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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70화 (70/403)

70. 서머 백케이션 워킹.-1-

화창한 햇볕이 눈을 절로 찡그리게 만드는 화창한 여름날.

빵빵하게 나오는 에어컨 덕에 바깥의 무더위를 잊은 학생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더위 대신 더욱 끔찍한 무언가에 맞서 장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음. 류찬혁."

하지만, 그런 전쟁의 포화를 거뜬히 피해낸 사람도 물론 있었다. 나처럼 말이다.

"야, 어때? 잘 봤냐?"

"그럭저럭?"

"한 번만 보자."

선생님이 주신 성적표를 받아 자리로 돌아온 내가 의자에 앉기 무섭게 내게 고개를 들이밀며 성적표에 시선을 향하는 김철정. 성적표를 함부로 보여주기가 살짝 껄끄러워 팔을 뒤로 뺐지만, 계속되는 요구에 결국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봐라, 봐."

"오 땡큐땡큐. 어디 보자…… 와, 잘 봤네."

감탄스런 표정으로 성적표를 돌려준 녀석이, 이번에는 자기 책상 위에 있던 성적표를 내게 밀어 보였다.

"나는 그냥 중박보다 좀 좋은 정도더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녀석이 보여준 성적표에 적힌 숫자들은 제법 높았다. 실기 시험 성적은 특히나.

'이 점수로 중상위권이냐…….'

이 학교도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나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석차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내 자신의 성적표를 거두어 가방에 집어넣은 김철정은 그대로 책상 위에 늘어졌다.

"하긴 그렇게 죽어라 공부했으니 당연한가. 너 공부하는 것만 보면 전교 1등이라도 할 줄 알았어, 난."

"전교 1등이 뉘 집 개 이름이냐."

"일등이는 있을 법하지 않냐?"

"……그도 그러네."

자기 농담에 자기가 킬킬대던 녀석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심이 담겨 있다기보다는, 무언가 속에 맺힌 것을 풀어내는 느낌이 강한 날숨이었다.

"어쨌든 이걸로 1학기도 끝이구나. 진짜 여기 더럽게 힘들다."

"인정합니다."

"여름방학 시작하면 바로 숙제부터 깔끔하게 털어 버리고 한 달 내내 쉬어야지."

바다에도 갈 거고 계곡에도 갈 거고, 아무튼 가고 싶은데는 다 가겠다며 난리를 치는 김철정이었으나, 아쉽게도 나는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너, 집에 있으면 부모님 가게 일 돕느라 못 쉬는 거 아니냐?"

"아……."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김철정. 아이들 사이에서 흔히 예습반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의 말로다. 방학? 바랄 걸 바라야지.

'요리사란 게 원래 남들 놀 때 일하는 직업이니까.'

수십여 년을 이 업계에 종사하며 그 현실에 눈물지은 적이 대체 몇 번인지. 요리사 가계에서 자라며 그 현실에 여태껏 맞닥뜨려 왔을 철정이 녀석을 위해 잠시 묵념했다.

하나, 둘, 셋. 자 끝.

"나만 아니면 됐지."

"예?"

"들렸음? 미안."

"아 이놈 가만히 뒀더니 안 되겠네 이거."

실없는 농담으로 킥킥대기도 잠시. 피할 수 없는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며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을 지은 김철정이 그대로 책상에 고꾸라졌다.

'하기야, 1학기 동안 그 난리를 쳤는데 쉴 시간도 없이 일부터 해야 한다면 당연히 힘들겠지.'

철정의 탄식에 저절로 공감이 간다는 게 슬프지만, 그걸 다 알고도 다시 이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또라이가 바로 여기 있으니. 그런 또라이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응원뿐이다.

팔을 축 늘어트린 채 책상에 이마를 박고 있는 김철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해 준다.

─짝. 짝.

"자, 여러분. 잠시만 주목해 주세요."

그때. 마침 성적표 배부를 마무리한 박예휘 선생님이 박수를 치며 학생들의 이목을 끌었다. 1학기의 끝을 눈앞에 둔 소년소녀들의 수다로 일어난 웅성거림이 가라앉자 선생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전달사항을 말해 주기 전에 여러분에게 먼저 이거 하나는 말해 주고 싶네요. 1학년 1반 학생 여러분. 1학기 동안 굉장히 고생 많았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참으로 대견하다는 감정이 가득 담긴 눈웃음을 지으며 학생들을 굽어보는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이상하게 등골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아, 이런 느낌이 들 때마다 뭐 제대로 되는 게 없었는데 말이지.'

