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66화 (66/403)

66. 7월 25일. 지워지는 날짜.-2-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하자면, 일식은 굉장히 맛이 극단적인 요리가 많다.

초밥처럼 원재료의 맛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담백함을 즐기는 요리가 있는가 하면, 일본의 대표적인 서민 요리라고 할 수 있는 라멘처럼 한국인의 입맛에는 너무 짜고 진해서 꺼려질 정도로 농후한 맛을 내는 요리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요리도 많지만…….'

그 나라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를 꼽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요리 중에서도 스키야키는 진한 맛의 끝자락에 있는 요리 중 하나다.

만드는 과정만 보아도 그렇다. 간장과 설탕, 술 등으로 만든 육수에 재료를 넣어 끓여 먹는 샤브샤브와 전골의 중간지점 정도에 있는 요리.

원재료의 맛을 알기 힘들 정도로 단맛과 짠맛이 강하기 때문에, 첫입을 먹었을 때 혀에 전해지는 충격은 대단히 크다.

'그래서 이렇게, 달걀에 찍어 먹는 거지.'

재료를 식히면서, 동시에 너무 강한 맛을 달걀 특유의 고소함으로 덧씌워 먹는 것이 바로 전통적인 스키야키 먹는 법이다. 계란에 찍어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종종 들었지만, 그다지 대중적이지는 않다고 들었다.

세 번째보다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 첫 번째가 더욱 맛있는, 맛의 신선도에 민감한 스키야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첫입을 넣었을 때 느끼는 감동은, 어느 요리로도 따라오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지.'

"오! 맛있는데?"

"어머, 정말로."

"으! 마이서!"

씹으면서 말하지 마라. 봐라, 그러니까 어머니한테 혼나지.

아무튼, 몇 번 스키야키를 접해 본 경험이 있을 사장님과는 달리, 처음에는 날계란에 무언가를 찍어 먹는다는 것에 약한 거부감을 표하던 어머니와 주아도 금세 스키야키에 빠져들어 냄비 속 내용물을 비우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많이 드세요. 아직 고기랑 야채들도 꽤 남았어요. 주아 넌 좀 천천히, 골고루 먹어라. 엄마랑 사장님 드실 고기가 없잖아."

기쁜 마음을 괜히 주아를 타박하는 것으로 숨기며, 냄비에 재료가 떨어지는 만큼 새로운 재료를 추가해 넣는다.

아무래도 고기만 쏙쏙 건져 먹는 주아 때문에 고기가 상당히 격하게 줄어들고 있지만, 뭐, 상관없다. 이럴 줄 알고 꽤 많이 사 왔으니까.

한창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슬슬 배가 차셨다는 듯 젓가락을 내려놓으신 어머니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들 덕에 잘 먹었네. 그런데, 찬혁이 네가 어디서 돈이 났기에 이런 걸 매번 사온다니?"

"그러게? 오빠 뭐 학교 다니면서 알바 뛰어?"

그 말에 맞장구를 치는 주아와, 마찬가지로 궁금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사장님. 특히 사장님은 이번에 준비해 온 고기가 얼마나 상등품인지 잘 알고 계실 테니, 더욱 깊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의문들에 별거 없다는 듯, 태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따로 알바 같은 거 하는 건 아니고, 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 한 명이 집에서 도축 공장을 해서요. 걔 통해서 많이 싸게 샀죠. 대회 우승해서 받은 상금도 넉넉하고."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의 얼굴이 '아하, 그렇구나.'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내게 되물었다.

"잠깐만, 찬혁아 지금 뭐라고 했니?"

"친구 통해서 싸게 산 고기라고요."

"아니, 그다음에!"

"대회 우승했어요."

내 말을 이해한 일행의 표정이 경악에 휩싸였다. 내가 기대한 그대로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큽, 크키힉!"

그제야 내 속내를 꿰뚫어 본 것인지 어머니가 허탈한 목소리로 날 타박한다.

"얘는, 엄마 간 떨어트릴 일 있니? 그런 걸 왜 진작 얘기 안 해? 애당초 대회는 또 뭐고?"

"왜, 학교 대회반에 들어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거기서 참가한 대회가 있는데, 우승했어요."

"아니, 미리 말을 했어야 뭐라도 준비를 해놓지! 어휴."

"죄송해요. 그냥 좀 놀래켜 보고 싶었어요. 축하야 받을 만큼 받았고, 엄마 덕분에 학교도 다니는 거잖아요."

"얘도 참……."

남자는 커도 애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내 경우는 이상하게 나이를 먹을수록 장난기가 어릴 때보다 더해가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생활에 여유가 있던 덕분일까.

내 말에 놀라 할 말을 잃고 있던 사장님과 주아도 드디어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다.

"내가 알기로 최근 국내에서 열린 요리 대회는 하나뿐인데, 찬혁이 너 설마……."

"아마 생각하시는 게 맞을걸요? 어때요, 저도 제법 하죠?"

"아니, 제법 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지 않냐?"

나름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짓는 사장님에게 웃음을 돌려주자, 사장님은 놀랍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날숨을 뱉었다.

"허……."

"와, 그럼 오빠. 혹시 이것도 오빠야?"

"응?"

그때, 마침 떠올랐다는 듯 주아 녀석이 핸드폰을 두드리더니 영상 하나를 띄우고 내게 보여주었다. 한 장면에 멈춰 있는 동영상. 어딘가 익숙한 실내 구조에 주아가 재생한 영상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상천 호텔이지? 그거 나 맞아."

