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77화 (77/403)

77. 옛것을 지키고 새로운 것을 죽인다.-2-

"흐음."

작은 침음성을 흘리며, 찬혁이 내온 호박죽을 앞에 둔 안상필은 자신의 판단이 너무 성급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유는 다른 한식에서도 쓰임새가 있으니 그러려니 했으나, 생크림이라는 전통 한식을 표방하는 안가람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재료선정 탓에 잠시 평정을 잃긴 했어도 그의 눈앞에 놓인 요리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완성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검은 그릇을 칠 부가량 채운 걸쭉한 노란빛 액체. 안가람의 레시피로 만든 호박죽보다 살짝 옅으나, 그러면서도 묘하게 탁한 곳 없이 깊은 색채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새 배색配色까지 맞췄나. 평범한 하얀 그릇을 안 쓴 건 칭찬해 줄만 해.'

색의 삼원색 중에서도 밝은 계열의 색깔인 노란색과, 반대로 삼원색이 모두 합쳐져야 나오는 검은색. 흑과 황은 교과서에서도 나올 만큼 기본적인 색의 조합이기는 했으나, 실제 업장에서 그것을 적용할 생각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호박죽의 겉모양을 먼저 면밀히 살피던 그가 마침내 숟가락을 잡았다.

"농도도 좋고, 만듦새가 우리 것과 살짝 다르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안가람의 호박죽은 본래 어느 정도 멍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익은 찹쌀가루 멍울은 입에 넣을 때 살짝 거친 식감을 주기는 하지만, 대신 울퉁불퉁한 입자에서 오는 맛의 다양성은 거친 식감과 합쳐졌을 때 그 맛을 배로 늘린다.

그러나 찬혁이 만든 호박죽은 그런 안가람의 호박죽과는 전혀 반대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마치 서양의 스프처럼 커다란 입자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죽. 그러면서도 스프와는 달리 알알이 박힌 투명한 입자가 찹쌀가루의 존재는 마치 자신이 다름 아닌 호박죽임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무슨 맛일지 대충 가늠이 가는군.'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음식을 먹지도 않고 눈으로 살피고만 있던 안상필의 모습에 조바심이 난 것일까. 혹시라도 식을세라 자신에게 질문을 건네며 재촉하는 찬혁에게 고개를 저은 안상필이 이윽고 호박죽을 한 숟갈 크게 퍼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우유와 생크림이 들어간 호박죽이라니, 어차피 스프 맛이나 안 나면 다행이지.'

어찌 보면 편협한 생각이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안상필의 우려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애매하게 동서양의 요리를 하나로 합쳐봤자 그 본질을 정확히 구분 지어 조화시키지 않으면 결국 한쪽이 다른 쪽에 먹혀 버릴 뿐이니까.

"음."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호박죽을 입에 머금고 굴리던 안상필은 입을 가득 채우는 고소함과 호박의 단맛을 느끼며 이내 그것을 꿀꺽 삼켰다.

"그래, 나름 잘 만든 호박죽이로군. 부드럽고 맛있어."

"그렇죠?"

'고작 이 정도 칭찬이 그렇게 기쁜 건가.'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안상필은 살짝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딸아이가 입이 닳도록 칭찬을 퍼붓던 녀석이 만든 게 이 정도 수준의 호박죽이라니. 맛은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평범한 느낌에 안상필은 속으로 푸념을 흘리며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결국 학생인가. 요리 섹션에 세우기에는 아직 일렀나 보군.'

음. 다시 먹어도 평범하게 맛있는 호박죽이다. 특필할 게 있다면 부드러움일까. 잘 익은 호박을 끓인 물과 함께 믹서로 간 다음 채로 걸러냈겠지. 아마 찹쌀가루를 넣은 뒤에도 한 번 더 채에 걸러냈을 것이다.

다시 한입.

하지만 그가 보았던 우유와 생크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분명, 이 호박죽에서는 크리미한 부드러움이 가득하지만, 스프 같은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전통적인 한식의 맛이 가득했다. 언제 놓은 것인지 모를 꿀이 담긴 종지를 발견한 그가 말없이 호박죽에 꿀을 곁들였다.

다시 한입.

