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미트 더 호크아이.-3-
"어우, 죽겠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 뭘. 네 덕에 오늘은 되게 편했다. 수고했어."
마치 거친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것 같은 몰골의 주방에서 거의 주저앉듯 조리대에 허리를 걸친 김지성 쿡이 어깨를 주물렀다.
방금 나간 후식으로 낮 시간 주방 업무는 끝났다. 말하자면 전반전이 마무리된 셈이다. 안상필 주방장님은 지치지도 않은 얼굴로 90분간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을 떠났다.
'뭐, 쉬러 가신 거겠지.'
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최고기온이 30도 중반대를 찍는 이 날씨에 쉬지 않고 불구덩이 앞에서 일하면 순식간에 나가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누구에게든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그럼 우리도 밥이나 먹으러……."
"아, 동생! 밥 먹으러 가자!"
전조도 없이 나타난 효민 선배의 등장에 김지성 쿡은 조리모를 벗으며 땀을 닦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잘려나간 자신의 말꼬리를 되새김질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잰걸음으로 지척까지 다가온 선배가 내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이유는 모르겠으나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되게 웃으시네."
"원래 타고난 웃는 상이거든, 내가."
"그러십니까."
딱 봐도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이긴 한데, 당장 말하고 싶지는 않아 보이니 더 캐묻지는 않았다. 상태를 보니 조만간 알아서 말할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방글방글 웃음꽃이 핀 얼굴로 김지성 쿡에게 고개를 돌린 선배가 그에게 물었다.
"오빠도 같이 식사하러 가실래요?"
"아, 아니. 아니야. 생각해보니 들를 곳이 있어서 먼저 어디 좀 다녀온 다음 알아서 먹고 올게."
"그러시구나. 다녀오세요."
"어, 어어. 너희도 맛있게 먹고. 푹 쉬다 와."
식은땀까지 흘리며 동참을 꺼리는 태도를 의아하게 여기기도 잠시. 김지성 쿡은 휙 등을 돌려 달아나듯 이 자리를 피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배가 아쉽다는 듯 말꼬리를 늘린다.
"이상하게 여기 언니들은 몰라도 오빠들은 맨날 저러더라. 왜 저럴까?"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모르긴 몰라도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눈에 제 몸을 훤히 드러내고 싶어 하는 초식동물은 없다는 것 하나는 알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좀 위태롭지 않나 이거."
아침에 마주했던 대가의 시선을 되새기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고작해야 일주일 있을 건데 별일이야 생기려고.
아직까지 어깨 위에 올라와 있던 선배의 손을 조심히 잡아 치우며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어느새 옷까지 갈아입은 안창민이 주방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누나. 밥 먹으러 가자며. 안 가?"
"아, 금방 갈께! 우리도 얼른 가자. 쉬는 시간 다 끝나겠다."
"네. 그럼 옷 먼저 좀 갈아입고 올게요."
"응! 이따 정문에서 봐!"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선배를 배웅한 뒤 나는 창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어제부터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야, 창민아."
"응?"
"네 아버님이 혹시 지금 날 어떻게 보고 계실까?"
"어……."
잠시 말을 고르던 녀석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 질문에 대꾸했다.
"죽일 놈?"
역시.
나는 무언가에 씌어 있다. 아마 평생 관심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관심종자가 분명한 무언가가.
***
그날 저녁.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과를 무사히 마친 우리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아아, 힘들다! 일도 오랜만에 하니까 지치네."
"선배, 옷 더러워집니다. 들어가서 씻고 오시죠."
"찬혁이 너 가끔 말하는 게 어르신 같다는 말 안 듣니?"
"……별로 안 듣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 침대도 아니고 거실 바닥을 뒹굴며 온몸으로 청소를 할 기세인 선배가 애쓰는 소리와 함께 다시 일어났다. 생각해보면 양희연이나 백예은이 종종 나보고 애늙은이 같다고 하긴 했더랬지. 터무니없는 모함이다.
"나 그럼 씻고 있을 테니까, 마음대로 들어오면…… 알지?"
"어우, 안 그래요. 얼른 가서 씻기나 하세요."
"치. 유머감각이 없다니까."
반쯤 열린 문 뒤에 숨어 요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선배가 거칠게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옆에 서 있던 안창민이 끔찍하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아, 쏠리네 진짜. 왜 저러지?"
"……."
묘하게 주아가 생각나는 반응에 흠칫하기도 잠시. 세상 남매가 보통 이런가 싶은 생각에 빠져들 때쯤 갈아입은 옷가지 등을 세탁기가 자리한 베란다 쪽으로 휙 던져놓은 안창민이 내게 말했다.
"미안한데 먼저 씻을게. 나 오늘 저녁당번이잖아."
