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서머 백케이션 워킹.-2-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세요. 일은 또 무슨 소립니까?"
우리 둘 사이를 막고 있는 테이블을 뛰어넘을 듯 상체를 앞으로 내미는 선배의 어깨를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질문을 건넸다. 이제 곧 방학 시작인데, 또 뭘 하려는 속셈인지.
내 손짓에 몸을 거둔 선배는 옆에 있는 의자에 놔두었던 가방을 꺼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굉장히 낯익은 글귀를 본 내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이거, 뭔지 알지?"
"신청서네요."
그것은 바로 어제, 박예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나누어줬던 업장 지원 신청서였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원래 내가 채워야 할 빈칸이 이미 다 채워져 있었다는 것일까.
그것을 보고서야 선배가 주말까지 써가며 나를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미심쩍은 눈빛으로 선배를 바라보니, 선배는 옅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선배……."
"우리 동생은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아니, 이걸 이렇게 주면 누가 눈치를 못 채요."
이 정도로 준비물이 뻔한데 오히려 예상을 못 하면 그게 더 신기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선배가 내민 프린트를 잡아서 가까이 가져왔다. 살짝 너저분한 필체가 묘하게 읽기 힘들다.
'직접 쓴 건가?'
남한테 시킬 일도 아니니 직접 썼겠지만, 보다 보니 은근히 선배와 어울리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지원하고 싶은 업장의 이름을 적어야 할 빈칸에는 이미 '안가람'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곳은 선배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전통 한정식 식당의 이름이었다.
3대째 오너였던 안영길 교장 선생님의 뒤를 이어, 지금 눈앞에 있는 안효민 선배와 안창민의 아버지인 안상필 대가가 4대째 오너로 활동하고 계시는 곳. 요컨대 선배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갑자기 와서 웬 일 타령인가 했더니, 정말로 같이 일하자는 거였습니까."
야 너, 내 주방 동료가 돼라.
이제는 식상한 이야기지 않나 싶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맞아! 우리 가게에서 일 할 생각 없나 물어보러 온 거야."
"보통 이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 강요하는 거 아닙니까?"
"아하하……."
선배가 손수 빈칸을 채워 넣은 신청서를 팔랑팔랑 흔들며 말하자, 선배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 와중에 선택만은 내 몫이라는 듯 이름과 서명을 적을 곳만큼은 깔끔한 공백이었다.
"그나저나, 선배는 집에서 하실 겁니까?"
"올해는 그러려고. 바깥보다는 집이 편하잖아."
맞는 말이다. 사실, 어디 가든 힘들 거면 익숙한 곳에서 구르는 게 나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방금 선배의 말에서 나온 키워드에 신경이 쏠렸다.
"올해는? 그럼 작년에는 다른 곳에서 하셨습니까?"
"다양하게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업장도 다녀봤지. 여름방학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겨울방학 때는 좀……."
"아."
점점 눈이 내리깔리는 선배의 얼굴을 보고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아차 했지만, 선배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티비 몇 번 나왔다고 거기 사람들이 좀 어색해하더라고."
자기들 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은 했는데, 솔직히 뻔히 보였다며 탄식하는 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도 선배지만, 선배랑 같이 일했을 사람들 심정도 나름 이해가 갔으니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고등학생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솔직히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부담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그냥 집에서 하려고. 적어도 다른 업장보다는 훨씬 익숙하니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게 좋겠네요."
"꼭 내가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오해입니다."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씩씩대는 선배를 어르고 달랬다. 어차피 피차 장난이었으니, 곧 웃음과 함께 대화가 끝났다.
"흐음……."
잠시 생각해 보자.
'내가 거길 간다고 쳤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솔직히 말해, 굉장히 많다. 정말로.
강남구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 식당. 안 그래도 원래부터 유명했던 곳이 작년,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의 우승으로 인해 말 그대로 떡상한 곳.
'원래는 두 달 정도 기다려야 하던 저녁 풀코스 예약 대기 기간이 1년으로 늘어났다고 했던가…….'
적어도 국내 한식당 중에서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안가람의 주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분명 요리사에게 있어서 더없는 기회다. 경력, 경험 할 것 없이 분명 수확을 얻을 수 있겠지.
'특히 난 한정식 식당에서 제대로 일한 경험도 없고.'
분명 내게 있어서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맥. 앞서 말했다시피, 안가람에 들어가려면 어중이떠중이 쿡들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 파트의 장을 맡는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대가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사람뿐이고, 가장 막내라인도 어지간한 경력과 학력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간다고 봐야 한다.
