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81화 (81/403)

81. 치킨 레이스.-2-

지옥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오늘 지옥을 보았다.

"으어어……."

"죽을 것, 같아……."

거실 의자에 마치 아무렇게나 내던진 세탁물처럼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늘어진 두 남매의 옆에 함께 나란히 늘어진 나는 좀처럼 정돈되지 않는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마치 찜질방 가마에 들어간 것 마냥 땀방울을 줄줄 흘리는 몸.

희망 온도를 내리다 못해 최저온도인 18도로 설정해둔 에어컨과 가정용치고는 과하게 용량이 큰 환풍기의 성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허어어……."

다섯 시간. 장장 다섯 시간 동안 단 한 차례의 휴식도 없이 요리라는 이름의 폭풍우 속을 헤엄친 몸은 뇌의 명령을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몸에 움직이라고 명령을 내려야 할 뇌마저 피로에 절어 사지에 "절대 움직이지 마!"라고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이야, 이거 갈 길이 멀구만.'

새삼스럽지만, 나는 지금의 내 몸이 회귀 전에 비하면 전혀 완성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귀 전, 헬스와 수년간의 현장 업무로 다져진 내 몸은 최대 16시간의 연속 업무까지 견뎌내고도 다음 날 몸살 하나 없이 멀쩡히 출근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고작 다섯 시간 만에 넉다운 당하다니…….

'아무리 힘들었다지만 벌써 뻗을 줄이야. 공부도 공부지만 조만간 헬스라도 끊어야지 나 원.'

평범하게 레시피를 따라 만드는 거라면 모를까, 중간중간 토론과 레시피 변경을 실시간으로 해치우며 요리를 만든 탓에 육체도 육체지만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 기분이다. 과한 부담에 뇌가 떨려오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이 연습에 앞서 빡빡한 주방 업무를 해치운 탓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 하더라도 전성기에 비해 체력이 모자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어느 나라의 똑똑한 양반 가라사대 사람의 육체적 절정기는 20대 후반이라더니, 과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아하하, 다들 고생 많았어."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 특히 빛나는 것은 다름 아닌 백하은 쿡의 남다른 체력이었다.

그녀 역시 힘든 건 매한가지였는지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긴 했으나, 의자에 늘어져 일어설 힘도 없는 우리와는 달리 적어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는 것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시계의 초침이 2시를 가리킬 때까지 우리가 만든 메뉴의 총합은 약 열댓 개. 그나마도 레시피를 숙지하는 데에 걸린 시간을 제외하면 세 시간 남짓한 시간에 메인 메뉴 수준의 난도를 가진 요리를 주도해가며 만든 것 치고는 제법 멀쩡한 모습이다.

선배와 창민이도 그런 그녀가 퍽 신기했는지 반쯤 감긴 시선을 향하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언니는 안 힘들어요? 저흰 진짜 되게 힘든데."

설거지를 비롯한 뒷정리가 끝난 주방에 서서 자신이 가져온 도구와 조리복 등을 비롯한 짐을 챙기던 백하은 쿡이 선배를 향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아직 견딜만은 해."

"와, 역시 언니."

"얘는.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나도 힘든 건 똑같은걸."

선배의 감탄을 가벼운 너스레로 응수한 백하은 쿡은 이내 가방 속에 마저 짐을 쑤셔 넣고는 팔뚝으로 이마를 툭툭 두드리며 맺힌 땀을 가볍게 닦아내더니, 마치 낚은 생선을 갈무리하는 낚시꾼 마냥 가방을 둘러메기 시작했다.

꼭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것 같은 모습에 놀란 내가 입을 열었다.

"어, 바로 가시게요?"

조금 쉬다 가는 게 낫지 않은가 싶어 한 말에, 그녀는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답했다.

"시간이 벌써 두 시야. 내일 출근하려면 슬슬 들어가야지."

그러고는 말릴 새도 없이 현관으로 향하는 백하은 쿡. 그런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우리였으나, 이미 신발까지 신은 채 몸을 돌린 백하은 쿡이 우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

"됐어. 너희도 힘들 텐데, 오늘은 푹 쉬렴. 자기 전에 꼭 씻고, 늦잠 자서 지각하지 말고."

무슨 어머니한테서나 들을 법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그녀를 우리는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잡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맞겠다. 그만큼 서둘러 떠나갔으니까.

"뭐가 그리 급하셔서 저러냐."