"어. 뭐라도 미리 준비해놓을까? 어차피 씻을 동안 기다려야 되잖아."
"그럼 밥이나 좀 안쳐주라."
"오케이."
그렇게 등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간 창민이 녀석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런 생활이 생각보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숙사와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무언가 다른 이 느낌. 사람 사는 집이라는 느낌이 든다.
'혼자 살았던 기간이 십 년 조금 안 되니까…….'
홀로 사는 사람의 집은 굉장히 싸늘하다. 기온이나 실내 온도 같은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냉담하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뿐.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보이는 언제나 똑같은 실내. 그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그곳을 바라볼 때면 가끔 괴물의 아가리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꼭 괴물한테 먹힌 것처럼 아무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기에.
너무 오랜 시간 한 가지 자극을 받으면 그것에 무감각해지듯,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무감각해질 수 있다. 나는 그게 아무렇지 않으면서도 무서웠다.
'그러면서 그 꼴이 났는데도 집에는 결국 못 기어들어 갔으니.'
멍청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옛날 생각을 하며 멍하니 씻은 쌀을 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꾹 눌렀다. 혼자서 먹기에는 과하게 많은 쌀. 그 무게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이 묘하게 간질간질했다.
─달칵.
"나 왔다."
잠시 씁쓸한 웃음을 짓고 돌아가기 시작하는 밥솥을 보고 있을 때, 안창민이 방문을 열며 거실로 나왔다. 아직 살짝 젖은 머리와 목에 매달린 수건. 드라이기는 안 쓰는 모양이다.
"너도 가서 씻고 와. 밥해놓을 테니까."
옛날 생각도 거기까지. 우울한 생각을 털어낸 나는 창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불 앞에서 일하느라 땀이 말라붙어 피부 위에 일어난 소금기 탓에 찝찝하던 참이었다.
…….
잠시 후.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니 온 집안에 감도는 구수한 냄새가 자연스레 코 주변을 맴돌았다. 갓 지어진 밥 냄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 냄새, 기름에 튀겨진 생선의 살짝 비릿한 바다내음. 사람 사는 냄새다.
절로 흥과 위장이 끓어오르게 만드는 그 향을 만끽하며 부엌으로 시선을 돌리자, 부엌에 서서 저녁을 만드는 데에 열중하는 창민이 녀석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삼촌. 오늘 반찬 뭐예요?"
"뭐야, 왔냐? 헛소리하지 말고 이거나 날라."
거 참. 농담이 안 통하는 녀석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집에서 국자 쥔 사람 말에는 거역하지 말라는 옛말도 있으니 얌전히 그 말에 따라 하나둘 완성되어가는 음식들을 탁자로 옮길 때쯤 선배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씻고 나오는 것 같은데, 타이밍도 참 좋다.
스팸구이와 볶음김치, 삼치구이 등이 담긴 접시를 들고 어서 오라며 선배를 부르려던 나는, 고개를 돌려 선배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접시를 손에서 놓칠 뻔했다.
"아, 밥 다 됐어?"
"아니, 선배?"
"응?"
하얀 바탕에 꽃무늬가 여기저기 박힌 민소매 티와 돌핀팬츠. 어깨와 다리가 훤히 드러나도 너무 드러나는 의상에 깜짝 놀란 내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선배가 반응했다.
"옷차림이 왜 그러십니까."
"왜? 이상해? 나 집에서는 맨날 이렇게 다니는데."
"……하아."
세상에. 안상필 대가가 보이던 초점이 엇나간 분노가 굉장히 이해됐다.
"일단 위에 뭐라도 걸치고 오시죠."
"왜. 나 덥단 말이야."
"에어컨 더 세게 틀어놓을 테니까 빨리요. 옷 안 갈아입고 오시면 밥 못 드십니다."
"치사하게 밥 갖고 그래."
하는 수 없다는 듯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선배를 보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여기 온 뒤부터 자주 이러는 것 같지만, 다시 한번 내 말을 정정해야겠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다.
***
화요일. 어김없이 어제와 같은 9시에 출근한 우리.
조리복에 조리모, 마무리로 스카프까지 빈틈없이 챙겨 입은 나는 앞서 주방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선배에게 다가섰다.
"저 왔습니다."
"그래. 오늘은 어제 말한 대로 재료준비 대신 메뉴 만들 건데, 자신 있지?"
"없겠습니까."
"좋아. 그 자신감이야. 그럼 시작해 볼까?"
어제저녁. 식사 자리에서 선배는 내게 '아빠가 내일부터 재료준비 말고 음식 섹션 맡으래.'라는 말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말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대충 그럴 것 같기도 했고.