'거기서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 있다면, 한국 요리계의 실세 라인과 인연을 틀 수도 있겠지.'
반대로,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인연은커녕 악연만 잔뜩 쌓일 것이다. 하지만…….
'이래 봬도 프로란 말이지.'
이름값 하나는 결코 꿇리지 않는 업장에서 10년 가까이 경력을 쌓았던 몸인데, 그거 하나 못할쏘냐. 고생은 하겠지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장점을 생각하면 당연히 받아들이는 게 맞는 상황. 그러나, 단점…… 이라고 하긴 뭐한 문제가 하나 있다.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주시면 가고 싶긴 한데…… 저 출근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바로 통근 거리다. 출퇴근에 드는 시간이 적어도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아주 많으면 한 시간 반 정도만 되어도 어떻게든 노력해 보겠지만, 당장 가장 가까운 버스 터미널에서 우리 집까지는 편도로만 두 시간이다. 요컨대, 출퇴근은 힘들다는 뜻이다.
"아."
선배의 눈이 그건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휘둥그레 뜨인다. 출퇴근 여건은 직장인이 연봉 다음으로 따질 문제인데, 설마 깜빡했다는 건가.
"선배……."
"아, 아하하……."
무안하다는 듯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배배 꼬며 웃는 선배의 모습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내 앞으로 내밀어졌던 프린트를 다시 되돌려주었다.
"마음은 감사한데요. 아쉽게도 여긴 못 가겠네요."
물론 나도 마음이 끌리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프린트 목록에 있는 업장 중에서는 가히 맞먹을 곳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물리적 한계라는 게 마음만 갖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 내 거절 의사를 들은 선배는 테이블 위에 팔짱 낀 몸을 얹은 채 한참 동안 앓는 소리를 냈다.
'왜 저렇게 같이 하겠다고 고집인 건지.'
몇 달 동안 대회반 활동을 함께 하며 분명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가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주고받을 정도인가 싶으면 그것도 좀 애매하다.
결국 선배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모르겠네."
"저도 아쉽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제안은 좋지만, 왕복 4시간 거리의 출퇴근은 솔직히 좀…….
"기숙사도 방학 때 닫으니까 집에 가야죠."
내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선배의 고개가 갑자기 마치 에어컨을 끄지 않고 나온 사람마냥 뻣뻣하게 굳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동생. 혹시 방학 첫 주에 어디 갈 일 같은 거 있어?"
"예? 아뇨. 그냥 집이랑 가까운 업장에서 빨리 방학숙제나 해결할 생각이었는데요. 당장 개학 전주에 엑스포도 가야 되니까."
"그래? 잘됐네. 일단 이건 갖고 있고."
그 질문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선배가 내게 신청서를 다시 내민다.
"못 갈 것 같다고 했는데 이건 왜 주십니까."
"히히, 일단 갖고 있어 봐. 지금 이 누나가 끝내주는 해결법을 찾았거든."
자리에서 일어난 선배는 빨리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다음 주에 보자며 순식간에 자리를 떠나갔다. 미처 따라 일어날 새도 없을 정도의 속도. 묘한 기시감에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커피값은 받아가지."
아마 저 선배 성격을 보면 다음에 만날 때엔 얼만지 기억도 제대로 안 하고 있을 텐데.
작은 한숨과 함께 자리를 일어서다가, 저 선배를 만날 때마다 한숨이 늘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지만 곤란한 계열의 사람이었다.
***
그리하여 다가온 다음 주 월요일.
시험도 끝났고, 학기를 마무리하는 주간이기에 대부분의 수업은 적당히 자습과 알림 사항 전달 등을 하며 지나갔다.
반 아이들도 다들 긴장이 풀렸는지, 몇 주 전 시험을 준비할 때의 살벌한 분위기는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소란스런 기색을 띠고 있었다.
실습에 이르러선 아예 요리 대신 마지막 대청소로 학기를 마무리하는 중이었기에 소란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 조원들 또한 그 소란에서 빠질 수 없다는 듯 싱크대와 찬장, 서랍 등을 정리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계속 입을 나불댔다.
"너희는 방학 숙제할 곳 정했어?"
누구 가릴 것 없이 조원 전체를 향한 김철정의 질문에 나를 비롯한 일행의 시선이 한 데 모였다. 하긴,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화제였으니 언제 나와도 이상할 것 없는 질문이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춘 일행 중,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질문자 본인인 김철정이었다.
"나는 아버지 하시는 가게 일 도우면서 끝내려고. 어차피 집 바로 근처라 다니기도 편하고."
"역시 거길 못 벗어나는구나. 입으로는 맨날 집 싫다면서 몸은 솔직하네."
