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거부할 수 없는 제안.-2-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침묵에 잠긴 일행.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각자 눈을 굴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우리는 이내 서로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직감했다.
'이건 그냥 먹었다가는 좀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당장 레시피 제출은 이틀 뒤인 목요일까지. 서류평가를 통과한 작품을 실제로 만들어 심사한 뒤, 그중 가장 적합한 작품을 분류가 겹치지 않는 선에서 골라 말복 당일에 사용하는 것이다.
당선된 레시피를 만든 직원에게는 적긴 하지만 그달 특별 보너스 명목으로 추가금도 지급되며, 무엇보다 안가람에서 사용된 레시피를 만들었다는 명예가 있다.
'게다가 이미 만든 레시피는 복날이 지난 뒤라면 어떻게 쓰든 상관 안 하니까.'
보너스라고 주는 금액은 사실상 레시피 하루 대여료라고 보아야 한다. 당선만 되면 정말로 이만큼 남는 장사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선배는 어때요?"
"으음, 난 이번 복날은 따로 생각해둔 것도 없어서 넘어가려고 했었는데……."
"난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
하긴, 여름방학 시작 전에는 대회다 기말고사다 할 게 천지였으니 소소한 이벤트 같은 걸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겠지.
지금부터 레시피라는 이름의 탑을 쌓기에는 시간이 모자라다. 하지만 그냥 고사하기는 아쉽다. 뭐, 여기 모인 면면 중 그렇게 됐을 때 가장 아쉬울 사람은 나겠지만.
'어차피 이 두 사람은 앞으로 얼마든 기회가 있겠지만, 난 아니란 말이지.'
각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던 와중, 문득 머리를 스친 의문에 나는 백하은 쿡을 돌아봤다.
"하은 쿡. 혹시 이전에 미리 준비해 둔 레시피는 따로 없습니까?"
"물론 있지. 난 언제 물어보나 했어."
말을 안 하면 그걸 어떻게 아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대화가 괜한 내용으로 길어지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에 그만뒀다.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듣고 더 놀라는 것은 효민 선배 쪽이었다.
"응? 정말로요? 그럼 저희 도움은 왜 필요한 거예요?"
우리 세 사람의 눈이 나란히 백하은 쿡에게 향했다. 선배의 의문은 합당한 것이었다. 애당초 미리 준비한 레시피가 있다면 굳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우리의 의아함 섞인 눈빛을 한 몸에 받은 백하은 쿡은 얼음이 둥둥 뜬 음료를 젓고 있던 빨대를 손에서 놓고는 쓰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없어서."
"자신?"
왠지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 말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공교롭게도 백하은 쿡이 입에 담은 말은 나나 선배가 예전에 했던 말과는 달리 본래 가진 뜻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이번에 내가 준비한 레시피, 한상차림 메인 메뉴거든."
"네?"
"진짜요?"
화들짝 놀라는 효민 선배와 창민이. 그 두 사람의 반응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메인 요리면 부담스럽기야 하겠지만, 이렇게 놀랄 이유가 있나?'
어찌나 반응이 컸으면 옆에 있던 내가 다 놀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에 의문을 갖고 다시금 백하은 쿡을 바라보니, 그녀는 곤란하단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찬혁이는 잘 모르겠구나. 요 몇 년 사이 메인에 도전한 사람이 굉장히 적거든."
"? 어째서죠?"
"레시피를 내도 그게 뽑힐 확률이 정말 희박하니까. 다들 가망 없는 짓은 안 하기로 한 거지."
그건 또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다. 메인이 부담스러울망정 리스크가 높은 만큼 리턴도 클 텐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백하은 쿡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들어오기도 전부터, 이런 특별 메뉴의 메인을 맡는 사람은 항상 같은 사람이었어."
"…… 그게, 누군데요?"
이때, 내 머릿속에 '설마?'하는 생각이 가득 찼다. 만약 저 뒤에 나올 이름이 내가 짐작하는 그 사람이 맞다면, 어느 누구도 쉬이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내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안상필 주방장님. 참, 같은 레시피를 10년 동안 썼다는데 이제껏 그걸 넘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우스운 이야기지?"
"하, 하하……."
그러게나 말이다.
정말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었다.
***
"결정했습니다. 전 해볼래요."
"…… 정말로?"
잠시 뒤, 우리의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나는 선배와 안창민에게 그렇게 말했다.
선배는 진심이냐는 듯 망설임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이미 뜻을 굳힌 지 오래였다.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야.'
