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미트 더 호크아이.-1-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라도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이 상황을 따지려 들려면 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적어도 동기가 불순하지는 않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아주 없진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지금 정한 대로 지내자고요. 알겠죠?"
"으음…… 좋아! 알겠어."
길고도 지루했던 협상 끝에 나와 선배, 창민이는 이 집에서 지내며 지켜야 할 규칙 몇 가지를 정할 수 있었다.
별 건 아니었지만, 일단 꼽자면 화장실 겸 샤워실이 내부에 따로 있는 안방은 선배가, 반대쪽에 있는 다른 방 두 개는 우리가 쓰기. 서로 씻는 시간을 미리 정해두고 그때는 서로가 사용하는 공간을 피하기. 저녁식사 당번 정하기 등등.
'이렇게라도 해야 불상사가 안 생기지.'
정작 선배는 이렇게 선을 긋는 게 묘하게 마음에 안 드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쉽게도 물려줄 생각은 없으니 얌전히 지내시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 서로 방 들어가지 말기 이것도 꼭 있어야 돼? 난 언제든 놀러 와도 상관없는데."
"세상사를 너무 선배님 주관적으로 보고 계신 거 아닙니까?"
마이페이스가 강한 사람은 같이 있으면 재밌긴 하지만 그만큼 피곤하다던데, 이 사람이 딱 그렇다. 내 핀잔을 듣고도 아직 눈에서 미련이 채 빠지지 않은 선배는 쪼그라든 몸짓으로 열과 성을 다해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창민이 얘는 몰라도 제 방은 부디 막 들어오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노크 정도는 하세요."
"왜 거기서 갑자기 날 팔아. 나도 싫어."
"남매의 우의와 내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일주일만 참아다오."
자기도 그건 싫다며 입을 오리처럼 내민 안창민과 말다툼을 시작한 선배를 놔두고 나는 적당히 자리를 피했다. 한마디 듣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들어가서 스케줄이나 좀 확인해야지.'
시시콜콜한 말다툼을 이어나가는 두 남매의 목소리를 등으로 흘리며 나는 방문을 굳게 닫았다. 닫기 직전,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놀러 나가지 않겠냐는 선배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아직 일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피곤해서야, 앞으로 남은 일주일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스케줄은 나중에 확인하고 지금은 좀 잘까."
그 전에 살짝 먼지가 앉은 이불을 밖에서 좀 털어낼 생각으로 챙겨서 방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오는 선배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날 나는 원치 않게 이 근방의 오락실과 코인 노래방, 그리고 당구장의 위치까지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 넣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다음에는 이기리라. 100점도 채 못 치는 내가 이기는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다음날.
첫날이니만큼 부단히 준비를 끝마치고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더 빨리 업장에 도착한 나는 선배의 도움을 받아 주방의 구조와 조리도구의 위치 등을 배우며 업무에 대비하고 있었다.
"자, 이거 받아."
"예."
미리 알아둬야 할 사항들을 가르쳐준 선배가 주머니에서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빳빳한 스카프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안 그래도 학교에서 쓰는 조리복과는 달리 스카프로 목깃을 여며야 하는 방식의 조리복이기에 어디 있나 찾고 있던 참이었는데.
비닐 너머로 전해지는 빳빳한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그것을 꺼내자마자, 선배가 다시 스카프를 내 손에서 가져가더니 손수 내 목에 둘러주기 시작했다.
"제가 직접 할 수 있는데요."
"에헤이. 이런 건 다 선배가 해주는 거란다. 가만히 있어."
"여기가 학교도 아니잖아요."
"주방에서도 내가 선배야. 아니면 그냥 동기 할까? 누나라고 부를래?"
"……얼른 매주시죠."
"이건 이것대로 열 받네."
한 번 당해보라는 듯 살짝 힘을 주어 스카프 매듭을 마무리 짓는 선배. 목을 조이는 스카프 사이로 손가락을 걸어 살짝 느슨하게 해준 뒤 매무새를 다듬고 있자니 선배가 자신의 붉은색 스카프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서는 스카프 색으로 상급자랑 하급자를 구분해.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하얀색, 검은색, 초록색, 빨간색, 마지막으로 파란색."
"그렇군요."
모르는 척 대꾸했지만 사실 이미 다 알고 있다. 스카프 색으로 지위 구분하는 건 대부분의 업장에서 하고 있는 방식이고, 실제로 내가 일했던 호텔도 그랬으니까.
"빨간색은 대충 1년차는 넘은 쿡들이고, 그 위는 꽤 다양해. 우리 아빠가 직접 실력을 보고 뽑아서 올리는 거라서."
그럼 대충 빨간색을 달면 세컨드 쿡 정도로 보면 되는 걸까. 초록색이 퍼스트, 검은색이 수 셰프라면, 하얀색이 주방장이겠지. 그나저나 저 안효민을 세컨드 쿡으로 쓰는 주방이라니, 인적 자원 한 번 장난 아니게 호화롭다.