"나도 딴 데 가볼까 했는데, 다시 생각하니까 다른 데서 시간 채워봤자 집에서 일 안 하는 건 아니더라고……."
어딘가 슬픈 기색이 느껴지는 대답에 일행의 대화가 잠시 멎었다. 이 자리에 모인 나를 제외한 세 명은 서로 똑같이 집에서 운영 중인 가게가 있는 아이들이기에 철정이 녀석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리라.
그 증거로, 다른 아이들이 하는 말도 대부분 비슷했다.
"내도 우리 엄마야가 하는 가게나 도우러 갈라꼬."
"나는 공장에서 고기 납품받는 정육식당에서 일할 생각이야. 아빠랑 가게 사장님이랑 벌써 이야기 끝났다나 봐."
이 참담한 인맥 등용의 현장에 나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서로 한마디씩 보태며 김철정을 위로하는 겸 스스로 실태를 폭로한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나는 어떡할 거냐고 눈으로 물어오는 것 같다.
나는 수량 체크가 끝난 조리도구를 서랍 속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그 말 없는 질문에 답했다.
"나도 대충 정해지긴 했어. 원래 집 근처에 적당한 업장이나 갈 생각이었는데 대회반 선배가 같이 일하지 않겠냐고 해서. 뭐, 일단 알겠다고 했지."
"진짜? 선배 누구? 설마 안효민 선배님이?"
"어. 근데 아직 좀 고민 중."
"와, 안효민 선배님 제안을 갖고 네고를 친다고? 이놈 출세했네."
"뭐래. 그런 거 아냐."
묘하게 놀리는 말투로 말하는 김철정. 이건 이것대로 얘다운 반응이었지만, 양희연과 나현주는 진심으로 놀란 듯 화등잔만 해진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가람이면 100명이 신청해도 101명이 떨어진다는 곳인데, 찬혁이 정도 하면 갈 수 있는 거구나."
"그건 모르지. 선배가 하자고 해서 신청했는데 떨어지면 꽤 꼴불견일걸?"
"참말로 그렇게 되믄 부산이나 와라. 우리 가게서 접시 닦이 정도는 시켜주께."
"내가 부산까지 접시닦이 하러 갈 짬이냐."
"니가 스물을 먹었나, 서른을 먹었나. 무신 짬 타령이고?"
"…… 농담이었어."
순간 나도 모르게 성 셰프 가게에서 일한 이야기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어떻게든 목젖 아래로 다시 삼킬 수 있었다.
무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양희연의 시선을 피하기도 잠시, 대청소가 얼추 끝나기 무섭게 들어온 선생님의 감독을 끝으로 실습수업을 마무리 지은 우리는 그제야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
교실로 돌아가는 길. 귀소본능에 몸을 맡겨 무의식적으로 교실로 돌아가던 나는 그저께 선배가 내게 주고 갔던 신청서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선배의 제안을 받고는 싶지만, 물리적인 한계가 명확한 상황. 당장 내게 답을 알려줘야 할 선배는 감감무소식이니 고민하는 내 속만 타들어 갈 뿐이다.
"이걸 어쩐다……."
탈의실로 가는 길에서 한 차례 일행이 찢어지고, 이어서 철정이 녀석이 화장실이 급하다며 다른 길로 샌 탓에 결국 홀로 발걸음을 옮기며 신청서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갈 때,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찾았다! 찬혁아!"
낯익은 목소리. 효민 선배다.
교실 앞에서 내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1학년 1반이라 적힌 푯말 앞에서 나를 보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선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고사를 재현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 귀신같은 타이밍에 혀를 내두르며 나도 선배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안녕!"
어쩐 일로 찾아왔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인사를 마친 선배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동생. 내가 준 거 챙겨왔어?"
"신청서 말씀하시는 거면 가져는 왔죠."
짐작하고 있던 화제가 나왔기에, 나도 뜸 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은 선배도 어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이, 뭔가 방법을 찾긴 찾은 듯 보였다.
"좋아, 그럼 이따가 꼭 제출해야 된다? 안 내면 안 돼?"
근거 모를 자신감으로 충만한 선배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대단한 방법을 찾았기에 이렇게 근자감이 가득한 것일까?
그런 내 의문을, 선배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해소해 주었다.
"자, 이거 받아."
"열쇠네요? 무슨 열쇱니까?"
치마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열쇠 하나를 건네준 선배가, 이걸로 됐다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우리 집 열쇠야. 이러면 출퇴근 걱정 없지?"
"…… 예?"
말을 정정하자.
이 사람이 하는 말, 도무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