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치킨 레이스.-1-
백하은 쿡이 사 온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운 우리가 뒷정리를 마무리한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레시피 점검이었다. 다만, 그 대상은 우리가 만들 레시피가 아니었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잖아? 그래서 준비해왔지."
"호오."
어딘가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가방을 뒤적인 그녀가 이윽고 파일 하나를 꺼내 탁자 위로 펼쳤다.
파일 속 내용물은 역시나 레시피였다. 하지만 평범한 레시피가 아니다.
'대체 얼마나…….'
대체 몇 번을 되풀어 읽은 것인지,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종이는 누덕누덕 손때가 묻어 거무스름해져 있을 지경이었으며, 안 그래도 자그마한 글씨들 사이사이에 적힌 첨언, 주석과 그 주변으로 번진 잉크 자국은 이 레시피를 가진 이의 집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미안, 좀 깨끗한 걸로 가져오려 했는데……."
쑥스럽다는 듯 파일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백하은 쿡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이게 더 좋아요."
"그, 그러니?"
단호하리만치 딱 잘라 말하는 나를 보며 살짝 당황스런 기색을 내비친 백하은 쿡이었으나, 정작 나는 그런 그녀를 볼 여유가 없었다. 이 레시피.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휘갈긴 이 글자들에 담긴 정보가 내 눈이 돌아가는 것을 감히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이거, 처음 보는 요리네요."
나름 업계 경력이 긴 나조차 생소한 요리. 하지만 이 레시피는 그런 나도 단번에 만드는 법을 알 수 있을 만큼 상세한 부분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닭을 통으로 넣어 대파, 마늘, 생강 등으로 육수를 끓이고, 육수를 끓인 닭의 살을 결대로 잘게 찢어 도라지, 고사리, 버섯, 채 썬 소고기, 죽순, 미나리 등의 재료와 밀가루로 버무린 반죽을 마치 수제비처럼 육수에 넣어 끓인 요리.
제법 특이한 조리법에 호기심이 돋았다. 대체 어떤 요리인지, 실제로 만들면 무슨 맛이 날지.
거의 눈이 빠져나갈 지경으로 레시피를 탐독하는 내 모습이 우스운 건지, 아니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린 백하은 쿡이 내게 말했다.
"그건 초교탕이라고 해. 궁중요리라 조금 낯설 수도 있어."
"초교탕…… 그럼 혹시 이게?"
"맞아. 이게 주방장님이 만드시는 메뉴야. 내가 추측한 거라 완벽하진 않지만."
주방장님이 만든 요리를 먹으며 처음부터 역설계를 하는 데에 진땀깨나 뺐다고 말하는 백하은 쿡의 얼굴에는 뿌듯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와, 이건 저희도 어떻게 만드는지 전혀 모르는 건데,"
레시피를 보고 놀라는 두 남매에게 그렇지 않다며 손을 저은 그녀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먼저 만들어서 시식해 본 다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것이 올바른 순서였다. 일단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의 높이를 알아야 사다리가 필요한지, 아니면 사다리차를 끌고 와야 할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효민 선배와 창민이도 동의하는 눈치.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우리가 제안을 긍정하자, 백하은 쿡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보자."
그런 그녀를 따라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우리를 향해 백하은 쿡이 자기도 깜빡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말하는 걸 까먹고 있었네."
"?"
"잘 부탁해. 아마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보자."
백하은 쿡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정작 그 눈웃음을 받은 내 몸에서는 영문 모를 한기가 일어났지만.
***
언젠가 효민 선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백하은 쿡과 같이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대 그녀의 신경에 거슬릴만한 짓은 엄두도 못 내게 된다고 말이다.
'농담이 아니었네…….'
한때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말이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그건 농담도 뭣도 아닌, 아주 진실에 가까운 말이었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좀 축소해서 말한 것 같기도 한데.'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가정집에 딸린 주방이지만, 그럼에도 사람 세 명은 넉넉히 들어갈 공간을 자랑하는 주방의 중심에 선 백하은 쿡.