대충 관계도를 파악한 내가 살짝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선배도 주방 안내는 이쯤이면 됐을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아침에 할 일부터 알려줄게. 어디 보자……."
"아침에 배달 온 재료가 주문이랑 맞는지 확인한 다음 상태 선별부터 하면 되죠? 그다음에는 상태 이상한 거 있으면 선임한테 보고한 다음 밑 준비 시작하고요."
"어? 응. 맞아. 되게 잘 아네?"
"이래저래 공부 좀 했죠."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한 공부긴 하지만.'
막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술술 읊는 나를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선배를 나 또한 웃으며 마주 봤다. 막내 생활만 몇 년을 했는데, 설마 내가 그걸 잊어먹을까.
"역시 우리 동생. 그만큼 알고 있으면 일하는 건 별문제 없겠네. 준비성이 좋아."
대단치도 않은 일인데 사람 얼굴에 금칠을 해주니 괜히 쑥스러워 말 돌릴 거리를 찾다가, 이내 안창민의 모습이 도통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창민이 얘는 어디 가서 안 보이지?"
"여기 있다."
이 남매는 무슨 쌍으로 호랑이 기운을 품고 있는 건가. 제 말만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모습이 아주 똑 닮았다.
바깥으로 이어진 주방 뒷문을 열고 등장한 안창민의 팔에는 웬 상자가 품 안 가득 들려 있었다.
"이야기 끝났으면 좀 나와서 도와줘."
"어. 바로 갈게."
아차. 왠지 안 보인다 싶더라니, 설마 혼자서 재료 확인 중이었나. 미안한 마음에 재료를 냉장고 앞에 내려두고 나가는 창민의 뒤를 쫓았다.
"미안하다. 혼자 하고 있을지 몰랐어."
"됐어. 미안해야 하는 건 누나지. 이런 건 맨날 나만 시키더라."
예전부터 있던 일이라며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지은 녀석의 투정을 들으며 내용물을 확인하느라 바깥에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재료가 들어 있는 박스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옮기다 보니 어느새 대부분의 재료를 냉장실로 옮겨놓은 뒤였다.
"재료는 매일 들어오는 거야?"
"매일 들어오는 거랑 아닌 게 있지. 야채 같은 건 일주일에 대량으로 두 번 들어오고, 육류랑 해산물은 매일 새벽마다 따로 받는 곳이 있어. 그건 아빠가 직접 확인해."
"그래서 그게 안 보였구나."
그건 또 내가 일하던 호텔과 미묘하게 다르다.
재료를 가득 채워 넣고도 사람 서너 명은 가뿐히 들어가는 넉넉한 크기의 냉장창고에서 재료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고 있으니 짐을 옮기느라 달아오른 몸이 순식간에 식어 기분이 나아졌다. 더 있다간 8월 한여름 날씨에 추위를 탈 지경이다.
'이런 게 말단의 작은 낙이지.'
주방의 쿡들 중에서도 육체적으로는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에 이런 자그마한 낙이라도 없으면 정말로 버티기가 힘들다. 이걸 낙이라고 표현하는 것부터 살짝 암울하지만, 현실이 이런 것을 어쩌겠는가.
"어우, 슬슬 춥다. 체크도 끝냈으니까 얼른 가져갈 거 챙겨서 들어가자."
"오케이."
자기 팔뚝을 문지르며 말하는 안창민의 재촉에 나도 챙겨놓은 재료들을 들고 일어섰다. 냉장창고를 나선 나와 안창민이 동시에 작게 한숨을 흘렸다. 이제까지 한 일도 제법 수고가 들었지만, 진짜 고생은 지금부터 시작되리라는 것을 나도, 안창민도 잘 알고 있었다.
***
"선배. 감자랑 당근, 파. 전부 시키신 대로 처리했어요!"
"알겠어. 사용한 도구는 잘 닦아놨지?"
"당연하죠."
"좋아, 동생. 바로 다음 일 시작하자. 마늘 가져온 거 반만 갈아서 바트에 넣어두고 채소육수 상태 확인 부탁해."
"옙!"
예상했던 대로, 주방은 아직 오픈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요리의 기본은 준비에서 나오고, 얼마나 공들여 준비를 했느냐에 따라 완성품의 퀄리티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완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안가람은 저번에 경험했던 호텔 상천만큼 준비할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인원수가 적어 그에 뒤지지 않는 업무 강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때보다 절대적인 양은 적지만…….'
반대로 그 적은 양에 신경을 집중해서 작업을 해야 하다 보니 조금 더 굼뜬 감이 있다.
안가람의 메뉴는 크게 코스와 12첩 한상차림으로 나뉜다. 점심을 비롯한 주간에는 음식이 단번에 많이 나가는 한상차림을 주문하는 고객이 대부분이기에 그만큼 준비할 재료도 많았다.
