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78화 (78/403)

78. 거부할 수 없는 제안.-1-

백하은. 24세. 그녀는 성심고에 이어 서울 유명 대학의 호텔조리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안가람에 취직한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올해로 3년차요?"

"응, 맞아."

"계산이 조금 안 맞지 않습니까? 보통 하은 쿡 나이면 딱 대학 졸업할 나이일 텐데."

"아, 월반해서 조기졸업 했거든. 고등학교랑 대학 둘 다."

"와오……."

말을 정정하자.

그냥 능력 있는 여성이 아니라. 굉장히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대단하시네요."

"너무 그렇게 띄우지 마. 오히려 대단한 건 너네지. 난 이상하게 후배 복이 과하게 좋더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만 해도 같은 세대에서는 제일 잘 나간다고 듣고 살았는데 조금 지나니까 효민이가 나오는 거 있지."

툭 던진 가벼운 농담에 헛웃음을 짓는 나를 보며, 그녀가 날 향해 손가락을 세웠다.

"그런데 효민이에 이어서 너까지. 참, 후배들이 잘나면 선배가 힘들어요."

"하은 쿡도 충분히 대단하신 분이신데요, 뭘."

"말만이라도 고맙다 얘."

아닌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이룩한 일들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회귀 전, 백예은이 방송에서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기죽는다고 너스레를 떨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야 이런 사람이 언니면 그럴만도 하지.'

너무 뛰어난 형제가 있으면 사람이 고달파지는 법이다. 질투로든, 선망으로든. 그래서일까. 그런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백예은도 힘들겠네요. 하은 쿡처럼 잘 나가는 언니가 있으면 고생이 만만치 않겠어요."

"글쎄, 그건 어떠려나."

농 삼아 대화를 이어나가려 해본 말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말꼬리를 늘이며 얼버무린 그녀의 안색이 급속도로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티가 났는지 고작 몇 시간 동안 마주한 게 전부인 내가 다 알아챌 정도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는 것인지,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 초점이 맞지 않는 뚱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저건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시선을 두고 있는 건가.'

"……."

"……."

저쪽에서 먼저 입을 다물어 버리니 나도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힘든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합죽이라도 된 것 마냥 조용해진 자리. 어색해진 분위기가 괴롭다.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가?'

딱히 그럴만한 말을 하진 않은 것 같은데, 하은 쿡의 표정은 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벽이라도 보는 것처럼 동공이 풀린 눈으로 멍하니 있을 뿐.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기도 뭐해 수차례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다시 다물고 말았다. 나는 죽은 분위기를 다시 살릴 수 있을 만큼 달변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게 특기인 사람은 따로 있다.

"두두등장! 밥 가져왔어!"

"시끄러워. 그 게임 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어색한 침묵만이 맴도는 테이블에, 내가 기다리기 마지않던 구원의 빛이 그 모습을 내보였다.

"응? 둘 다 왜 그러고 있어요?"

안효민 선배와 안창민. 우리 몫의 식판까지 가지러 갔던 두 사람의 귀환을 나는 반갑게 맞이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선배. 얼른 앉으세요."

"?"

물론 그 이유를 모르는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지만.

***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맛있게 먹어."

선배와 창민이가 가져다준 우동과 주먹밥 세트를 앞에 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백하은 쿡이 살풋 웃으며 대꾸했다.

아까 보여주던 그 두루뭉술한 기색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정다감한 미소였다.

지금 우리 일행은 브레이크 타임을 맞아 점심 끼니를 해결하러 나와 있었다. 아침에 있던 호박죽 사건으로 나름 안면을 트게 된 백하은 쿡이 한턱 쏘겠다며 우리를 이 식당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만난 지 반나절 정도밖에 안 된 사람한테 밥까지 얻어먹자니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백하은 쿡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밥값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어차피 법인카드 있거든."

"아하."

과연, 그렇다면 사양할 이유가 없지. 정당한 소비가 받친다면 법인카드는 쓰라고 있는 법이니까.

순식간에 표정이 뒤바뀌는 나를 보며 백하은 쿡은 킥킥거리며 웃었으나, 효민 선배는 뺨을 부풀리며 핀잔을 흘렸다.

"그게 다 경비야, 경비."

"어차피 밥 먹고 영수증만 제출하면 달에 30만 원까지는 경비 처리해 주잖아요. 별로 다를 것도 없네요."

거기다 근무 시간이 길어지면 한도도 늘어나니, 복지가 제법 좋은 업장이다. 그것을 에둘러 칭찬한 것임을 눈치챘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선배의 얼굴도 활짝 피었다.

