습을 이어나간 우리는 뒷정리를 끝마치고 탁자에 모여 앉았다.
"으음……."
연습은 나름 순탄하게 사고 없이 마무리됐지만, 슬프게도 가장 큰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채 우리 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름 추려보긴 했는데……."
"뭔가 그럴듯한 레시피가 없네요."
"그러게."
백하은 쿡이 준비한 레시피를 이리저리 더하고 빼며 조합한 메뉴는 제법 나쁘지 않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보이는 레시피가 세 개. 백하은 쿡이 들인 시간을 빼면 고작 이틀 만에 급조한 것 치고는 굉장히 훌륭한 결과물이었지만, 이 자리에 모인 면면들은 그 결과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남은 건 이 세 개구나."
각각 이래저래 많은 어레인지가 들어가기는 했으나 레시피의 베이스가 된 요리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참깨를 넣고 갈아낸 닭 육수를 차게 식혀 찢은 닭고기, 고기완자, 고명 등과 함께 먹는 임자수탕.
마찬가지로 차게 식힌 닭 육수와 찢은 닭고기를 겨자, 식초 등으로 간하여 함께 먹는 냉면 같은 느낌을 주는 초계탕.
마지막으로 맵고 칼칼한 맛을 자랑하는 후끈한 닭개장.
어느 것 하나 감히 모자람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는데도 아직 미심쩍은 구석이 남았다는 말에 좀처럼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거 참, 뭘 알아야 내 나름대로 기준을 잡든 말든 할 텐데."
노력의 땀방울을 샤워로 닦아낸 뒤, 선선한 바람으로 가득한 방의 침대에 누운 나는 두 팔로 머리를 받친 채 홀로 불평을 내뱉었다.
결국, 오늘의 연습은 후보군을 축소한 것을 끝으로 막을 내렸지만, 마음 언저리에 남은 찝찝함은 도무지 털어낼 길이 없었다.
"애당초 한 것도 별로 없으니 원."
정리한 레시피 중에서 '이거다!' 싶은 게 없어 말끔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도 그런 찝찝한 기분에 한몫을 보탰지만,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내 역할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
물론 요리를 만드는 건 열심히 했다.
급조된 크루의 헤드 셰프라고 할 수 있는 백하은 쿡의 지시에 따라 분 단위로 바뀌는 조리법을 막힘없이 수행하고, 가끔은 내가 아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 레시피 개선안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의 근본적인 부분. 예를 들어 베이스가 되는 요리는 무엇이 좋겠다든지, 한식 특유의 한약재를 통한 맛내기 등은 내가 나설 자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한식보다는 양식을 훨씬 가까이 두고 있던 폐해……라고 말하기엔 살짝 틀린 감이 있었지만, 아무튼 내가 가진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지식이 다른 크루에 비해 썩 대단치 못하다는 것이 레시피의 기둥을 만드는 일에서 발을 뺀 주요한 이유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저번 대회 이후, 스스로가 가진 부족함을 깨달은 난 한식 공부에 조금 더 무게를 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회귀 전에 탄 테크에서는 한식이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평생 프렌치만 파고들어도 모자란 상황이었기에 딱 조리기능사 자격증 수준의 기초만 대충 떼고 말았으니까.
"에이, 이런 게 지금 무슨 상관이냐."
결국 결론은 이것이었다. 지금 우리 크루 멤버 중에서 가장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나라는 것.
젠장. 솔직히 쪽팔린다. 가오는 있는 대로 잡았으면서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대회반에서 창민이와 백예은에게 부탁해가며 나름 모자란 부분을 채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 바닥에서 제대로 된 한 사람 몫을 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쓰읍, 좋아, 일단 뭐라도 해보자고."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설령 너무 높아 넘어설 엄두조차 나지 않는 벽이라도, 너무 커다래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바위라도 제 몸뚱이 하나만 믿고 계란조차 없이 맨주먹으로 덤벼든 젊은 날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에 비하면 더 낫지.'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보다 더욱 젊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장비까지 갖고 있다. 삽으로도 나무를 꺾을 수 있고, 도끼로도 땅은 팔 수 있다. 아무리 어울리지 않는 도구더라도 사용법을 조금 바꾸는 것으로 얼마든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요는, 끈기다.