특히 저 선생님이 웃으면서 뭔가 좋은 이야기를 밑밥으로 깔고 들어올 때는 거의 100%에 가깝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러는 건지 잠시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김철정이 했던 말이 스쳤다.

'방학 때 일을 도와야…… 방학 때 일?'

아, 생각났다. 방학 때마다 학교에서 내주던 방학 숙제.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던 그 실체가 기억의 호수 속 깊이 가라앉은 침전물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부터 한 번씩 살펴보세요."

어느새 두꺼운 프린트 뭉치를 챙긴 선생님은 우리 사이를 돌아다니며 인쇄물을 손수 나눠주기 시작했다.

돌고 돌아 나에게 온 차례. 선생님이 준 인쇄물을 살핀 나는,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희망 업장 지원 신청서?"

인쇄물을 받자마자 펼쳐본 김철정이 종이 가장 위에 쓰여 있던 글귀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보며, 내가 마냥 이 녀석을 불쌍하다 할 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 정체불명의 인쇄물을 보고 여기저기서 이는 작은 웅성거림.

이게 대체 뭐 하는 물건인지 학생들이 채 알아보기도 전에, 배부를 마치고 단상으로 돌아간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여러분들의 방학 숙제입니다."

뭐예요. 내 방학 돌려줘요.

***

"킥, 크킥, 푸흡."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선생님의 방학숙제 알림을 마지막으로 종례가 끝난 뒤. 기숙사로 돌아와 자리에 짐을 풀어놓자마자 갑자기 정신 나간 놈처럼 킥킥대기 시작한 김철정을 짠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나만 새된 건 아닌 것 같아서."

"아, 그러냐."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방금 선생님이 말했던 방학숙제를 다시 떠올렸다.

방학숙제. 대체 그게 뭐 별거냐 싶지만, 성심고의 방학숙제는 살짝 특이하다.

'어떤 업장이든 좋으니 일주일 근무라.'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봉사시간 채우기 방학숙제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우리가 하는 건 봉사가 아니라 실제로 시급 받고 하는 근무지만.

"근데 학교 사람들은 예전부터 이런 거 했었나 보네."

"그야 뭐, 논리는 나름 그럴듯하니까."

"실제 업장에서 뛰는 것보다 더 나은 학습은 없다, 뭐 그거?"

"어, 그거."

방학숙제에 관해 설명하며 선생님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김철정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작게 콧바람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흠, 확실히 틀린 말 하나 없긴 하지. 힘들기야 하겠다만."

"대신 실습 과목 방학숙제는 하나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의외로 남는 장사지. 돈도 벌고."

"야, 나는 돈 못 벌어."

어찌 보면 조금 충격적일 수 있는 방학숙제지만, 실제로는 그리 힘든 내용은 아니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일주일 치 근로시간인 주 40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되고, 그 외 실습과목과 관련된 숙제는 하나도 없다.

철정이 녀석처럼 집이 식당을 운영하는 가계에서 집을 도우며 시간을 채워도 좋고, 원래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나, 아니면 학교와 계약을 맺은 호텔 혹은 개인 레스토랑 등에 지원서를 내고 일하는 것도 가능하다.

선생님이 나눠주었던 업장 지원 신청서는 바로 마지막에 말한 방법을 위해 있는 것이다.

"와, 근데 난 학교랑 계약 맺은 업장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어."

"그야 뭐, 이 학교도 꽤 전통이 있으니까."

우리 학교에 자금을 지원해 주는 기업 산하의 호텔을 제외한다 치더라도, 도저히 두 손발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많은 업장들.

클래식한 레스토랑도 있고, 정식집이나 오마카세, 아니면 수산시장 속 횟집이나 정육식당 등 종류만도 수십 가지가 넘는 이 업장들의 정체는 이전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개업한 곳이 대부분이다.

"우리 학교 학생도 한두 명이 아닌데, 지원 신청을 받아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건가?"

"3학년들은 졸업 준비 때문에 안 하니까. 1학년이랑 2학년들밖에 없고, 그중에서 반은 집이 식당을 하는 사람들이니 해봤자 3, 400명 안팎인데 그거 하나 감당 안 되겠냐."

"그도 그렇네."

'뭐, 성수기에 그나마 좀 배운 게 있는 학생 인력을 쓰고 싶은 업장도 없진 않을 테고.'