'뭐, 어차피 삐진 척도 장난이었겠지만.'

수다를 떠는 건 이쯤 하고, 지금은 나와 있는 식사를 해치워야 할 때였다. 이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가고 있으니 밥이라도 잽싸게 먹어둬야 그나마 남은 휴식시간을 지킬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여기 되게 맛있네요."

"그치?"

차게 식힌 전통적인 가쓰오부시 국물과 어우러지는 오동통한 면발. 고명으로 얹어진 튀김과 어묵은 그야말로 찰떡궁합! 겉면을 갈색이 되도록 직화로 구운 연어알 주먹밥도 굉장히 훌륭한 일품이었다.

"아, 주먹밥은 반 정도만 먼저 먹고, 나머지는 우동 국물에 말아서 먹어봐."

"으음! 이것도 맛있다!"

"우동국물에 말아 먹는 오차즈케는 드문데…… 확실히 맛있네요."

수분이 날아간 밥알 사이로 여름철 특별 메뉴인 냉우동의 국물이 스며들자, 원래는 서로 다른 메뉴였던 우동과 주먹밥이 순식간에 약한 훈제향이 느껴지는 오차즈케로 탈바꿈했다.

일식에 나름 일가견이 있는 내가 보기에도 이 가게는 본토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을 수준을 자랑했다.

우리가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음식을 흡입하듯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백하은 쿡의 시선은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솔직히 좀 부담이 되긴 했지만, 저렇게 눈에 온기를 가득 담아서 보는 사람에게 무어라 불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결국 우리는 살짝 거북한 상황 속에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저기, 백하은 쿡은 식사 안 하십니까?"

"나? 난 다 먹었어."

"예?"

도중에 인내심이 바닥나고 만 내가 '그만 보면 안 되냐.'라는 뜻을 에둘러 전달해 봤으나, 백하은 쿡은 어느새 텅텅 비어 버린 그릇을 기울여 보여줄 뿐이었다.

'이 사람들, 알아서 아무 말도 안 한 거구나.'

백예은의 그건 유전이었나? 아니, 밥 빨리 먹는 게 유전일 리가 있나. 같이 살다 보니 식습관이 비슷해진 거겠지. 이미 배불러 보이기도 하고.

그 시선 속에서 간신히 식사를 마친 우리를 백하은 쿡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안가람 근처에 있던 카페에서 마실 것까지 사서 대접한 그녀가 "디저트도 좀 먹을래? 여기 케이크가 맛있단다."라며 후식까지 권해오는 것을 간신히 말렸을 정도였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와 선배, 안창민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회의에 들어갔다.

"저거,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죠?"

"너도 그렇게 생각해? 야 나도."

"재미도 없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이 씨."

가만히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정리해 본 우리였으나, 솔직히 나는 추측다운 추측이 불가능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만난 지 고작 반나절 된 사람이 하는 생각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나마 오랫동안 교류가 있던 두 사람은 뭔가 생각나는 게 있을까 싶어 각자의 얼굴을 살폈으나, 이 둘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많지는 않은 듯 싶었다.

"일단 찬혁이가 되게 마음에 든 건 맞는 것 같아."

"그야 주방에서 일 잘하는 사람을 누가 싫어해."

"…… 맞는 말이긴 하네."

그 말에 선선히 수긍하는 선배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그건 좀 다를 때도 있다. 가끔 있더라, 그런 놈들이.

"근데 아무래도 저 혼자한테만 볼일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굳이 이렇게 세 명을 데리고 온 걸 보면."

"그런가?"

"설득력이 있긴 하네. 근데 우리 셋이 필요한 일이 있나?"

그게 궁금한 점이긴 하다. 우리 셋 정도 인력을 대체할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지는 않겠구나, 장난으로 말하며 넘어가서 그렇지 우리 정도 실력이면 비슷한 나잇대나 계급 중에선 대체재가 없는 수준이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 논의를 하고 있었을까, 결국 결론다운 결론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음료수를 홀짝이던 우리 사이로 다시 돌아온 백하은 쿡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미안, 많이 기다렸니?"

"아뇨. 저희끼리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그치?"

테이블 아래에서 발끝을 툭툭 건드는 선배의 신호에 나와 창민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게 좋지. 나도 너희 때엔 웃고 떠들면 하루가 금방 가더라니까. 학교를 전부 일찍 졸업해 버려서 요즘은 그럴 상대도 없어."

"에이, 언니도 지금 거리 나가면 다 고등학생으로 볼걸요?"

"아, 예. 그럴 거예요."