그 이상함이 먹으면 먹을수록 묘하게 다가온다. 부드럽게 혀를 타고 목젖을 넘어갈 때는 슬쩍 달라붙는 듯, 떨어지는 듯 밀당을 하던 죽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면 꼭 물을 마시는 것처럼 순식간에 여운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 애달픈 여운에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그렇게 연달아 호박죽을 입에 넣다 보면…….

─드륵

"……음?"

'어느새, 손에 들린 그릇은 텅텅 비어 버리지.'

"아니, 이게 대체……."

손에 들린 그릇을 향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시선을 보내는 안상필을 바라보며, 찬혁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그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든 순간이었다.

***

내가 처음 구상했던 호박죽은 사실 지금 만든 것과는 살짝 괴리가 있는 일품이었다.

'원래는 호박퓌레랑 호박죽 중간지점 어디쯤을 잘 조율해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아마 해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처음 생각대로 만들었어도 제법 훌륭한 요리가 탄생했을 것이다. 분명 방금 주방장님이 드셨던 호박죽과는 전혀 다른 요리이긴 하겠으나, 완성도 높은 퓨전요리가 됐겠지.

하지만, 나는 이내 그 방법을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함정이었으니까.'

평범한 레스토랑의 메뉴였다면 그걸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가람은 온갖 퓨전요리와 새로운 레시피가 개발되는 와중에도 전통 한식의 자리를 꾸준히 고수해온 업장이다.

'어떻게 보면 우물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고여 있는 물이라도 역사가 쌓여 석유가 되면 그 가치가 달라지는 법.

어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안가람은 그야말로 석유 그 자체였다. 고인 물에 새로운 물을 붓는다면 젊은 피의 수혈이 될 수도 있으나, 석유에 물을 부어봤자 석유와 물, 양쪽을 모두 못 쓰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방식을 바꿨지.'

쉽게 말하자면 양쪽의 재료를 사용하는 대신 균형을 완전히 무너트려 버린 것이다. 서양적인 맛이 완전히 묻혀 버리게끔. 퓨전인 듯 퓨전이 아닌 퓨전요리. 모순이지만, 이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우유와 생크림 특유의 고소함을 살리면서도, 유제품 특유의 유분油分맛은 죽이는 것. 어려운 일이었으나 주방장님의 저 반응을 보건데 시도는 성공적으로 끝난 듯했다.

얼굴에서 의아함을 거두고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대신한 주방장님이 평소보다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와중, 그런 나의 뒤쪽에서 새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 이거 맛있다!"

"선배?"

낯익은 목소리의 정체는 내가 예상한 대로 선배였으나, 그 옆에는 미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 한 명 더 붙어 있었다.

"……."

'저 사람, 분명 아침에 봤던…….'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내가 만든 호박죽을 한 숟갈씩 떠먹고 있는 쿡과, 그와 반대로 한껏 들뜬 표정으로 거의 죽을 들이켜다시피 그릇을 기울여가며 먹고 있는 선배.

꽤나 상반되는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 아니 한 명의 소란을 듣고서야 충격이 가신 듯, 주방장님이 꺅꺅대는 선배에게 호통을 쳤다.

"안효민, 주방에서 소란 떨지 말랬지."

"죄송해요, 주방장님. 이게 너무 맛있어서."

"……하아."

살짝 움츠러든 몸짓으로 고개를 수그리는 선배의 모습에 주방장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봐도 연기라는 게 뻔히 보이는데 주방장님이라고 눈치를 못 챘을까, 다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주방장님도 모른 척 져줄 뿐이다.

"알겠다면 됐다."

어떻게든 공과 사를 구분하려 하면서도 좀처럼 선배에게 강압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주방장님의 모습에 웃기도 잠시. 다시 선배를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까, 깜짝이야……!"

대체 언제 온 것인지, 과장을 살짝 보태 내 바로 코앞에서 거의 이마를 찍을 듯 얼굴을 들이민 쿡이 내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네가 만든 거니?"

특유의 눈매 탓일까, 분명 노려보는 게 아닐 것임에도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특이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 묘한 기세에 눌린 내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니,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부담이 됐음을 깨달은 듯 흠칫 몸을 떤 그녀가 나와 마찬가지로 몸을 뒤로 뺐다.

"아, 미안. 조금 흥분했나 봐."

'조금?'

거기서 조금만 더 흥분했다간 보기만 해도 사람 한 명 정도는 거뜬하겠는데.