무엇에, 누구에게 도전하든 그 도전을 멈추지 않을 끈기.
회귀 전이든, 지금이든. 그것 하나만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방의 불을 밝힌 뒤, 머릿속에 있는 레시피를 꺼내 기억하는 그대로 꼼꼼하게 노트에 적은 뒤, 한 장씩 뜯어 책상에 늘어놨다.
한식이라면 어디 내놓아도 고수 소리를 들을 크루 세 사람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작품. 하얀 노트 위로 펼쳐진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날 향해 창칼을 세운 지식이란 이름의 병사들 같았다.
"좋다 이거야. 어디 한번 내 구역에서 놀아보자고."
노트를 방패로, 펜을 검으로 삼은 내가 그 격전지의 중심을 향해 뛰어들었다.
오늘 이놈들이 내게 항복을 하든, 내가 지쳐 쓰러지든. 결판이 날 때까지.
***
같은 날 아침. 안가람.
웬일인지, 원래는 각자의 구역에서 서로가 맡은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안가람의 직원들은 주방장인 안상필의 부름 아래 같은 자리에 모여 있었다.
검은 스카프를 두른 파트장부터 시작하여, 가장 막내인 파란 스카프를 두른 견습 쿡들까지.
모인 직원 중 빠진 이가 없는지 주변을 살핀 안상필은, 이내 모두가 자리에 있음을 확인한 뒤에야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치 군기가 바짝 든 군인들처럼 일사불란하게 대답하는 이들.
안상필이 얼마나 이 주방을 확실히 휘어잡고 있는지, 그 장악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우렁찬 인사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안상필은 손에 서류를 쥐고, 정확히 말하자면 날짜별 예약 확인서를 들고 각 파트의 파트장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줬다.
본래 견습직원에게는 파트가 주어지지 않지만, 화요일 이후로 여러 업무를 전전하던 찬혁은 현재 야채 주방. 정확히는 나물요리 등의 사이드 메뉴를 만드는 일을 전담하는 파트에 소속되어 있었다.
"야, 너 얼굴 꼴이 왜 그 모양이냐. 아침부터 그러더만."
"다 이유가 있다.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뭔지는 모르겠는데 몸 좀 챙기면서 해라."
"어, 땡큐."
어제 함께 해산물 파트에서 함께 고생하고, 오늘도 같은 파트로 함께 배정받은 안창민이 찬혁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럴 법도 했던 것이, 현재 찬혁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세안 등이야 꼼꼼하게 하고 나왔지만, 그런 것으로는 좀처럼 감추지 못할 기미가 과장을 조금 보태서 광대를 넘보기 직전인 상황.
좀처럼 감정 표현이 적은 창민이지만 그 몰골을 봤을 때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여태껏 꽤 오랜 기간 친분을 이어왔고, 개인적으로는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찬혁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러다 큰일 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런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창민에게 찬혁은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이것도 자업자득이지.'
하긴, 이런 몰골이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며 찬혁은 자조했다.
어젯밤. 레시피를 꺼내놓고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여력을 다해 레시피 수정에 열을 쏟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나름 수확은 있었다.'
레시피를 살피고 고치면서, 찬혁은 자신의 부족함을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식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세 개의 레시피는 그 이상 무언가를 더하거나 뺄 수도 없을 만큼 완성되어 있었다. 그 방면의 지식을 점점 깨우쳐가던 찬혁이 그것을 보며 오히려 자신감을 잃을 정도로.
'이런 걸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하던가.'
다른 말로는 자신감 곡선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한 분야를 깊게 깨우칠수록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감을 잃어간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찬혁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다만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가 가진 지식이 그것 하나 뿐은 아니었다는 것일까.
'이것도 조금 파격적이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저번 호박죽보다야 낫지.'
찬혁은 밤을 꼬박 새며 자신이 가진 프렌치의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의 새로운 레시피를 새로 창조해냈다.
'실질적으로는 어레인지를 너무 해서 원형을 못 알아보게 된 거지만…….'