그걸 세 명이서, 아니. 선배는 후식으로 나갈 식혜와 요리에 사용할 소스 등을 만들고 있으니 실질적으로 나와 안창민 둘이서만 하기에는 과분한 업무량이었으나, 다행히 우리의 뒤를 이어 출근한 파란색 스카프를 두른 쿡들의 가세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밑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수고 많았다."
잠시 후. 재료 준비를 일단락 짓고 더러워진 주방 청소까지 끝냈음에도 시간이 살짝 남자, 선배는 우리와 앞서 일하던 쿡들을 서로 소개해 주었다.
나이는 대부분 20대 중후반 정도. 김지성 쿡, 이두진 쿡, 하기택 쿡.
이 세 사람은 아직 들어온 지 1년이 되지 않은 신입이었지만, 각각 쌓은 경력만 본다면 어지간한 주방에서는 이미 중요한 자리 하나쯤은 잡고도 남았을 사람들이었다.
"내가 다닐 때 방학 숙제하러 여기 온 애들은 한 명도 없었는데,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구나. 아침 준비 이렇게 빨리 끝난 건 처음이야."
"선배님들이 많이 고생해 주신 덕이죠."
"말도 잘 하고. 야, 넌 크게 자라겠다. 나 잊으면 안 된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중에서도 군대를 전역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김지성 쿡은 우리처럼 성심고 출신인 사람이었고, 원체 가진 활기찬 기운에 힘입어 다른 두 쿡들 보다는 조금 더 빨리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것을 본 효민 선배는 내 멘토로 김지성 쿡을 붙여주는 것이 업장에 익숙해지는 데에 더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듯 나를 김지성 쿡의 보조로 넣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제법 정확한 것이었다.
"담임이 박예휘 쌤이라고?"
"예."
"1학년이라 다행이네. 나는 하필 3학년 때 담임으로 만났었는데."
"고생 많으셨겠네요."
"말도 마. 전교생 중에 한 90% 정도는 그 사람이 울렸을걸? 너도 얼마 안 남았다."
"아하하…… 조심하겠습니다."
재료 확인과 밑 준비를 제외한다면, 주방에서 막내가 하는 일은 단순하다.
첫째도 청소. 둘째도 청소. 셋째도 청소.
그 무엇보다 위생이 중요한 요식업 주방은 언제 어느 때든 최대한 청결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그만큼 인력이 갈려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나를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는 김지성 쿡의 도움과 나 자신이 갖고 있던 경험에 힘입어 나는 제법 빠르게 안가람에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말이 좀 많은 건 살짝 거북하지만…….'
겉치레라 하더라도 이렇게 후배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는 선임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법이다.
"안 그래도 내 바로 아래 있던 녀석이 얼마 전에 군대를 가서 다시 막내가 됐거든. 임시로 들어왔던 거긴 해도 일을 싹싹하게 잘 해서 조만간 정식으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빠지니까 매가리가 탁 풀리지 뭐냐. 근데 딱 타이밍 좋게 네가 와준 덕에 적어도 일주일은 막둘 노릇을 할 수 있게 됐어."
"아."
이 친절한 태도는 그것 때문이었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헛웃음을 간신히 삼키고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김지성 쿡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도 첫날부터 그 사람 안 만난 건 다행이네."
"그 사람이요?"
"있어. 생긴 건 예쁜데 되게 예민한 사람 한 명."
생각하기도 싫다며 몸서리를 치는 김지성 쿡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는 걸 보니 여자 쿡인가?'
그 말에 담긴 뜻에 호기심을 갖기도 잠시. 조리대 아래 선반을 마지막으로 배정받은 구역의 청소가 마무리될 쯤. 앞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힘찬 인사 소리에 우리 두 사람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아, 주방장님 출근하셨나 보다. 마침 잘됐네. 다 끝났으니까 우리도 얼른 가서 인사드리자."
"예."
김지성 쿡의 말에 따라 청소도구를 부랴부랴 챙겨 들고 서둘러 발을 옮겨 선반 가득한 조리도구로 가려진 뒷주방을 벗어나자, 그 사람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방장님!"
"그래. 좋은 아침이다, 지성아."
짙은 눈썹과 곧은 이목구비. 독수리 같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이 사람이 바로 안가람의 주방장이자 효민 선배와 창민이의 아버지인, 안상필 대가였다.
김지성 쿡의 인사를 반갑게 받으며 고개를 돌린 그와 나의 눈이 똑바로 마주친 그 순간,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성심고에서 온 류찬혁이라고 합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분명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
그 상황에 의아함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들어 안상필 대가의 얼굴을 살핀 나는, 더욱더 깊은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가 류찬혁이구나."
내 착각이 아니라면. 이 사람, 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