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기말고사.-1-
주말동안 취한 휴식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두 달간의 피로를 어느 정도 흘려보낸 뒤.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두 번째 지옥이었다.
"죽…… 여줘……."
보아라. 저것이 바로 이 지옥을 견디지 못한 자의 말로다. 절망과 탄식에 잠긴 저 목소리는 마치 깊고 깊은 늪을 향해 발목을 잡아끄는 원귀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원귀를 향해 담담히 사실을 말해 줄 뿐이었다.
"…… 일어나, 시험공부 해야지."
"으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을 강제로 직시하게 된 아귀, 김철정이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소리로 그르렁거린다. 그 모습을 살짝 한심한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나 또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내 일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눈앞에 쌓인 여러 권의 책.
수학, 국어, 과학…… 뭐, 길게 말할 필요도 없겠지. 우리는 지금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우리 학교가 아무리 교과목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건 아니라고 해도 선이라는 게 있는 법. 막 회귀했을 때는 고등학교 과목은커녕 중학생 때 진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상태였기에, 만약 그대로 시험을 봤다가는 정말로 전부 다 깔끔하게 찍어 버린 뒤 물 떠놓고 빌어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공부머리가 좀 돼서 다행이지.'
집에 박혀 있던 예전 교과서와 문제집까지 끄집어 내가며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하니 어느 정도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창 외국어를 공부할 때도 이해가 안 돼서 고생하는 일은 별로 없었던 걸 생각하면, 내 머리가 그렇게 돌대가리는 아닌 듯 싶다.
'그래도 아직 좀 부족하단 말이지…….'
근래에는 대회 탓에 교과목보다 실습에 쏠린 비중이 더 커서 교과목에 그다지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다. 그나마 하던 게 있어서 두세 걸음 뒤처진 정도지, 지금껏 공부를 정말 손 놓고 있었다면 앞서 말한 대로 접시에 물 떠놓고 밤새 치성을 드려야 했을 것이다.
'아니면 접싯물에 코 박고 죽거나.'
다행히, 접시는 요리할 때나 보면 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다행인 것은, 적어도 저기서 죽어가고 있는 철정이 녀석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는 것일까.
"아, 나도 실기 시험 안 보고 그냥 만점 받았으면 좋겠다."
"그럼 너도 대회 나가서 우승하고 오던가."
"그건 좀."
"그럼 공부나 해."
김철정이 말했다시피, 나는 이번 실기 시험을 안 보고 만점으로 패스할 수 있었다. 대회에서 우승하여 받은 점수가 있으니까.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기말고사 과제인 창작요리 레시피를 힘들게 준비하는 동안, 나는 그 시간을 교과목 공부에 쏟을 수 있으니, 굉장한 이득인 셈이다.
'…… 아니, 이건 조삼모사인가.'
대회반 커리큘럼도 말도 안 되게 힘들었으니, 오히려 내가 살짝 손해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경력까지 치면 당연히 이득이겠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운 걸 보면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아, 좀만 쉬자. 머리 터질 것 같아."
결국 철정이 녀석은 더 이상 책상에 붙어있지 못하고 침대로 나가떨어졌다. 하긴, 레시피만 외워서 구우면 되는 제과제빵을 제외하고도 네 개나 되는 창작 레시피를 고민해야 할 테니, 어지간히 힘들 것이다.
시간도 벌써 8시를 훌쩍 넘긴 상황. 저녁을 먹은 뒤로 줄곧 책상에 앉아 있던 나도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기에, 목표하던 지점까지 몇 페이지 남지 않은 문제집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득.
"오우야."
스트레칭 한번 했더니 무슨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얼마나 자세가 굳어 있었으면.
적당히 기지개를 켜며 어깨와 허리, 목 등을 순차적으로 풀어주니 그제야 살짝 졸음이 가셨다.
'뭔가 출출한데…… 기왕 일어난 거.'
번뜩 떠오른 발상에 스트레칭을 멈추고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을 뒤진다.
버터와 빵, 우유 등을 비롯한 몇 가지 먹거리. 그리고…….
"오."
냉동고까지 뒤지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했다. 꽁꽁 언 냉동새우. 주말에 기숙사로 돌아올 때 나중에 파스타에나 넣어 먹자고 사 왔던 것.
과거의 자신의 픽에 감탄하며 새우와 빵, 버터 등을 챙기고 있을 때, 김철정이 나를 보며 물었다.
"뭐하냐, 너? 뭐 연습이라도 하게?"
"아니."
아쉽게도 틀렸다. 나는 적어도 이번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실습 연습은 깔끔하게 손 놓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나는 그 질문에 부가 설명을 더 하는 대신, 재료들이 담긴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야식, 먹으러 갈래?"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반복하는 봉투를 따라 움직이던 김철정의 고개가, 이내 위아래로 움직였다.
***
그 이상 별다른 논의도 없이 금세 기숙사 주방으로 내려온 우리.