아무튼 창조는 창조다. 찬혁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복날 특별 메뉴를 일행에게 보여줄 생각에 부푼 마음을 찬혁이 간신히 추스르고 있을 무렵, 안상필 또한 직원들에게 마지막 전달 사항을 알리며 아침 미팅을 마무리했다.
"곧 있을 말복 때 잡힌 예약만 200건이 넘는다. 혹시라도 실수가 없도록 그 전날에는 확실히 취해 최고의 컨디션으로 업무에 임할 수 있게끔 주의하도록. 파트장들은 부하 중에서 이상 있는 사람이 있나 확실히 체크해서 보고해."
─예!
"그래. 이상으로 아침 미팅은 끝…… 아, 하나 깜박했구만."
직원들을 각자 자리로 헤치려던 손을 멈춘 안상필이 아까보다 더욱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복날 특별 메뉴 레시피를 준비한 사람은 오늘 퇴근 전까지 제출하자. 알고 있겠지만 안가람의 이름으로 나가는 메뉴이니만큼, 기준에 미달한다면 바로 반려될 테니 명심해라. 알겠나?"
매서운 눈빛이었다. 정말로 자기 눈에 부족한 메뉴를 낸다면 아주 요절을 내버리겠다는 안상필의 기세를 느낀 찬혁이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그 기세에 눌린 직원들의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인 안상필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자, 그럼 일 시작하자! 다들 위치로!"
─위치로!
"위치로!"
피곤에 절어 푹 잠겨 버린 목을 억지로 조이며 찬혁 또한 함께 외쳤다.
오늘은 특히나 더럽게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
백하은은 어느 의미로 재능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집이 든든하고, 일찍부터 배웠다고 한들 그녀만 한 성취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고등학교와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안가람을 첫 직장으로 삼는다는 건 단순히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고, 그녀 본인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백하은은 재능이란 말을 좀처럼 좋아할 수 없었다.
자신의 노력이 재능이란 단어 하나에 부정당하는 기분을 아는가?
공부와 연습을 과하게 하다가 기절한 탓에 병원 신세를 진 경험도 있던 그녀에게 있어 재능이란, 여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범주에 있는 것이었다.
남들보다 칼을 다루는 것에 빨리 익숙해지는 것?
남들보다 재료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
그런 게 아니다. 남들보다 배우고 익히는 속도가 빠른 것. 겨우 그 정도 재주를 보고 자신을 향해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백하은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재능이란 공포였다.
처음에는 대견함으로, 후에는 부러움으로, 더욱 뒤에는 시기와 질투에 이르러, 끝에는 두려움이 된다.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리라는 걸 아니까.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인간은 그것을 공포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백하은은 다시 한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 감정이, 다시금 그녀의 뇌리를 찔러들었다.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어제 연습 끝나고, 고작 하룻밤만에?"
"아, 옙. 어제 추린 레시피를 최대한 안가람의 모토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제 방식대로 어레인지 해봤어요."
찬혁이 가져온 레시피를 다시금 찬찬히 살펴본 백하은이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이거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
그 사람의 심성을 닮은 듯 올곧은 손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진 노트.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살짝 난잡한 면이 있는 레시피였으나, 그녀는 굳이 만들지 않고도 이것에 담긴 가능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눈가를 가린 손을 간신히 테이블 아래로 숨긴 그녀가 고개를 들어 찬혁을 바라봤다.
"? 아, 근데 이게 아주 완성한 건 아니라 조금씩 수정이 필요하거든요. 조금만 더 도와주시겠어요?"
고개를 갸웃하며 퀭해진 눈가 아래로 길게 드리운 기미가 무색해질 만큼 순수한 표정을 지은 그가 백하은을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그 광경이, 그녀에게는 괴물이 입을 비트는 것처럼 보였다.
'……후배 복이, 과하게 좋네.'
원래 이 시간에는 생각조차 나지 않던 담배가, 그녀의 머릿속에 붉은 잔상을 남겼다.
…….
그날 저녁, 백하은은 안상필에게 레시피를 제출했다.
네 사람의 필체가 뒤죽박죽 섞인 노트 위, 지분을 반 이상 차지한 올곧은 필체가 특히 눈에 띄는 레시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