내가 여기 안가람에 온 목적은 처음부터 눈도장을 찍기 위함이었다. 미래에 이름 있는 셰프들 중에서 안가람을 거친 이가 대체 몇 명이던가. 당장은 그런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더라도 지금 있는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박아두면, 그건 돌고 돌아 그런 셰프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실낱같은 가능성을 뚫고 이번 레시피 공모에서 주방장님을 밀어내기라도 한다면……!'
안상필 대가. 전통 한식의 대가. 안가람의 주방장. 청출어람의 표본이라 일컬어지는 인물. 아무리 백하은 쿡의 조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과 한식으로 맞붙어 이긴다면 분명 대단한 사건이 되리라.
이런저런 계산이 있긴 했지만, 바탕에 깔린 생각은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것이었다.
고작 고등학생이 안상필 대가에게 쓴맛을 보았다고 한들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나이에 도전 정신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또 모를까.
그런데 만약 이긴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이 정도면 이쪽은 칩 하나만 걸었을 뿐인데 상대편에선 올인한 거나 마찬가지지.'
각오를 단단하게 굳힌 내 표정을 본 선배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잃을 것도 없는데,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창민이 넌?"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오자, 안창민은 물을 것도 없다는 듯 단숨에 대꾸했다.
"난 처음부터 할 생각이었어."
"오, 자신감 뭐야."
사실, 정말로 도전하는 게 우리뿐이었다면 자신감이 아니라 만용에 불과했겠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그런 불안함을 달래줄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는 것이 마음의 안식이다.
"그럼 의견도 하나로 모인 것 같으니, 퇴근하는 길에 백하은 쿡한테 말씀드리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마주 보며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도 일단락됐으니, 지금은 눈앞에 쌓인 잡일거리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괜히 늦으면 퇴근시간도 밀릴 판이었기에 우리는 서둘러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잠시 후, 우리의 뜻을 전달받은 백하은 쿡은 기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정말? 힘든 부탁이었을 텐데, 승낙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저희가 언니 준비한 거에 재만 안 뿌리면 다행이죠."
"설마. 나야말로 준비한 게 모자란 거 아닐까 걱정된다, 얘."
"에이, 그럴 리가요. 히히."
"후후후."
좀처럼 끼어들기 힘든 여성들 사이의 대화를 멀찍이서 바라보던 나와 창민은 그저 어깨를 맞대고 팔꿈치로 서로를 툭툭 치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몰래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뭔가, 잘 모르겠어."
"너도냐? 나도 그래."
나이를 두 배는 더 먹은 나도 이러는데, 얘는 오죽할까.
그렇게 우리가 의미 없는 잡담을 주고받을 동안, 저쪽은 슬슬 대화가 끝난 것인지 서로 몸을 돌리더니 양쪽으로 갈라졌다. 선배는 이쪽으로, 백하은 쿡은 부엌을 향해서.
우리를 향해 다가온 선배는 어딘가 개운한 표정이 만면에 가득했다.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걸까.
"백하은 쿡은 뭐라고 하십니까?"
"아직 퇴근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고, 조금 이따 보자던 데?"
"조금 이따? 어디서?"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
"집에서요?"
"응. 집에서 같이 연습해 보자고 했거든."
허어, 이건 또 갑작스러운 이야기다. 안창민은 그다지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인상을 쓰며 제 누나를 향해 투덜댔다.
"아니, 상의를 좀 하든가."
"그럼 어떡해. 당장 내일모레까지 레시피 제출해야 하는데 당장 연습할 주방 구하기가 좀 쉬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도 한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일정이 빡빡하니 별수도 없고."
"하아, 알겠어. 어쩔 수 없지, 뭐."
결국 말다툼은 논리와 누나의 권위를 앞세운 선배의 승리로 돌아갔다. 나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이미 이 두 사람과 난데없이 동거를 하게 됐을 때부터 그런 쪽으로 생기는 불만은 접어두기로 마음먹었으니까.
***
동생한테 이긴 게 그리도 자랑스러웠던 것일까. 집에 돌아온 뒤로도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집을 거닐던 선배는 씻고 저녁 먹을 시간이 돼서야 간신히 평소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언니도 집에 한 번 들렀다 오시기로 하셨으니까, 그 전에 이거 먼저 한 번 확인해보자."
그렇게 말한 선배의 손에 들린 네모난 플라스틱 막대 하나.
그게 대체 무어냐고 묻기도 전에 선배가 먼저 나서 그 물건의 정체를 밝혔다.