사람 한 명 없이 텅텅 비어 있는 주방으로 들어온 나는, 다른 것은 전부 제쳐두고 가장 먼저 냉동 새우를 볼에 담아 흐르는 물로 해동시켰다.
그 뒤에는 간단하게 주방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챙긴다. 올리브오일, 마늘, 페페론치노. 거기에 기본적인 소금과 후추.
내가 준비한 재료를 확인한 김철정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감바스 만들게?"
"맞아."
나는 철정의 눈썰미에 작게 감탄했다. 원래는 중식 외에는 그다지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실습 때 만든 적도 없는 메뉴를 재료만 보고 눈치챌 정도가 되었을 줄이야.
그 말대로, 나는 지금 스페인의 유명한 전채 요리. 감바스알아히요Gambas al ajillo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바스알아히요. 줄여서 감바스는 말하자면 올리브오일에 새우와 마늘 등을 넣어 끓인 요리이다.
기름에 넣어 튀기는 것도 아니고 끓인다는 말이 난해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조리 방법이 그러니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우선 가장 먼저 할 건 마늘을 다듬어 자르는 것.
복통을 유발할 수도 있는 마늘 꽁지를 자르고, 적당히 두껍게 이등분을 한다. 대단할 것 없는 작업이지만 아무래도 마늘 양이 많다 보니, 좀 귀찮기는 하다.
'그나저나 이거…….'
마늘을 자르며, 나는 이전 사장님에게서 받았던 식칼을 처음 사용해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내 손에 들러붙는 것 마냥 딱 알맞은 그립감. 여타 목재보다 조금 더 무게가 나가는 흑단목 특유의 무게감이, 절묘하게 칼날의 무게와 밸런스를 맞추어 손목에 피로를 덜어준다.
칼날은 또 어찌나 예리한지. 마늘에 칼날을 대는 족족 저항감도 없이 슥슥 쪼개지는 것이, 실수로 손이라도 그었다간 큰일 나는 게 아닐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다.
철정이 녀석도 그런 내 칼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 빤한 눈빛을 보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오, 야. 그건 뭐냐? 딱 봐도 되게 비싸 보이는데."
"이번 대회 우승 선물로 아는 가게 사장님한테 받은 거야."
그 말에 김철정이 놀랐다.
"야 딱 봐도 일이십만 원 선에서 안 끝날 것 같은데, 그걸 선물로 줬다고?"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웃으며 자기 일을 끝낸 칼을 깔끔하게 세척했다.
기본적인 감바스 레시피에서 칼을 쓸 때는 마늘 다듬을 때밖에 없다.
자른 마늘들을 접시에 잘 옮겨 담은 뒤, 아까 해동시켜 놓았던 새우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괜찮네.'
좀 여유를 부리면서 해서 그런지, 새우는 아주 부드럽지는 않아도 적당히 휘어질 정도로는 녹아 있었다. 뻣뻣하게 얼어 있을 때보다야 훨씬 유연하다.
"야, 철정아. 슬슬 손 좀 보태라."
"어."
새우 요리를 만들 때 가장 귀찮은 점은 새우 껍질을 까는 것이 아닐까.
'이건 어느 갑각류든 거기서 거기긴 하겠지만…….'
잘 닦아준 새우의 껍질을 둘이서 열심히 벗겨낸다. 우리 둘 다 손이 꽤 빠른 덕인지 접시 위로 새하얀 살결이 드러난 새우가 순식간에 쌓였다.
껍질을 벗긴 새우의 내장을 제거하고, 간단하게 소금으로 간을 해주면 이쪽은 끝.
"후…… 귀찮은 일은 끝냈네. 힘들다."
"그래도 책상에 계속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
책상에 앉아 골머리를 싸매던 그때를 되새기는 철정이 녀석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확실히, 책상에서 공부하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가끔은 이렇게 생각 없이 머리를 식히는 것도 필요하다.
─띵!
"아, 됐네."
둘이서 수다를 떠는 동안 새우 내장을 빼기 전 낮은 온도로 오븐에 넣어놨던 새우 머리와 껍질. 익히는 게 아니라 말리려고 넣어 놓은 것이었는데, 꺼내서 확인하니 딱 좋게 말라 있었다.
팬에 깔린 종이호일 위로 늘어선 살짝 빨개진 새우 껍질과 머리를 보며 철정이 물었다.
"근데 이건 뭐 하려고? 감바스에 이런 게 들어가던가?"
"뭐, 원래 레시피에는 안 들어가긴 해."
"그치? 그럼 이건 뭐 하러 준비한 거야?"
타당한 의문에, 나는 그냥 보고만 있으라며 녀석을 옆에 세웠다.
감바스는 원래 넉넉하게 부은 올리브오일에 마늘과 페페론치노를 넣고 끓이며 맛을 낸 뒤, 마무리로 새우를 넣고 익혀서 기름까지 즐기는 요리다.
