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옛것을 지키고 새로운 것을 죽인다.-1-
"왜 말이 없어? 물어보면 대답을 하렴."
"아, 저기 그게……."
한판 제대로 뛰어보려고 마음을 다잡던 중 갑자기 발생한 사태 때문인지, 당황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제 못 봤던 얼굴인데.'
선배가 앞서 한 말도 그렇고. 혹시 저 사람이 어제 김지성 쿡이 언급했던 그 사람인가? 관상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확실히 성질머리가 죽여주게 생기긴 했다. 특히 저 눈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나를 대신하여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선배에게 향하자, 천하의 선배도 저 시선에는 당해내지 못하는 것인지 살짝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효민아. 네가 있었음 애들 관리 잘 해야지. 왜 신입이 그 섹션에 들어가 있어?"
"그게요, 언니.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당황스런 기색을 가까스로 억누른 선배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서서 요리에 손을 대고 있는지 등등. 그 설명을 끝까지 들은 이름 모를 쿡은 이제 좀 이해가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아. 네가 걔였구나? 효민이가 학교에서 데려오기로 했다는? 어제 왔니?"
"예."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바쁜데 괜히 방해했구나. 혹시 화내는 것처럼 보였으면 미안해. 내가 생긴 게 원래 이래서……."
"아닙니다. 저도 종종 오해를 사거든요."
"너도? 글쎄, 그런 인상으로는 안 보이는데."
내 얼굴을 위아래로 쓱 살피더니 헛웃음을 지어 보이는 쿡. 아무래도 보기보다 굉장히 침착하고 여유가 있는 성격인 듯 보였다.
"그나저나 주방장님이 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난 애를 요리 섹션에 세우는 건 또 처음이네. 제법 한 솜씨 하나 봐?"
"아하하,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고요. 학교에서 온 김에 배워가라고 배려해 주신 거겠죠."
"흐음. 그러실 분은 아니신데…… 아, 미안. 일하는 데 계속 방해했구나. 이만 가볼 테니까 마저 할 거 하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며 어디론가 향하는 그 쿡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처음 본 사람인데 이상하게 기시감이 드는 것이, 데쟈뷰라도 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옆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선배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다행히 별일 없었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래 보이진 않던데."
"네가 저 언니 일할 때 옆에 없어봐서…… 아니, 너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예?"
"아니야. 일 시작하자. 더 늦으면 시간 못 맞춰."
"아, 옙."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등을 돌려 조리대 앞에 서는 선배를 따라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던 중,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이름은 뭐지.'
자신에게 비쳤던 그림자의 잔상을 쫓으려 애쓰는 망막의 몸부림을 도리질로 털어낸 뒤, 두 손을 도마 위에 있던 호박 위로 얹는다. 해프닝은 해프닝이고. 지금은 일을 해야 하니까.
***
"호박죽이라……."
지금 내게 주어진 지상과제. 호박죽.
호박죽을 끓이는 방법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껍질을 벗겨 씨앗을 제거한 호박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무를 때까지 끓인 뒤, 그것을 믹서기로 갈아 찹쌀가루를 넣고 잘 섞어가며 끓이면 끝. 마무리로 꿀이나 설탕 등을 넣어 단맛을 내면 그걸로 충분히 맛있는 호박죽이 된다.
'어떤 지방에서는 부가적인 단맛은 배제하고 호박 자체가 가진 단맛에 소금을 더해 짜게 먹는 지역도 있다던가.'
뭐, 그건 둘째 치고.
솔직히 말해 시간만 있으면 누구든 적당히 맛있게 끓일 수 있는 게 호박죽이다. 애당초 만들기 힘든 요리였다면 민간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을 리가 없다. 다만…….
'안가람에서 적당히 맛있는 호박죽 따위는 필요 없어.'
안가람에 어울리는 요리는 두말할 것 없는 최고의 요리. 그리고 이 안가람을 찾아오는 고객과 내게 이 일을 맡긴 주방장님이 원하는 것 또한 최고의 요리다. 어중간한 일품은 내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똑똑히 명심해두어야 했다.
"자, 이걸 어쩐다…… "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최고의 호박죽. 말은 쉽지만 조금 고민한다고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을만한 요리를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다면 세상에 요리사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레시피에서 무언가의 어레인지가 필요하지만, 공교롭게도 한식은 내가 익힌 요리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취약한 분야였기에 고민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씁, 어쩔 수 없지."
더 고민해 봤자 시간만 아깝다. 그렇다면…….
'좋아. 일단 한 번 해볼까.'
머릿속에서 호박죽을 이루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다. 아니, 부서지는 게 아니다. 분해 되고 있는 것이다.
호박, 물, 찹쌀가루, 꿀.
