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72화 (72/403)

72. 서머 백케이션 워킹.-3-

─드륵, 드륵.

여느 때보다 이르게 떠오른 아침햇살이 땅에 깔린 그림자를 단숨에 걷어내는 이른 아침. 하늘 중앙에 자리하는 천구天球가 마치 전구가 어두운 방을 밝히는 모양새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걷고 있었다.

한 손에는 캐리어.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

보도블록 위를 구르는 캐리어 바퀴의 소음이 내 보폭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울린다.

선배에게 열쇠를 받은 날. 열쇠와 함께 받은 쪽지에 적혀 있던 주소가 입력된 지도 앱은 밝은 선으로 도착지가 머지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나마 대중교통 형편이 좋은 거 하나는 다행이네."

들어 있는 거라곤 일주일 동안 갈아입을 옷가지와 일용품, 세면도구와 조리복, 조리도구가 전부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날씨에 캐리어 따위를 끌고 오래 걸을 필요가 없다는 건 충분히 기쁜 일이었다. 출근할 때도 편할 테고.

골목에 들어서 몇 차례 갈림길을 따라 도니, 어느새 지도 앱 화면 중앙에 자리한 화살표가 목적지에 꽂힌 깃발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여긴가?"

그제야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자, 핸드폰에 입력된 주소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도로명과 같은 주소가 적힌 주소판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칠이 된 굳게 잠긴 대문. 손잡이 옆에 있던 열쇠 구멍에 선배에게 받은 열쇠를 꽂으니 딱 들어맞았다.

'어떻게 잘 찾아왔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일까. 소리 하나 없이 미끄러지듯 열린 대문 뒤, 높은 벽돌 담장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만발한 꽃은 없지만, 딱 보기 좋은 수준으로 자란 잔디와 몇 그루의 나무가 뿌리를 내린 아담한 정원. 다양한 크기의 석판으로 퍼즐을 맞춘 듯 가지런하게 닦인 돌길을 눈으로 좆으니,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하얀 페인트가 꼼꼼히 칠해진 고즈넉한 분위기의 1층 집이 방문객을 반긴다.

이런 시내에서 흙길을 밟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직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습기를 머금은 길을 건너 문 앞에 다다른 난 조심스런 동작으로 노크하며 입을 열었다.

─똑똑

"안녕하세요. 혹시 안에 계신가요?"

…….

대답은 없다. 음, 그럴 줄 알고 있긴 했지만.

선배가 주소와 함께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현관문을 단단히 지키고 있던 도어락이 귀에 익은 전자음을 내며 내게 걸음을 양보한다.

깜깜한 실내. 역시 내 생각대로 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듯 조용하기만 하다.

'뭐, 당연하지.'

사람이 안 사는 집에 누군가 있으면 그게 더 놀랄 일이니까.

"안은 생각보다 깨끗하네."

사람이 살지 않는 것 치고는 먼지도 별로 쌓이지 않았다. 딱히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신발을 벗고 캐리어를 신발장 한쪽으로 밀어놓은 나는 거실에 있던 책상에 앉아 그대로 핸드폰을 들어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소리가 채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 선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내가 연락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여보세요.

"접니다. 지금 막 도착했어요."

─어머, 정말? 되게 일찍 왔네? 알았어. 나도 준비 다 하고 있었으니까 바로 갈게.

"예. 천천히 오세요."

안 그래도 수다스러운 선배가 더 말을 꺼내기 전에 깔끔하게 전화를 끊어 버린 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미련 없이 세상에 놓아주었다.

"하아……."

앞으로 일주일을 여기서 혼자 살아야 된단 말이지.

회귀 전이고 지금이고 묘하게 타향살이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단 생각에 영문 모를 회의감이 들었다.

***

"동생아, 나 왔어!"

"아, 오셨습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등장한 선배를 보며 나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아, 선배. 잠깐만요. 아직 들어오시면 안 돼요."

"응?"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선배를 말리며 나는 바닥을 가리켰다. 지금 막 걸레질을 끝낸 탓에 살짝 물기가 남아 반짝거리는 바닥을 본 선배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혹시 집 많이 더러웠어? 청소업체에서 다녀간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는데."

"아, 왠지 깨끗하더라니. 더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일주일 동안 쓸 집인데, 구조도 한 번 파악할 겸 간단하게 닦기만 했어요."

한여름인 것 치고는 습도가 비교적 낮은 덕분일까, 열어둔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 덕분에 순식간에 마른 바닥을 시험 삼아 툭툭 밟아 보니, 물기도 없고 미끄럽지도 않은 것이 슬슬 들어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 들어오세요."

"이러니까 내가 더 손님 같네."