평소 가게에서 입는 하얀색 조리복이 아닌 검은색 조리복을 입은 그녀는 그야말로 요리에 목숨이라도 걸린 듯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요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칼과 재료를 오가는 두 손 위로 드러난 팔뚝에는 자잘한 흉터와 더불어 힘줄이 가득했고, 눈에서는 귀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안 그래도 매서운 눈매를 한 백하은 쿡인데, 거기에 저 서슬 퍼런 눈빛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귀신이 겁먹고 줄행랑을 내빼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어, 언니. 여기 홍두깨살이랑 버섯 양념 끝났는데요……."
"고마워, 거기 놔줄래?"
"아, 넵."
그 와중에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지라, 얼굴과 목소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더더욱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꼭 터지기 전 화산 같네.'
아니면 바람 가득 찬 풍선이라거나. 무언가 자그마한 자극이라도 가해지면 그 즉시 폭발할 것만 같은 날 선 분위기 속에서도 요리는 빠른 속도로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궁중요리라고는 해도 고작해야 요리 하나에 실력 좋은 요리사가 넷이나 달라붙어 있으니 작업이 늦어지래야 늦어질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조리법이 꽤 단순하기도 하고.'
주방장님 특제라던 초교탕의 조리법은 생각 이상으로 간단했다. 물론 우리들 기준이기는 하지만.
정리하자면 대강 이러했다.
1. 대파, 무, 마늘, 생강, 인삼, 통후추 등의 재료와 닭을 삶아 육수를 뽑는다.
2. 1)에서 사용된 닭의 살을 발라 잘게 찢는다.
3. 잘게 찢은 닭의 살코기를 채 썬 재료와 섞은 뒤, 밀가루, 계란물을 넣고 잘 비빈다.
4. 점성이 생겨 덩어리진 반죽을 1)의 육수에 넣고 한소끔 끓여준다.
그 제작과정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맛은 있겠지만, 이 정도로?'
안가람의 기간 한정 메인메뉴로 10년을 버텼다기에 얼마나 대단한 요리일까 했는데, 예상보다 그리 대단치 않은 결과물에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내가 빼먹은 과정이 있을까 싶어 레시피를 다시 한번 샅샅이 훑었으나, 딱히 그런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시간은 흐르고, 요리는 완성됐다.
다들 이미 저녁식사는 얼추 마쳤기 때문에, 가져온 재료를 고려해서 양 자체는 적었지만, 요리 자체의 비주얼 탓인지 살짝 푸짐하게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판단은 먹은 다음에 해보자.'
결국, 무슨 요리든 평가는 먹어본 뒤에나 내릴 수 있는 법. 마음속에서 점점 싹을 틔우던 의구심을 잠시 접어둔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식기를 손에 쥐었다.
"일단 이게 내가 최대한 재구성해 본 초교탕이야. 다들 먹어보렴."
우리 몫까지 손수 담아준 백하은 쿡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한 뒤, 앞에 놓인 초교탕을 살피기 시작했다.
기름이 살짝 뜬 맑은 국물. 그 속에 엉기성기 얽은 뗏목처럼 다양한 재료가 난잡하게 뭉친 반죽이 꼭 국물 위를 표류하는 듯 떠다닌다. 내가 말한 것이긴 하지만, 뗏목이란 표현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그릇을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향이 좋네.'
닭국물 특유의 고소한 향과 그사이에 섞여서 피어오르는 다양한 향들.
인삼의 쌉쌀한 향, 마늘과 파의 청량감, 버섯과 죽순을 통해 흘러나오는 달큰한 내음. 무엇 하나 조화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와, 진짜 아빠가 만든 거랑 똑같다."
"그러게."
나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메뉴지만, 저 둘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 소리겠지. 예로부터 음식은 혀뿐만 아니라 눈과 코로도 즐기는 것이라 하였다. 그 말은 즉, 눈과 코의 차례가 끝났다면 혀가 그 배턴을 넘겨받을 때가 됐다는 뜻이다.
"으음."
자신의 순번을 애타게 기다리던 혀가 드디어 제 몸으로 음식을 받아내었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콧소리를 흘렸다.
담백한 국물 속 깊이 배어든 감칠맛. 진하지는 않지만, 단순한 맛 이상으로 혀에 각인되는 복잡한 얽힘. 기름층 아래에 갇혀 온기를 그대로 간직한 국물은 들이켜는 순간 마치 불덩이를 뱃속에 넣은 듯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뿜어낸다.