"아니, 급할 시간이긴 하지."

"그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창민의 읊조림을 짧게 받아친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또 어디 가?"

"물 마시러."

닭국물을 잔뜩 채워 넣은 덕분에 느글거리는 속이 청량감 있는 액체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장 봤을 때 탄산수 사놓은 게 있던가.'

선배가 카트에 갖다 놓을 때는 차라리 사이다를 사지 웬 탄산수냐고 핀잔을 줬었지만, 이렇게 청량한 무언가를 찾아 냉장고를 뒤지는 상황에 오니 훌륭한 선견지명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 있다."

냉장고 속을 살피던 내 눈이 금세 탄산수를 발견했다. 애당초 가장 눈에 잘 띄는 냉장고 문에 붙은 선반에 있었기 때문에 찾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었다.

접시건조대에 엎어져 있던 컵에 적당히 탄산수를 부어 입속에 쏟아부어 버리듯 컵을 기울인다.

"크으으!"

목구멍을 비롯해 식도를 코팅하고 있던 것 같은 기름기를 씻어내는 것 같은 상쾌함! 절로 목젖을 치고 튀어나오는 탄성을 아낌없이 뱉어내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깔끔하게 내용물을 비워 버린 컵을 싱크대로 옮겨놓다가, 문득 조리대 위에 널브러진 낯선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칼 가방이네?"

버클이 달린 띠 두 줄이 감긴 검은색 가죽 가방. 그 스탠다드한 모양새는 어딜 어떻게 봐도 칼 가방이 분명했다.

'우리 건 아닐 텐데.'

내 칼 가방은 지금 방에 있고, 선배나 창민이도 칼을 쓸 때는 자기 칼을 때로 빼 올지언정 칼 가방을 통째로 주방으로 들고 오진 않는다. 그 말은 즉, 이 칼 가방의 주인은 보지 않아도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PHE. 칼 가방 뒤쪽에 커다랗게 박음질 된 누군가의 이니셜을 보고 확신했다. 이거 백하은 쿡 물건이다.

'힘들긴 힘들었나 보네.'

요리사의 제2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칼을 깜박하고 가다니, 멀쩡한 모습은 연기였던 건가.

'하긴 우리보다 일도 더 많이 하고 왔을 텐데, 안 힘든 게 이상하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 판단을 끝마친 나는 칼 가방을 챙겨 들고 주방을 나섰다. 백하은 쿡이 왔을 때 났던 그 요란한 엔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보아 아직 출발하진 않은 것 같으니, 서둘러 나가면 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잰걸음으로 현관을 나서려는 나를 발견한 선배가 말로 나를 붙잡았다.

"응? 동생, 어디 가?"

"백하은 쿡이 짐을 두고 간 것 같아서요. 바로 갖다 드리고 올게요."

"언니가? 별일이네…… 알겠어. 얼른 가봐, 언니 가겠다."

"옙."

백하은 쿡의 위신을 위해 분실물이 칼 가방이라는 사실은 숨겼다. 애당초 알아볼 생각도 없어 보이긴 했지만, 기왕이면 조심하는 게 나을 테니까.

선배에게 짧은 대꾸를 돌려주며 서둘러 현관을 나선다. 문을 열자마자 불어 닥친 후끈한 바람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새벽인데 아직도 이렇게 더워?'

저 찬란한 태양 빛에 달궈진 아스팔트 온돌은 성능이 좋아도 좀 과하게 좋았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실내에서 나오니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이럴 때가 아니지."

고개를 털어 얼굴가로 모여든 바람을 얼추 흩어내고 걸음을 재촉했다. 큰 효과는 없었지만, 아무튼 정신은 대충 돌아왔으니 잘 된 셈 치자.

잔디밭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어젖히고 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이 내리쬐는 골목길. 그곳에 내가 찾는 인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벌써 가신 건가?"

이상했다. 엔진 소리가 안 들린 걸 보면 분명 아직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봐도 백하은 쿡의 모습은커녕 오토바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제자리에 멈춰선 나는 손에 들린 칼 가방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어차피 내일 만날 테니 그때 전해 주면 될 일이긴 하지만, 분실물 때문에 속앓이할 것을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 전해 주는 게 나을 텐데…….

"응?"

그렇게 골복 한복판에 서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때, 어디선가 흘러온 낯설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이 매캐한 냄새. 잊고 싶어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 이 냄새는 분명…….