정말로 다른 사람 집에 초대된 손님인 것 마냥 살금살금 들어오는 선배의 행동에 살짝 웃음을 흘린 뒤, 바닥을 닦는 데 쓴 걸레를 잘 빨아 햇볕이 드는 창가에 널어놓는다.

내가 그렇게 청소의 뒷마무리를 하는 동안 어느새 거실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선배는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애들은 청소 같은 거 잘 안 한다던데, 그건 틀린 말이었나 봐?"

"아마 선배가 들은 말이 맞긴 할 겁니다."

"그럼 동생이 특이한 건가?"

"아마도요."

아무래도 계속 혼자 살다 보면 싫어도 청소에 취미를 붙여야 하는 법이다. 누군가와 같이 산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혼자 살았던 시간에 비하면 꽤 짧고. 뭣보다 그때도 청소는 내 몫이었다.

선배의 오해를 바로잡으며 선배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자 선배는 전화로 못다 한 말을 하겠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되게 빨리 왔다. 나는 점심 먹고 나서 올 줄 알았어."

"오늘 낮에 되게 덥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짐 정리도 끝내고 주변 지리도 알아볼 겸 좀 빨리 왔죠. 근데 좀 서두르다 보니 힘들긴 하네요. 누가 예고도 없이 일 처리를 빨리도 끝내놓은 덕분에."

"아하하……."

금요일에 방학식을 치르고, 토요일에 집에 짐을 옮겨놓은 뒤 다시 여기 있을 동안 쓸 짐을 다시 챙기고, 오늘 새벽 일찍 나오기까지 꽤 일정을 타이트하게 굴렸다. 앞서 말했다시피, 방학 후 일주일 동안 아무 예정도 없다는 말을 듣고 멋대로 일을 진행한 이 사람 덕분이다.

'출퇴근 걱정 없이 안가람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건 고맙지만…….'

일단 ±0 정도로 생각해둘까. 뭐, 사실을 따져보면 받은 게 더 많으니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난데없이 집 열쇠 같은 걸 줘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그래서 나중에 잘 설명해 줬잖아."

"설명을 좀 먼저 한 다음에 행동을 하세요. 집이라는 게 별장이었으니 망정이지, 정말 선배가 사는 집이었으면 절대 안 받았어요."

"너무하네. 우리 동생은 어여쁜 누님이랑 한 지붕 아래 사는 게 그렇게 싫니?"

"예. 선배야 그렇다 치지만 선배 부모님이나 교장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사서 가시방석에 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선배가 자기 집 열쇠라며 내게 주었던 것은 사실 교장 선생님이 예전에 거주하시던 집의 열쇠였다.

선배 말에 따르면 선배의 아버지인 안상필 대가가 결혼과 동시에 가업을 이어받고 가족이 늘어나 더 넓은 집을 마련하여 이사하게 되어 이 집을 비우게 됐다던가.

원래는 이 집을 팔려다가 노후에 다시 추억이 남은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교장 선생님의 뜻으로 팔지 않고 남겨두었던 이 빈집을, 선배가 교장 선생님과의 협상 끝에 일주일 동안 내가 지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근데 교장 선생님이 노후를 보내실 곳에 이렇게 사람을 들여도 됩니까?"

"괜찮아, 괜찮아. 가끔이긴 해도 가게 직원 기숙사로 쓰인 적도 있었어. 지금은 아니지만."

"호오."

그건 또 처음 듣는 소리다.

"할아버지가 종종 그러셨거든. 집에도 사람 온기가 필요하다고. 쉽게 허락해 주셨으니까 신경 안 써도 괜찮아."

"어라. 저번엔 힘들게 허락 맡으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건 또 다른 거. 차차 알게 될 거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

영문 모를 말을 남긴 선배는 나를 데리고 집안 곳곳을 쏘다니며 주의해야 할 사항 등을 알려줬다. 집 전체의 가스, 수도관을 잠그는 잠금장치나, 혹시 전기가 나갔을 때 봐야 할 두꺼비집 위치 등등.

간단하게 집 전체를 둘러보고, 내가 지낼 방을 골라 짐을 정리하는 것까지 끝낸 나와 선배는 다시 처음 앉았던 테이블로 돌아와 마주 앉았다.

"괜히 주말 쉬는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니야. 너 부른 것도 나고, 여기서 지내게 한 것도 나니까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지."

"그래도요."

거듭된 감사에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배배 꼬며 시선을 피하는 선배를 잠시 바라보기도 잠시. 슬슬 밀려오기 시작한 허기를 느낀 나는 마침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에게 '어디 가?'라고 묻는 듯한 시선을 향하는 선배를 향해 질문을 건넨다.

"선배. 아침은 드시고 오셨어요?"

"아니? 안 먹고 왔는데, 왜?"

"저도 청소 다 끝낸 다음에 먹으려고 참고 있었거든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같이하실래요?"