호박죽이라는 음식의 설계도에서 떨어져나온 가장 중요한 부품들. 이 부품들 사이에 상상력이라는 아교를 발라, 상상을 현실로 이끌어낸다.
'…… 그거다.'
번뜩였다. 마치 암운을 헤치고 내리 꽂힌 한 줄기 벼락이 정수리를 강타하는 것 같은 이 감각. 이것을 영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제까지 쌓아온 노력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이 번뜩임을 표현할 단어가 헷갈리긴 했지만, 결국 결론은 한 가지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것.
'파격적이라는 말이 농담으로 끝나지 않겠는데.'
전통 한식을 표방하는 안가람의 애피타이저에 양식을 섞는다? 자칫 잘못하면 주방장님한테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겠지만, 주관마저 짓뭉갤 맛이 담긴 요리라면 어떨까.
"곧 죽어도 고지."
뜻이 정해졌다면 몸은 따를 뿐. 갈 곳을 정한 나의 발걸음이 주방의 냉장고로 향한다. 필요한 재료는 이미 구상이 끝났다. 양식에나 쓰일법한 재료지만, 이 사이즈의 주방에 내가 생각한 재료가 없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되는 일.
"역시. 있을 줄 알았어."
냉장고 속을 재빠르게 훑던 내 두 눈이 목표하던 재료를 발견했다.
우유와 생크림.
호박죽에 쓰자니 생뚱맞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게 내가 만들 퓨전 호박죽의 핵심 재료가 될 것이다.
"자, 조리 시작이다."
***
'잘 할 수 있을까?'
찬혁이 막 조리를 시작할 무렵, 안효민은 찬혁이 과연 그에게 주어진 과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동생이야 물론 잘 할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요리실력, 리더십, 현장업무. 무엇하나 자기보다 못하는 게 없는 찬혁이다. 본인은 자기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고 매번 겸손을 떨지만, 안효민은 알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찬혁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게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껏 요리를 공부해오며 기른 안목과 그녀 특유의 직감은 찬혁의 실체를 나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가족에게 억지를 써가며 찬혁을 안가람으로 끌고 온 이유 또한 그런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어떻게 봐도 미래에 대성할 요리사와 하나라도 연을 만들어 두면, 그게 곧 안가람이 올라간 반석을 단단하게 다져줄 또 하나의 손이 될 테니까. 물론, 개인적인 호감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혹시라도 이걸 계기로 졸업 후에 안가람에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블랙 스카프는 따 놓은 당상이고.
실력과 인격. 류찬혁이라는 후배가 그 두 부분에 있어 견줄만한 이가 없다는 것은 분명 확실하다. 다만, 그에게 부족한 부분. 찬혁이 그녀와 함께 대회반 활동을 할 때마다 자기 입으로 누누이 말했던 한식에 대한 부족함이 지금 그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저 수준을 보고 부족하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 같았음 코웃음을 쳤겠지.'
하지만 이곳은 안가람이다. 국내 최고最古의 전통을 자랑하는 전통 한식당. 고작 한 가지 메뉴라고는 해도 지금 찬혁이 그 부담을 온전히 소화해낼 수 있을지. 효민은 좀처럼 불안감을 버리지 못했다.
찬혁의 솜씨에 대한 불신은 아니다. 그러나 업장에는 저마다 조화가 되는 맛이라는 것이 있다. 요리를 잘하는 것과 요리를 다른 요리와 조화시키는 건 다른 영역의 문제. 이건 시험으로 치자면 함정이 있는 주관식 문제였다.
'안가람의 호박죽은 비율에 맞게 조합한 여러 종류의 곡물가루를 넣고 끓여서 과한 단맛을 빼고 담백함과 깊은 고소함, 그리고 약간의 짠맛으로 다음에 먹을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는 메뉴야.'
물론 이때 들어가는 곡물가루 믹스의 조합비는 극비 중의 극비. 레시피 없이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오랜 연구의 결과물이다.
그녀도, 그녀의 아버지도 찬혁이 만드는 호박죽에 그 정도의 완성도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과연 찬혁의 그 함정을 피할 수 있을지 어떨지, 효민은 걱정이 깃든 눈으로 조리에 열중하고 있는 찬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턱.
"저 녀석 걱정은 나중에 하고, 네 할 일이나 해라."
"아빠?"
그때 어깨에서 갑작스레 느껴지는 누군가의 손길. 깜짝 놀란 효민이 재빨리 고개를 돌린 곳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안상필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빠가 아니라 주방장님."
"또 그러신다."
안상필은 뾰로통한 눈빛으로 자신을 흘겨보는 딸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이만 일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요리사가 주방에 섰다면 그때부터 요리 이외의 일에 눈을 돌려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효민이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받아온 가르침 중 하나였다.