선배는 왜 그렇게 안 놀라느냐며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뭘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 전에 그것보다 더 놀랄 일이 있기도 했으니까.'
자기가 그렇게 티를 냈냐며 선배는 침울한 기색이었지만, 솔직히 그때는 그 장단에 맞춰줄 여력이 없었다.
아무튼, 오늘 내가 맡게 된 요리 섹션은 다름 아닌 죽을 만드는 것이었다.
안가람에서는 총 세 가지 종류의 죽이 나간다. 호박죽, 팥죽, 타락죽. 이 세 종류 중 고객이 선택한 죽을 애피타이저로 서빙 하는 형식이다.
"타락죽은 보존 때문에 미리 만들어두지 못하지만 다른 두 개는 아니니까."
"그래서 대량으로 만들어두는 거군요."
전날부터 물에 불려놓은 팥을 커다란 냄비에서 끓이는 선배 옆에서 늙은 호박의 껍질을 벗기고 씨를 제거하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라는 것이 원체 오랜 시간을 푹 끓여야 제 맛이 나오는 물건인데, 그걸 또 대량으로 끓이니 시간이 조금 들겠는가.
출근하자마자 부랴부랴 죽부터 준비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근데 이거 레시피는 어떻게 됩니까?"
"아, 안 알려줬었나?"
"안 알려주셨죠."
"난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지."
"……."
이건 또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다.
초고급 레스토랑을 표방하는 업장이라면 어떤 사소한 것이든 그 업장만의 레시피가 있다. 심지어 이런 곳은 손님에게 내가는 물조차 평범한 걸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여기 호박죽 레시피를 어떻게 알아.'
기가 찬 눈으로 선배를 바라보고 있자니, 선배는 선배대로 굉장히 담담한 말투로 내 침묵에 대꾸했다.
"그럼 동생 마음대로 만들어 봐."
"……예?"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그 담담한 말투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마음대로 만들라고? 여기 레시피 없이?'
업장은 저마다 여태껏 쌓은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 어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그 이미지를 보고 비싼 돈도 마다하지 않고 이 가게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애피타이저, 즉. 손님에게 가장 먼저 나가는 접시란 손님이 가지고 있을 이미지의 지분을 상당 부분 맡고 있는 법.
그것을 잘 아는 나는 깜짝 놀라 당황하며 되물었지만, 선배는 확고부동이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다만 나를 믿고 있다는 듯 목소리에 신뢰를 담아서.
"찬혁아, 오늘 호박죽은 전부 너한테 맡길 거야. 아빠 뜻도 그래.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이해했다. 요컨대, 이것은 시험이다. 가게의 오너가 내 실력을 떠보기 위한 시험.
'언제가 됐든 한 번은 시키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 시간이 올 줄이야.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아직 보여준 거라고는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밖에 없었던 내게 이 중요한 일을 떡하니 맡기다니, 어느 의미로는 비정상적인 정신머리다.
'하지만 나도 그리 정상적인 놈은 못 된단 말이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좌우로 슬금슬금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좋네요. 해볼게요."
"그래야 우리 동생답지. 마음껏 만들어 봐."
혹시라도 망하면 책임은 내가 져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방긋 미소 짓는 선배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망하긴요. 절대 안 그럽니다."
다만, 조금 파격적일 수는 있겠지.
이제부터 어떻게 이 요리를 내 스타일로 만들어내야 할지, 그 난감함과 기대감에 절어 사장님에게 받은 칼을 굳게 쥔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거기 너."
"?"
처음에는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린 나였으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싸한 시선에 금방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맞다, 언니 오늘 출근하는 날이었지……."
옆에서 영문 모를 한탄을 흘리는 선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려 나를 부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 부르셨나요?"
"그래, 너."
나를 부른 사람은 여성이었다.
나이는 20대 초반일까. 하얀 조리복 위로 초록색 스카프를 두른 것을 보아 퍼스트 쿡이 분명했다.
갸름한 턱선, 하얀 피부, 요리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게끔 틀어 올린 다갈색 머리.
하관만 보면 살짝 가냘프면서도 기개가 느껴지는, 마치 지나가다가 몇 차례 본 것 같은 묘하게 낯익은 아름다운 미인상이었으나, 시선이 조금 위로 향하자 그 인상은 단박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와오.'
이 업장에 와서 주방장님을 처음 보고 독수리 같은 눈이라고 했던가. 아쉽지만 그 말은 취소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 비하면, 주방장님은 조족지혈에 불과했으니까.
"너, 신입이지? 그런데 왜 거기 있니?"
손을 댔다간 당장에라도 베일 것 같은 날 선 상삼백안上三白眼. 말 그대로 맹금류와도 같은 눈빛이 나를 당장에라도 뚫어버릴 듯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