"하은 선배님이 우리 누나보다 더 어려 보여요."

아, 그건 너무 갔다. 세 치 혀를 놀린 대가로 꾸깃꾸깃 발을 밟히는 안창민의 고통스런 얼굴을 힐끔 바라본 나는 다시 백하은 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찬혁이가 만든 호박죽 반응 되게 좋더라. 홀 애들 말로는 리필이 안 들어온 테이블이 없대."

"아, 정말로요?"

"그렇다니까?"

왠지 시간 지나는 거에 비해서 호박죽 소모량이 너무 많다 싶었다. 전날에는 같은 시간대에 한 솥하고 반 정도가 나갔던 호박죽이 오늘은 같은 시간 동안 네 솥이 나갔으니까. 덕분에 내 일이 더 늘어난 것은 덤이다.

요리사로서는 기쁘지만, 직원으로서는 서글픈 딜레마적인 상황에 잠시 한숨을 뱉는 나를 보며 백하은 쿡이 웃는다.

휴식시간도 앞으로 30분가량. 영양가는 없어도 서로에게 즐거운 대화를 나누던 도중, 말이 끊긴 틈을 타 백하은 쿡이 입을 열었다.

"음, 다들 똑똑하니까 아마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사실 오늘 너희를 부른 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멈칫.

백하은 쿡의 발언에 하나처럼 굳는 우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직접적인 발언에 잠시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우리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내가 두 손을 다소곳하게 테이블 위에 모아 얹은 그녀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렇게 예의 안 차려도 돼. 부탁하는 건 나니까. 다만 듣고 잘 생각해 주면 좋겠어."

가벼운 미소로 운을 뗀 그녀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연중에 안가람 같은 한정식 집이 가장 바쁜 날이 언제일 것 같아?"

그녀의 영문 모를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쁜 날?

'보통 연휴 기간이나 공휴일, 특별한 날이 있을 때가 제일 바쁘지.'

회귀 전에 일하던 업장을 예로 들자면 졸업 파티 같은 게 있는 날은 꽤 바빴다. 인원수도 인원수고, 학생들은 잘 먹으니까. 하지만 그런 졸업 파티 날은 따위로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바쁜 날이 있다.

'크리스마스는 지옥이지.'

크리스마스 파티. 동양의 크리스마스 문화와 서양의 크리스마스 문화는 궤가 다르다. 정말로, 진짜 정말로 온갖 예약이 밀리고 밀려서 정말 사람이 돌아 버릴 정도로 바쁜 날이 최소 5일은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 5일 중 하루도 휴가를 얻지 못했다? 그때는 정말 자살이 빠른 탈출구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바빴다. 오죽하면 연휴가 끝나는 1월 1일이면 쿡들 사이에서 "아, 1년 끝났다!"하는 농담이 돌 정도였으니까.

'한정식 업장에서 가장 바쁜 날은 잘 모르겠는데.'

애당초 이런 전통 한정식 업장에서 일한 건 회귀 전을 통틀어도 이번이 최초다. 정보의 비대칭 탓에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다른 두 사람은 무언가 짐작이 가는 것이 있는 듯 목소리를 합쳤다.

"아, 그러고 보니 곧 그때구나?"

"나도 깜빡하고 있었네."

효민 선배와 안창민의 짧은 대화를 들은 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백하은 쿡은 자기가 설명해 주겠다며 입을 열었다.

"보통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겠지만, 안가람에서 가장 바쁜 날 중 하나가 바로 이번 주 토요일이야. 특별한 날이거든."

"이번 주 토요일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들어 달력을 펼쳤다.

8월 15일. 광복절이다. 중요한 날이지만 어차피 주말에 낀 공휴일이 대체 바쁜 것하고는 무슨 상관인가 싶어 화면을 얼굴 가까이 들이댄 나는, 이내 날짜 아래 자그맣게 쓰인 단어를 보고 백하은 쿡의 말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말복. 입술에 붙은 밥알마저 무거워진다는 삼복 중 마지막 날.

그것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나와 일행을 보며, 백하은 쿡이 말을 이었다.

"이번 주 목요일 밤에, 말복 때만 사용할 특별 메뉴의 레시피 제출 및 검수가 있을 예정이야."

한껏 달뜬 표정을 지은 그녀가, 차갑게 식은 커피로도 숨기지 못한 열기가 담긴 목소리를 뱉는다.

"나랑 같이, 레시피 만들어 볼 생각 없니?"

안가람이라는 업장에 자신의 족적을 남겨보지 않겠냐는 제안.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찾아올 고된 일정이 훤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싹 잘라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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