"이거……."

내 눈이 다시 한번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젊음에 힘입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 코는 이 냄새의 근원지를 순식간에 찾아내 고개를 억지로 돌리게 만들었다.

"저긴가?"

집과 이웃집 사이로 들어간 더욱 비좁은 골목길. 그 앞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이 골목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를 비추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냄새가 아닌 연기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강해지는 냄새와, 그에 맞춰 8월의 열풍을 타고 낮게 깔리는 하얀 뭉게구름 같은 연기.

내 발은 그곳을 향해 스스럼없이 움직였고, 이내 꺾인 코너 하나만을 남기고 그 자리에 멈췄다.

살살, 어째서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게끔 조심스레 발을 옮겨 골목길 안으로 들어선 그때, 그 속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선객의 시선과 나의 눈이 어찌할 새도 없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 백하은 쿡?"

"차, 찬혁이니?"

백하은 쿡. 그녀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에서, 필터 가까이 타들어 간 담뱃재가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져 내렸다.

***

찬혁과 백하은. 얼떨떨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 손에 칼 가방을 들고 마치 고양이처럼 기척도 없이 골목에 들어선 찬혁과, 세워놓은 오토바이의 안장에 늘어지듯 걸터앉은 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담배 연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하은.

갖춘 복장 탓인지, 꼭 다른 장르의 영화를 한 스크린 안에 붙여놓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던 두 사람의 기묘한 대치는, 잠시 후 필터를 집어삼킬 듯 화마를 뻗어온 담뱃불의 열기에 깜짝 놀라 물고 있던 담배를 얼떨결에 떨궈 버린 하은의 행동으로 무너져 내렸다.

"앗, 뜨거!"

"괜찮으세요?!"

어찌나 놀랐으면 담배를 바람 총이라도 쏘는 것 마냥 훅 뱉어내고, 그 기세에 밀려 안장 뒤로 넘어갈 뻔한 하은의 행동에 놀란 찬혁이 재빨리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찬혁의 신속한 반응 덕에 다행히 넘어가지 않고 겨우겨우 중심을 되찾은 하은이 십년감수 했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고는 찬혁에게 고개를 돌린다.

"고마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네."

"조심하세요. 몸이 가장 큰 재산인 사람이 오토바이를 운전하다가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앉아 있다 넘어가서 다쳤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찬혁 딴에는 제법 진지한 충고였으나, 그 말을 귀담아들을 정신이 없던 하은은 오토바이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찬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가, 이내 다시 손을 거두었다. 담배 핀 손에 남은 냄새가 그의 옷에 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 그런데 어쩐 일이니? 나오지 말고 쉬라니까는."

점점 돌아오기 시작한 정신을 붙잡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찬혁은 들고 있던 칼가방을 내밀었다.

"이거, 쿡 물건 아닙니까?"

"응? 어, 잠깐만."

아무리 빛이 잘 닿지 않아 어두운 골목이라지만, 수년 동안 다뤄온 자기 물건을 몰라볼 그녀가 아니었다. 찬혁의 손에 들린 물건이 자신의 칼 가방이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챈 하은이 깜짝 놀라며 찬혁의 손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걸 왜 네가 갖고 있어? 분명 챙기고 나온 줄 알았는데?!"

"주방에 놓고 가셨던데요. 이거 드리러 온 거예요."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습니다. 받으세요."

무심한 표정을 지은 찬혁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한 하은은, 그가 내민 칼 가방을 받다 말고 아까 찬혁의 어깨에 닿으려던 손을 뺀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의 손을 뒤로 빼냈다.

"?"

그 요상한 행동에 찬혁이 의문을 갖기도 잠시, 손을 뒤로 뺀 그녀는 이내 자신이 앉아 있던 오토바이의 탑 박스를 열어 보이며 면목이 없단 표정으로 찬혁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혹시 여기다 좀 넣어줄 수 있을까?"

"…… 예. 그 정도야 뭐."

일견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찬혁은 나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담배 냄새가 혹시라도 조리도구에 배지 않도록 조심하는 거겠지.'

그럴 거면 담배를 왜 피우나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 자신도 흡연자였던 시절이 길었던 만큼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기에, 저런 최소한의 노력이 고깝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 정도면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편이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칼 가방을 탑 박스 깊이 넣어 흔들리지 않게끔 위치를 잡은 찬혁이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들어갈게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따 출근하고 봬요."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리는 찬혁. 그 담백한 대응이 반대로 하은을 당황케 만들었다.