"그럴까? 안 그래도 조금 배고팠는데 잘 됐다. 여기 근처에 맛있는 집 많거든."

'조금 배고픈 게 아닌 것 같은데. 표정 완전 신났네.'

강한 척 애쓰는 선배의 모습에 흐뭇해하기도 잠시, 뒤이어 나온 선배의 말에 나는 군말 없이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자. 사줄게. 소고기야."

"앗, 옙."

거기서 괜찮다고 거절할 수 있는 남자다움은, 아쉽게도 내게는 없었다.

***

"아, 잘 먹었다."

"덕분에 감사히 먹었습니다."

"에이 뭘. 감사는 우리 할아버지한테 드리렴."

"예?"

"곧 고생할 텐데 미리 잘 먹여두라고 받은 카드거든, 이거."

아하. 과연. 그래서 그렇게 망설임 없이 투쁠 한우를 일시불로 긁은 것인가.

남자다움은 재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나저나, 사람을 대체 얼마나 굴리려고 이렇게 좋게 먹이지?'

분명 지원한 건 나일 텐데, 정작 대접을 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괜히 훗날이 더 두려울 지경이다. 마지막 식사를 마친 사형수가 이런 심정일까.

든든하게 차오른 위장과는 반대로 점점 가슴이 허해지는 기분을 꾹 눌러 담고 앞서 걷는 선배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배도 채웠으니, 본격적으로 일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선배.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야 하는데, 혹시 스케줄 표 나온 거 있나요?"

난 지금 출근 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보통은 업장 측에서 조율한 시간을 문자로 통보하겠지만, 내 경우에는 직접 알려줄 사람이 옆에 붙어 있는 탓인지 아직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고 있으니까.

내 질문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 선배를 보며 나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깜빡하신 겁니까?"

"에, 에이. 그럴 리가 있니? 집에 돌아가서 알려주려 했지."

괜히 말까지 더듬으니 더 수상해 보이는데.

"…… 일단 스케줄은 다 나온 거죠?"

"물론이지. 너랑 나, 그리고 창민이까지 해서 셋이 다 똑같이 들어가거든."

"하긴, 그게 관리하기는 더 편하겠네요."

일손이 과하게 한 시간대에 몰리기는 하겠지만, 업장 측에서도 학생마다 따로따로 관리하는 것보다 하나로 묶어 놓는 게 낫다는 생각이지 않을까.

나름 타당한 스케줄 배분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음……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출근할 때는 어떻게 가는 게 가장 나을까요? 길이야 알아서 찾으면 되긴 하는데 혹시라도 헤매는 것보다는 확실히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건 걱정하지 마. 곧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예? 그게 무슨……."

"벌써 다 왔네. 얼른 들어가자. 나 더워."

"선배?"

굉장히 티 나게 말을 돌리는 선배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기도 잠시, 아까보다 확연히 빨라진 걸음으로 집에 들어간 선배의 뒤를 쫓다가, 문득 이상한 점이 있음을 눈치챘다.

'왜 대문이 열려 있지?'

나올 때 분명 대문을 잠가놨을 텐데. 심지어 열쇠는 지금 내게 있다. 선배한테 여벌 열쇠가 있다 하더라도 방금은 열쇠 없이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간 듯 보였다.

이상함을 느끼며 선배가 활짝 열어젖힌 채 놔둔 대문을 닫고서 집으로 들어가자, 선배 옆에 낯익은 인물 하나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하다 이제 와? 기다렸잖아."

"안창민? 넌 여기 왜 있냐?"

양손에 각기 다른 색상의 캐리어를 든 채 자신의 누나와 내게 불만스런 표정으로 투덜대는 안창민이 바로 그 정체였다.

내가 놀란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은 오히려 뭐가 그리 놀랍냐는 듯 담담한 말투로 내게 되물었다.

"뭐야. 누나가 아직 말 안 했어?"

"무슨…….말?"

이미 정신줄을 잡은 손가락 몇 개를 펼치고 있는 내게, 안창민은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을 꺼내어 마무리 일격을 꽂아 넣었다.

"누나랑 나, 일주일 동안 너랑 같이 여기서 지내기로 했는데."

"…… 뭐?"

"혼자 있을 때 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냐고 누나가 부모님 설득해서 온 건데. 진짜 못 들었어?"

이미 놀란 마음을 감출 여유마저 사라진 내가, 기름칠 안 된 고철마냥 뻣뻣한 고개를 간신히 돌려 선배를 바라보자, 선배는 배시시 웃으며 이리 말할 뿐이었다.

"말했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

내일부터 같이 출근할 테니까.

과연, 이제까지 묘하게 앞뒤가 안 맞던 말들은 다 이걸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이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거절하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향해 한없는 원망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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