뒤로 이어진 생각들을 감히 입 바깥으로 꺼내지 못한 나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저기, 그러니까……."

"응? 아아,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자기소개를 안 했었나?"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무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준 쿡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나중에 차차 알려줄 테니까, 지금은 저 호박죽에 대해 좀 물어봐도 될까?"

자기소개까지 미뤄가며 내 요리에 과한 관심을 표출하는 쿡에 이어, 기류에 편승하듯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주방장님 또한 내게 의아한 눈길을 향했다.

"나도 궁금하네. 자네 요리에는 분명 우유와 생크림이 들어간 것 같은데, 정작 먹어보면 그런 맛은 찾아볼 수가 없거든."

"응? 우유랑 생크림을 넣었다고요? 정말이니?"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점 더 내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쿡. 어찌나 흥분한 건지 안 그래도 흰자 면적에 비해 자그마한 검은자가 더욱 작아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꽤 진심으로 무서운데.'

그래도 뭐, 이 사람이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요리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진심으로 요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태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이 나이에 저만큼 열정 가득한 사람도 찾기 힘든데.'

굉장히 꼰대스런 반응이었지만, 실제로 불혹의 나이까지 이 업계에 투신하면서 이 정도로 열정을 불태우는 젊은 쿡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안가람의 퍼스트 쿡 자리는 도박으로 딴 게 아니라는 것이겠지.

그 열정에 감탄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할 준비를 끝마쳤다. 더 이상 기다리게 했다간 제 명에 죽지 못할 것 같다.

"말씀하신 대로 저 호박죽을 만들 때에는 우유랑 생크림이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퓌레랑 호박죽을 합친 퓨전 요리를 만들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만들다 보니 생각이 변했습니다."

"그 이유는?"

"안가람에는 어울리지 않는 요리라고 생각해서 그랬죠. 같이 나갈 메뉴는 아무리 플레이팅이 화려해도 결과적으로는 전통 한식일 텐데, 이 한 접시만 퓨전 요리가 되어 버리면 너무 튈 테니까요."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이는 두 사람. 아니, 어느새 합류한 선배까지 합쳐 세 명이 된 일행을 향해 이어서 말했다.

내 레시피는 사실 매우 간단한 축에 속했다. 정확하게 배합된 곡물가루 믹스를 첨가하는 안가람의 호박죽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니까. 다만 손이 많이 갔을 뿐이다.

어레인지의 시작은 호박을 삶는 것부터였다. 호박을 삶을 때, 물만이 아니라 물과 우유, 그리고 건더기가 잔뜩 들어간 콩물. 이 셋을 잘 섞은 액체에 호박을 넣어 삶아준 것이다.

"물에다가 우유랑 콩물? 우유는 알겠는데, 콩물이라면 콩국수 만들 때 넣는 그거 맞지?"

"예. 콩물의 고소한 맛을 호박죽에 가미하면서, 동시에 우유를 넣는 걸로 콩의 비린 맛을 없앨 수 있죠. 우유의 부드러운 맛과 향이 삶은 호박 속으로 잘 배어들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기도 하고요."

이후 호박이 잘 익으면, 냄비에 든 모든 재료를 블렌더를 이용해서 전부 갈아준 뒤, 한 번 채로 걸러내어 찹쌀, 여러 곡물가루, 그리고 소량의 강황을 넣어 살짝 묽은 농도가 될 때까지 끓이고, 그것을 다시 채에 걸러 생크림을 적당량 넣고 농도를 맞춰 끓이면 끝.

"안가람에서 원래 만들던 호박죽에 곡물가루가 들어가는 건 어제 일 도우면서 알게 됐습니다. 거기에 착안해서 제 나름대로 레시피에 맞게끔 직접 갈아서 만든 곡물가루를 넣어 봤는데, 다행히 잘 된 것 같네요. 아직 조금 더 개선은 필요하겠지만요."

우유와 생크림의 향과 색은 콩물, 강황과 충돌시키는 것으로 덮고, 고소한 맛은 곡물의 맛으로 탈바꿈하여 마술처럼 그 둘의 존재감을 지워내는 것.

살림과 동시에 죽인다. 그게 이번 요리의 컨셉이자, 나의 실험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성공적인 실험이네.'