간단한 설명을 마친 내가 자리에 앉아 신청서와 신청 가능 업장 목록을 살피려니, 어느새 의자 바퀴를 굴려 내 옆으로 다가온 녀석이 그것을 같이 살폈다.

"여기 중에 한 군데 신청해서 가게? 뭐, 원래 알바 하던 곳 없어?"

"없지는 않은데, 기왕 하는 거 좀 신박한데나 가볼까 싶어서."

"그냥 편한 곳에서 하지 그러냐. 나처럼."

"너는 편한 곳이 아니라 불편한 곳이지 않냐? 내가 봤을 때 너는 주 40시간으로 안 끝날 것 같은데."

"아. 씁."

팩트에 명치가 움푹 파일 정도로 얻어맞은 녀석이 작게 혀를 찼다.

"우리 집도 근로기준법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 하루에 7시간만 딱."

"그건 근로자고. 너는 사장이잖아. 부사장."

"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를 딱 맞추네. 정답 기념으로 좀 맞을래?"

"맞는 건 네 방학 노는 시간이고. 고생 많이 하십쇼. 크크루삥뽕."

언젠가 주아 녀석이 입에 담은 적 있던 괴상한 웃음소리를 섞어 살짝 약을 올리니 아주 열이 뻗쳐 돌아가시려고 한다. 뭐, 장난은 이쯤 치고…….

'그나저나 어떡한다. 신청할 사람은 당장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꼭 신청서 제출하라 했는데.'

프린트 여러 장에 걸쳐 빼곡하게 적힌 업장들은 잘 모르는 곳도 있지만, 지금의 나도 알만큼 꽤 유명세가 있는 잘 나가는 업장도 여기저기 끼어 있었다.

"음……."

"대충 찾아보고 집이랑 가까운 곳 가는 게 제일 낫지 않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럴 거면 그냥 사장님 가게를 갔을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은 아니지만, 아무 면접도 없이 원하는 업장에 가서 일을 해보는 것도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기회도 아니니까.

'아무래도 경험을 쌓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 업계도 상상 이상으로 인맥과 학력을 중요하게 따지는 곳. 학생을 가장한 프로인 내가 받을 주목도는 스스로 생각해 봐도 꽤 대단할 테니까.

'좋아 생각을 좀 정리해 보자.'

일단 중요한 건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이냐는 것.

그다음으로는 내 앞길에 도움이 될 커리어를 쌓을 수 있을 곳이냐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흠, 꽤 어려운 조건이기는 하지만, 잘 찾아보면 아주 없을 것 같지도 않은데…….

─우우우웅.

한창 목록을 뚫어져라 살피며 어느 곳을 가볼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진동하는 핸드폰.

'전화? 누구지?'

"여보세요?"

등록 안 된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자,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동생, 잘 지내? 어떻게 연락 한 번이 없니!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대회반의 예비부장. 아니, 곧 2학기로 넘어가는 지금은 일에 치이는 3학년 대신 진짜로 부장을 맡게 된 안효민 선배였다.

대회 우승 축하파티를 끝으로 시험 준비가 바빠 만나지 못했던 선배의 갑작스런 전화에 살짝 당황한 내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뭐 번호를 알아야 연락을 하든 말든 하죠. 선배님은 제 번호 어떻게 아셨습니까?"

─부장한테는 전달사항 전파용 연락처가 있거든.

"직권남용 아닙니까, 그거."

─아닌데. 전달사항 전파하려고 전화한 건데.

굳이 얼굴을 안 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히 예상이 가는 그 말투에 실소를 흘리자, 그쪽에서 말을 이었다.

─동생, 따로 약속 없음 내일 보자!

"없긴 합니다만…… 내일 주말인데요."

─그러니까 보자는 거 아냐.

"선배 집에서 통학하시지 않습니까? 저 기숙사 삽니다."

─내가 거기까지 갈게. 내일 정오에 만나. 얘기는 그때 이어서 할 테니까. 그럼 내일 봐!

─뚝.

"……뭐지 이 사람."

뚝 끊어진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11자리 숫자를 흔적처럼 남기고 떠난 선배의 잔상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번호를 저장했다. 이것도 소중한 인맥이다. 조금 억척스럽게 이어진 줄기기는 했지만.

***

다음날.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효민 선배는, 내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동생. 나랑 일 하나 하자."

"……예?"

하이스트 영화의 기획자를 방불케 하는 대사 선택과 기백 넘치는 표정에, 나는 저도 모르게 벙 찐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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