즉, 감바스를 맛있게 만들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새우도, 마늘도 아닌 기름이라는 것.
내가 지금부터 하는 것은, 그런 기름을 가장 맛있게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먼저 냄비에 올리브오일을 냄비 밑바닥에 적당히 깔릴 정도로만 넣은 뒤, 오븐에서 말린 새우 머리를 쏟아 넣고 볶는다. 이때, 주걱으로 살살 뭉개주듯 새우 머리를 눌러주면, 그 속에서 흘러나온 새우의 내장이 자연스럽게 기름 속으로 녹아들게 된다.
'새우의 가장 맛있는 맛은 전부 이 머리에 들어 있으니까 말이지.'
새우 머리가 익어 새빨갛게 물들고, 기름에 새우 엑기스가 잘 섞였다는 확신이 들 때 올리브오일과 새우 껍질을 추가로 넣는다.
그대로 불을 조절하여 기름이 보글보글 끓게 만든 뒤, 방금 잘라놓은 빵을 버터로 구워준다.
빵을 다 구웠을 쯤 되니 새우 기름도 잘 뽑혀 있었다. 새우 껍질 특유의 붉은빛이 옅게 감도는 올리브오일. 그 위로 감도는 새우 특유의 살짝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바다의 향기가 짙은 안개처럼 비강 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여기까지 잘 풀렸다면 그 다음은 간단했다.
채반으로 걸러낸 기름에 마늘, 페페론치노를 넣어 끓인 뒤, 새우를 넣고 마저 끓여 간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전체적인 조리 시간 중 새우 기름을 뽑는 데에 가장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도중부터 '굳이 귀찮게 그렇게 해야 돼?'스러운 시선을 줄곧 보내며 설거지를 하고 있던 철정이 녀석.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했는지 단숨에 깨닫게 해줄 테니까.
"자, 다 됐다. 한 번 먹어 봐."
더 이상 설거짓거리가 나오지 않도록 냄비째 가져온 감바스.
그것을 살짝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철정이 녀석이 이내 마늘과 새우, 기름을 단번에 숟가락으로 퍼서 입으로 옮긴다.
"솔직히 새우 기름 좀 뽑겠다고 20분이 넘게 걸리는 건 좀 오바 아니야? 굳이 그렇게 안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니냐며 작게 투정을 부리던 녀석의 입이, 감바스를 집어넣자마자 단숨에 다물어진다.
마치 턱이라도 한 대 맞은 사람 마냥 멍한 표정에 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흐흐, 어때. 죽이지?"
"와, 이거. 와."
말하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듯, 김철정은 말을 더듬거리며 쉴 새 없이 감바스를 향해 숟가락을 놀린다. 그냥 먹기도 하고, 구운 빵에 올려 먹기도 하며 음식을 해치워가는 녀석에게 뒤질세라 나도 숟가락을 서둘렀다.
"음!"
새우의 고소함과 마늘, 페페론치노의 매콤함을 한 몸에 품은 기름, 그리고 짭짜름한 살코기 위로 그런 기름을 덮어쓴 새우와 노릇하게 익어 매운맛은 빠지고 오묘한 단맛이 감도는 마늘까지.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된 일품이었다. 눈을 감고 그 맛을 신중하게 음미하고 있는 내게, 김철정이 놀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새우 기름이란 게 잘 뽑으면 엄청나구나. 시간을 들인 보람이 있네."
"그렇지?"
이제야 나의 큰 그림을 이해한 듯 보이는 철정이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깐 나는, 놀랍다며 호들갑을 떠는 김철정보다 더욱 크게 놀랐다.
"아니, 좀 천천히 먹어!"
왜냐하면, 내가 열심히 만든 감바스가 벌써 반 가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광경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숟가락을 움직인 나였으나, 결국 감바스는 대부분 철정이 녀석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
"어우 씨, 먹으러 가서 먹이고 왔네."
잠시 후, 기숙사실.
자기만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미안하다며, 덕분에 시험 때 쓸 레시피도 실마리가 잡혔으니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단 말과 함께 뒷정리를 도맡은 김철정의 친절(?) 덕에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적당히…… 는 아니고, 조금 부족하게 배도 채웠으니 하던 공부나 마저 하려 자리에 앉아 책을 펴다가, 가기 전 책상 위에 적당히 올려두고 갔던 핸드폰의 led 상태표시등이 깜박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가 전화라도 했나 싶어 화면을 켜니, 온 것은 전화가 아니라 메신저 알람이었다.
알림을 꺼놓은 반 단톡방과 가족끼리 쓰는 톡방 등, 평소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톡방들 위로 자리를 잡은 낯익은 이름.
「양희연 : 야, 이번 주말에 시간 좀 있냐? 밥 살게 잠깐 보자.」
꽤 뜬금없는 초대에, 내 눈이 살짝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