언뜻 보면 덧없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맛은, 연이어 먹으면 먹을수록 혀에 더욱 깊은 맛을 남긴다. 한 번 손을 대면 멈출 수 없는, 없던 식욕마저 되살리는 마법 같은 호박죽. 12시 종이 울려도 끝나지 않을 마법의 탄생이다.

내가 이룩한 결과에 만족하며 스스로 자화자찬을 하고 있을 때, 내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일행은 그 자화자찬에 힘을 더하는 듯 가벼운 박수를 보내왔다. 특히 누구보다 열성적인 얼굴로 경청하던 쿡은 아예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얼굴로 눈꼬리가 내려가니 오히려 평범한 미인상이 됐지만.

'뭐지?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그 영문 모를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내 안색을 살핀 것일까. 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별일 아니라는 듯 내게 손을 저어 보였다.

"이거 참. 나름 열심히 만든 레시피였는데, 그걸 까마득한 후배한테 깨져 버렸네."

"예?"

"여기서 전에 쓰던 레시피 말이야. 그거 내가 만든 거거든. 말은 이렇게 해도 내가 한 거라곤 곡물가루 믹스 비율 재정립 정도였지만."

"와, 정말로요?"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 치밀한 곡물가루 믹스의 조합비를 이렇게 어린 사람이 만든 거라니.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너스레를 떠는 쿡이었으나, 나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그 조합 찾는 데 3주가 걸렸는데 너는 고작 몇 시간도 안 돼서 완전히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었잖니?"

"그건……."

나는 일종의 편법을 쓰고 있으니 이건 공정한 경쟁이 아니었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겪은 사연이 너무 초현실적인 일이었다. 애당초 경쟁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덕분에 새로운 공부를 한 것 같아. 조화만 찾을 게 아니라 아예 서로 충돌시켜서 방해되는 걸 없앤다는 방법, 나는 상상도 못했어."

'뭐지 이 쿡? 비행기 좀 태울 줄 아는 사람인가?'

나라고 칭찬에 무감각한 건 아니다. 오히려 예민한 편이지 않나 싶다. 이렇게 몇 마디 안 되는 칭찬에 입꼬리가 올라가려 발악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입가를 매만지며 중력에 거스르는 입꼬리를 뉴턴의 법칙 아래 다시 종속시켜 준 뒤, 간신히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을 때 그녀는 앞치마 안쪽 면으로 말끔하게 닦은 손을 내밀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제대로 인사할게. 반가워. 류찬혁 쿡."

"아,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아참, 또 깜박할 뻔했네."

어수룩한 미소와 함께 쿡이 말을 이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백하은이야. 백 쿡, 하은 쿡, 누나. 뭐든 좋으니 편하게 부르렴."

"예. 백하은 쿡……?"

그 순간, 내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백하은? 어디선가 들어봤던 이름인데?

충격적인 사태 앞에서 패닉에 빠진 나를 놔둔 채, 백하은 쿡은 몸을 돌리더니 주방장님을 향해 외쳤다.

"주방장님, 찬혁이 제가 가져도 돼요?"

"걔가 무슨 물건이냐. 가진다, 만다 하게. 그리고 안 된다. 계속 여기저기 돌리면서 현장학습 시키려고 데려온 건데, 네 아래에 있으면 고기만 만지다 끝나."

"에이, 치사하게. 그럼 하루만이라도 제 조수로 쓰면 안 돼요?"

"……그건 내 생각해보마."

"아싸! 약속하신 거예요?"

뭔가 내 사고 바깥에서 나의 거취가 정해지고 있다는 싸한 느낌이 들었으나, 나는 그것에 정신을 둘 틈이 없었다. 그녀의 이름. 백하은이라는 성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깨닫고 말았으니까.

저도 모르게 흔들리기 시작한 목소리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그녀에게 닿았다.

"저기, 백하은 쿡?"

"응?"

"혹시…… 백예은이라고 아십니까?"

"어머, 우리 동생 알아? 혹시 예은이 친구야?"

아, 역시.

눈이 주는 인상이 너무 강해서 전혀 알아보질 못했다. 이 사람, 백예은의 언니구나.

성격도, 외모도 닮은 듯 아닌 듯 대비되는 두 자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정각을 알리는 벨소리.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마법에 걸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인 듯했다. 뭐, 12시 종이 아니니 무효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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