"언니가 준 USB야."
"아하, 그 안에 레시피가 있는 겁니까?"
"응, 맞아."
"그런데 어떻게 보게? 우리 방에 컴퓨터 없어."
안창민이 그 질문을 꺼내기가 무섭게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내 방에는 있어. 들어와서 같이 보자."
"……."
굳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내 얼굴을 본 선배는 장난이라며 웃고는,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그 광경에 너무 어이가 없던 나머지 한쪽 눈가가 파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이성하고 한 지붕 아래 사는 건 처음이라 이래저래 자그마한 스트레스가 있는데, 왜 이 사람은 계속 이런 장난을 치는 걸까. 그런 불평을 쏘아내자, 선배는 미안하다며 혀를 빼꼼 내밀고 웃었다.
"찬혁이 너 여동생도 있다며? 그럼 좀 면역이 있지 않나?"
"여동생이요……?"
여동생? 그건 이성이 아니다. 이종이라면 모를까.
한숨을 길게 내뱉은 나는 선배를 재촉했다. 어차피 장난을 더 해봐야 이야기만 길어질 것 같으니 내가 끊는 수밖에.
내게 등을 떠밀린 선배는 아쉽다는 듯 입을 닫고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세팅했다. 전원선 연결부터 마우스, USB까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선배는 노트북을 펼쳐 USB 속 폴더를 화면에 띄운다.
그리고, 화면에 뜬 USB 속 내용물을 본 우리는 놀라움에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우와……."
"이거……."
"오."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작은 아이콘으로 표시된 PDF 파일이 엄청난 길이로 늘어난 스크롤을 따라 한도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모습. 파일에 붙은 이름들을 보니, 그 모든 파일은 하나같이 레시피와 요리 관련 논문 등임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내 컴퓨터 같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난잡하진 않았지만. 허나 그런 난잡함조차 이것의 주인인 백하은 쿡의 열정과 노력을 가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 난잡한 폴더는 그 나이에 저만한 위치에 오른 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는 증거였으니까.
마치 레시피로 쌓은 산더미 같은 폴더 속에서 말복 제출용 레시피라고 적힌 파일 몇 개를 간신히 찾아낸 우리는 밥을 먹는 것조차 잊고 홀린 듯 그것을 바라봤다.
"와, 언니 준비 진짜 많이 했구나."
"그러게요. 이 정도면 그냥 전문점을 차려도 되겠는데요."
복날에 가장 흔히 먹는 삼계탕에 대한 레시피만 세 종류.
그 외에도 차게 식힌 닭 국물에 깨를 넣고 갈아 완자 등의 고명을 찢은 닭고기와 함께 먹는 임자수탕. 닭으로 끓인 육개장인 닭개장, 백숙으로 만든 닭의 살을 발라내어 다시 매운 양념을 넣고 끓인 연계국, 차게 식힌 닭육수를 가늘게 자른 묵과 함께 먹는 초계탕 등등.
닭으로 만드는 요리란 요리는 몽땅 조사한 것 같은 집념마저 느껴지는 화면 속 자료들에 우리는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
"……."
"……."
얼마나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말조차 잊은 채 레시피 탐독에 여념이 없던 우리를 일깨운 것은 별안간 바깥에서 들려온 커다란 엔진소리였다.
'이 늦저녁에 오토바이?'
소리로 보건데 최소 150cc 이상. 여기도 나름 골목을 끼고 들어오는 곳이라 큰길이 꽤 떨어져 있을 텐데, 이런 곳에 왜 저런 요란한 오토바이가 왕래하나 싶어 문을 바라본 그때, 나와 마찬가지로 화면에서 눈을 돌린 효민 선배가 흘리듯 말했다.
"아, 언니 왔나보다."
"예?"
"언니 출퇴근할 때 항상 오토바이로 하시거든. 나도 몇 번 타봤다?"
"아, 그렇군요."
그 말에 놀라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백하은 쿡의 모습을 상상했다. 우습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자동적으로 쎈 언니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할까. 오히려 잘 어울릴 것 같다.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창민이는 자연스럽게 현관으로 나가더니, 이내 백하은 쿡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검은색 슬랙스에 은빛 장식이 여기저기 늘어진 가죽점퍼. 한쪽 어깨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내린 기다란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들어선 백하은 쿡의 두 손에는 척 보기에도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밥 안 먹었지? 언니가 재료랑 같이 사 왔으니까 먹고 시작하자."
와.
철없는 감상이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개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