"언제 오셨어요? 설마 찬혁이 보러 오신 거예요?"
"실력도 제대로 모르는 신입한테 요리를 맡기고 확인도 안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여튼……."
그의 얼굴에 작게나마 기대감이 서린 것을 알아챈 안효민이 말꼬리를 흐렸다. 솔직하지 못한 건 알아줘야 한다.
딸의 그런 시선을 받기가 민망했는지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다시금 그녀를 재촉하는 안상필.
"얼른."
"알겠어요."
몸을 돌려 조리대 위의 재료로 시선을 향하는 딸에게서 손을 뗀 그는 팔짱을 낀 채 주방 가운데에 서서 찬혁을 바라봤다.
"……."
"흠."
자신의 등장에 눈알을 굴리며 이쪽을 힐끔거리는 다른 쿡들과는 달리, 어찌나 집중을 했는지 그가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찬혁. 살짝 째려보는 것으로 다른 이들의 시선을 물린 안상필은 남들이 알기도 힘들만큼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에 임하는 태도는 마음에 드는군.'
찬혁에게 있어선 억울할 일이었으나, 안상필은 찬혁의 이름이 안효민의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한 방학 일주일 전의 그날부터 인상이 매우 안 좋은 축으로 치우쳐 있었고, 그것은 첫 출근을 한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한 번 흠을 잡기 시작하면 흠만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 있지만, 안상필의 경우에는 질투심에 기반을 둔 분노가 그 노력의 원동력이 된 셈이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으려 들겠으나, 사실이 그랬다.
하지만 출근한 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 차에 이르렀을 때, 찬혁을 바라보는 안상필의 시선에는 저도 모르게 미약한 호감이 깃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요리사의 슬하에서 태어나, 생애를 요리 공부로 빽빽하게 채워온 뼛속까지 천생 요리인인 안상필이기에, 마찬가지로 삶을 되풀이하면서까지 이 길에 들어서기로 마음먹은 찬혁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고작 이틀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안상필은 조금씩 엿보이는 찬혁의 본성에 흐뭇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저 어린 나이에…….'
과연, 효민에 이어 그의 아버지인 안영길까지 찬혁의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며 고개를 주억이던 그때, 안상필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잡혔다.
"음?"
마치 무언가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 마냥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주무른 그가 재차 시선을 향했으나, 변함없는 현실만이 그런 그의 경악 가득한 시선을 맞이해 줄 뿐이었다.
굉장히 필요치 않은 마중이었다.
안상필의 표정에, 잠시 잊고 있었던 분노가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
"후, 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한솥 가득 담긴 호박죽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만드는 과정이 복잡한 탓에 생각보다 살짝 시간이 들기는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잘 완성된 호박죽의 모습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보자, 농도도 괜찮고.'
호박죽이 가득 담긴 국자를 조금씩 기울이며 농도를 체크. 물보다는 느리면서 아주 끈적거리지는 않는 유속. 입에 넣었을 때 입천장이나 이, 혓바닥 등에 들러붙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남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농도였다.
'그럼 슬슬 선배한테 보고를…….'
"호박죽 준비는 끝났나 보구나."
"아, 주방장님."
선배에게 끝났다고 보고를 드리려던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등장하신 주방장님의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본래는 바로 위 상급자에게 보고 후 검사를 맡는 게 알맞은 절차이겠으나, 최상급자가 직접 행차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반가운 마음을 담아 주방장님을 맞이하려던 나였으나, 그 마음은 주방장님의 얼굴을 본 순간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마침 잘 오셨어요. 지금 막 완성…… 주방장님?"
"오냐. 어디 한 그릇 줘 보거라. 맛도 안 보고 손님상에 내갈 순 없으니까."
나를 향한 주방장님의 시선에서, 아니.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호박죽, 그리고 그 옆 조리대를 향해 있던 그 시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뜻 모를 분노가 내 손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 태도에 당혹감과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나는, 이내 주방장님이 대체 무엇에 그리 화가 난 것인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아차.'
호박죽을 만들기 위해 꺼내 놓았던 우유와 생크림. 그것에 못 박힌 듯 꽂혀 움직이지 않는 그의 두 눈이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더 기다리게 만들 셈이냐?"
저게 문제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도 미처 치우는 것을 깜빡한 내 실수를 지탄하며, 나는 연달아 나를 재촉하는 주방장님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래도 그리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서 다행이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는 다시금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을 꼽자면. 이 요리를 먹은 순간, 재료에 대한 관심 따위는 순식간에 꺼질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고작 별난 재료를 썼다고 분노를 사기엔, 내 요리가 너무 잘 됐거든.'
내가 만든 요리에 대한 더없는 확신을 담아, 나는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장님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