"와."
"어때, 맛있지?"
"예. 굉장히."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맛이었다. 한국적이면서도 생소한 느낌. 완성도 높은 궁중요리란 이러한 것이던가.
좀처럼 감상을 표현하지 못하고 숟가락만 놀리고 있자니, 초교탕을 담고 있던 그릇은 눈 깜짝할 새 자신의 바닥을 드러냈다. 확실히, 훌륭한 일품이었다. 담백하면서도 끈기 있게 혀에 감기는 맛. 빵빵한 에어컨 바람 앞에서도 이마에 땀이 오르는 화끈함. 그야말로 여름철 보양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일품이었다.
'맛있어. 분명 맛있긴 한데…….'
그러나, 요리를 끝까지 맛본 내 머릿속에선 아까 싹을 틔웠던 의문이 이제는 꽃봉오리를 달고 눈을 어지럽히듯 흔들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뭔가 부족해.'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마찬가지로 빈 그릇을 내려놓은 선배와 창민도 묘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음……."
"글쎄……."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두 사람의 모습에 백하은 쿡이 자기도 이해한다는 듯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방장님이 만든 요리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 주방장님이 직접 만드신 건 적어도 이것보다 배는 맛있거든."
"배요?"
"응. 물론 요리라는 게 단순히 수치로만 계산할 수는 없는 거지만, 내 생각은 그래."
놀라운 말이었다. 직접 먹어본 적이 없으니 도통 감이 잡히진 않았지만, 백하은 쿡이 이토록 단호하게 말할 정도면 대체 주방장님의 초교탕은 얼마나 대단한 수준이라는 말인가.
내가 어딘가 부족하다고 말했던 이 초교탕조차 기준이 안가람이라는 업계의 정상이었기 때문이지, 절대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이것도 없어서 못 먹을 수준의 요리였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주방장님께 도전해서 이기려면, 못해도 이 초교탕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맛있는 메뉴를 만들어야 해."
"……보통 힘든 일은 아니겠네요."
"그래, 알아. 굉장히 힘든 일이겠지. 나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거야."
백하은 쿡의 날카로운 안광이 우리에게 향했다.
"그래서, 너희가 필요해."
마치 정해진 사실을 읊는 것 마냥. 이보다 더할 리 없다는 확신이 담긴 시선이 몸을 꿰뚫는 듯 쏘아진다.
"너희와 내가 함께 힘을 합친다면 가능하리라고, 나는 믿고 있어."
대체 우리에게서 무엇을 봤기에 저런 자신감이 솟아나는 것일까.
어느 의미 안상필이라는 이름의 거두를 쏘아 떨어트리기 위한 동맹. 백하은이라는 사수의 손에는 여태껏 갈고닦은 레시피라는 이름의 총과, 몇 가지 실적을 제외하면 제원도 불분명한 세 발의 총알만이 들려 있을 뿐이다.
승산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현실.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라면 도전하지 않을 길.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머리에 빠진 나사 하나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보아라.
'하.'
누구 하나, 싫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 없다.
"좋네요. 해보죠."
"언니, 제 인생 목표가 뭔지 알아요? 학교 졸업하자마자 아빠 자리 뺏는 거예요."
"……불효녀 납셨다 아주. 나는 그런 가게 싫으니까 알아서 독립할게."
무모하다는 이유로 발을 빼기엔, 우리 모두가 걸어온 길이 너무 머니까.
"거봐. 이럴 줄 알았어."
아무래도, 백하은 쿡의 도박은 이미 반쯤 성공한 듯 보였다.
판돈은 올렸고, 패도 까졌다면 남은 건 상대의 카드를 뒤집는 것뿐. 다만 한 가지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아직 손 패에 와일드카드가 남아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 와일드카드를 어떤 카드로 바꾸느냐는 우리 손에 달린 문제였다. 총을 든 도박사가 패를 보며 웃는다.
"역시 타고 났다니까. 자, 그럼 치우고 연습 시작하자. 내가 준비한 레시피 다 만들어보려면 자정까지 해도 시간이 모자랄 거야."
치킨 레이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