"저, 저기!"

"? 하실 말씀 있으세요?"

사람이 너무 놀라면 오히려 침착해진다고 하던가. 반대로 말하면, 놀라움의 수준이 적당히 수위를 맞추기 시작한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현재 상황에 대한 고찰로 뒤죽박죽 섞여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그 증거로, 간단한 인사 후 집으로 돌아가던 찬혁을 무심코 붙잡은 그녀였으나, 당연하게도 급작스런 충동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무런 계획성도 띠지 못했다.

사람을 붙잡아놓곤 말도 없이 우물쭈물거리는 하은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찬혁. 하지만 하은은 하은 대로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게, 그러니까……."

입속에서만 메아리치던 낱말들을 얼기설기 짜깁기하여 간신히 꺼낸 말은, 그녀가 보기에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 없네? 아무 말도. 이거, 나."

"예?"

이미 문장이 아니라 단어장에서 룰렛이라도 돌려 뽑아낸 것 같은 낱말의 조합을 이해하지 못한 찬혁이 되묻자,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말이 안 통하면 바디랭귀지라도 해볼까 하여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조심히 거둔 그녀는, 상기된 얼굴을 푹 숙이며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자신이 가리켰던 담배꽁초를 주워 뒷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용 재떨이 속에 묵묵히 갈무리했다.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탄성을 뱉는 찬혁이었으나 이미 배는 떠난 뒤였다. 이제 와서 아는 척을 하는 찬혁에게 맞장구를 쳐줄 수 있을 만큼 하은의 얼굴 가죽은 두껍지 못했다.

이제는 아예 몸까지 돌려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감추는 그녀의 등을 향해 찬혁이 혼잣말하듯 말을 건넸다.

"뭐냐, 그러니까…… 매너가 좋으시네요. 휴대용 재떨이 챙겨 다니는 사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에요."

본인은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겠지만, 그는 모를 것이다. 지금 하는 행동이 무방비한 사람의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갈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하은은 지금 친한 사이의 친구들도, 심지어 그녀의 부모들과 동생인 백예은조차 모르는 비밀을 들키고 말았다는 충격에 휩싸여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찬혁은, 그저 인생의 좋은 팁이나 하나 줄까 하는 마음을 담아 말을 이었다.

"저기, 백하은 쿡. 손에 냄새 배는 게 싫으면 싼 노트 같은 거 들고 다니시면 좋거든요? 노트 한 장 뜯어서 길게 만 다음 반으로 접어서 집게처럼 쓰시면 손에 냄새 하나도 안배요. 그리고 피실 때 바람을 등지고 피시면……."

다만 그 팁이라는 것을 읊으면 읊을수록, 그녀는 가슴에 꽂힌 대못 위에 망치질을 당하는 기분이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됐거든?!"

결국 백하은은 참다못해 고개를 휙 돌려 찬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그렇지 않으면 조명이 너무 어두운 탓인지. 평소 열정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두 눈은 지금에 와선 감정의 기미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메말라 있었다. 그저 눈가에 맺힌 희미한 물기만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순식간에 지퍼를 여미고 헬멧을 뒤집어쓴 백하은이 그녀의 애마인 470cc의 배기량을 자랑하는 크루즈 바이크 위로 꼭 뜀틀이라도 뛰는 것처럼 멋들어지게 올라타자, 찬혁은 저도 모르게 무심코 박수갈채를 그녀에게 보냈다.

"이익!"

그녀가 그 박수를 어떤 심정으로 받았는지는, 헬멧의 실드 너머로 쏘아지는 저 안광이 대신 말해 주고 있었지만.

야간 주행에 맞춰 선팅된 실드를 올린 그녀가 눈물 맺힌 상삼백안을 부라리며 찬혁을 향해 외쳤다.

"너, 이따 출근해서 보자!"

그와 동시에 오토바이의 손잡이를 비튼 그녀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정작, 그 선언을 들은 찬혁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피곤한 머리로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길 뿐이었다.

"무슨 옛날 만화 악당도 아니고…… 그나저나 저거 저렇게 달리면 사람들 다 깨겠는데."

우렁찬 배기음을 벗 삼아 달려나가는 바이크의 뒷모습을 보며, 태평한 생각이나 하는 찬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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