"진짜? 이거 한창 핫했던 건데. 이 사람 시청자랑 저거 다 주작이라고 난리 치던 분탕들이랑 키배 오지게 나서 되게 유명해졌거든. 왠지 닮았다 싶긴 했는데."

이후로도 주아는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루 한정 판매된 환상의 메뉴라든지, 여기서 원 레시피 제작자 허가 없이는 추가 판매 계획은 없다고 못 박아서 난리가 났다느니, 당사자인 나조차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얘는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애당초 벌써 세 달 가까이 지난 영상을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총주방장님이면 만드는 법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총주방장님까지 가지 않더라도, 나와 함께 고생했던 선배 두 분도 알고 계실 것이다. 그걸 굳이 팔지 않겠다 단언한 것은…….

'…… 에이, 아니겠지.'

나를 위해서? 그럴 리가 없다. 기업의 수익 창출 욕구라는 게 그렇게 만만히 볼 건 아니니까. 공짜로 저만큼 홍보가 됐다면 이용해 먹는 게 당연한 일이다.

물론 레시피를 만든 건 나지만 권리가 딱히 나에게만 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레시피에는 저작권이 없으니 그걸 쓴다고 태클을 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혹시라도 나를 생각해서 그런 판단을 한 거라면, 그거 참.

'조금은, 나도 커졌다는 건가.'

이미 한 분야에서 정상에 가까운 자리에 있는 셰프가 나를 존중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하게 간질간질한 기분이 든다.

'아, 그러고 보니.'

중국 셰프 하니 생각났다. 중요한 건데, 깜빡할 게 따로 있지.

나는 방으로 돌아가 가방 안에 있던 서류 하나를 챙겨왔다. 이전, 효민 선배에게 듣고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 가서 준비한 법정대리인 동의서다.

그것을 어머니에게 내밀자, 어머니는 이게 무엇이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이번에 상금 말고도 상하이 푸드 엑스포 여행권을 받았거든요. 방학 때 열리는 행사라, 아마 학교 선생님들이 인솔해서 가게 될 것 같은데 출발 전에 여권 발급받으라고 해서요."

"어머, 정말?"

어머니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것만 써주면 되는 거니? 더 필요한 건?"

"나머지 준비물은 미리 다 준비해놨어요. 그것만 써주시면 제가 알아서 다 할게요."

"우리 아들, 벌써 자기 앞가림을 다 하네. 기특해라."

"하하……."

나이 40 가까이 된 놈이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 큰일 난다.

아무튼, 이걸로 중요한 건 대충 처리된 것 같다.

"뭐야, 오빠만 혼자 해외여행이야?"

"여행이 아니라 공부하러 가는 거다. 공부하러."

"으엑, 공부를 굳이 해외까지 나가서 해야 돼?"

"공부하는 데 시간, 장소가 무슨 상관이야."

"와, 오빠가 그런 말 하면 진짜 되게 안 어울리는 거 알지? 얼굴은 사람 몇 담근 것처럼 생겨서."

사장님이 선물로 사 온 과일을 으적이며 깝죽대는 녀석을 쥐어박을까 말까. 손을 꼼지락거리다, 이내 그만두고 대신 쟁반에 모아놓은 접시를 넘겼다.

"됐으니까 이거나 싱크대로 옮겨놔. 오빠가 차린 거 잘 먹었으면 설거지 정도는 직접 해라."

"싫은데……."

"아, 다음부터 고기는 안 먹겠다고?"

"아뇨. 아닙니다. 제가 다 해놓겠습니다."

순식간에 시키지도 않은 냄비까지 차례차례 옮기기 시작하는 주아의 모습에, 어머니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작게 웃었다. 역시, 집이 참 좋다.

"흐음……."

내가 그런 감상을 느끼고 있을 때, 사장님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 눈을 감고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이윽고 눈을 뜬 사장님이 결심했다는 듯 내게 말한다.

"찬혁아. 혹시 내일 무슨 일정 있니?"

"내일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딱히 대답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내일은 그냥 집에서 좀 쉬다 저녁 버스 타고 기숙사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니까.

잠시 뜸을 들인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사장님은 마침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찬혁이 너 내일 가게에 한 번 들리지 않을래?"

"예?"

이건 좀 뜬금없는 소리였다.

"왜요? 저 짤린 거 아니었어요? 하루 알바라도 시키시게요?"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와 봐."

"뭐예요. 싱겁네. 몇 시에 갈까요?"

"바쁜 시간만 피해서 와. 대충 알지?"

"뭐…… 알죠."

이유는 좀 알려주고 오라 가라 했으면 좋겠다. 가긴 가겠지만.

대화를 끝낸 사장님은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보시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자리를 파할 생각이신가보다.

"오늘은 잘 먹었다."

"뭘요. 저야말로 와주셔서 고마워요."

"녀석. 말은 잘 해요."

날 보며 한 번 씨익 웃은 사장님이, 이내 고개를 돌려 어머니께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덕분에 호강하고 갑니다."

"덕분이랄 게 있나요. 전부 찬혁이가 알아서 한 거죠."

"하하, 그게 다 어머님께서 이 녀석을 똑바로 키워주셔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서로 끝을 모르고 거듭 고개를 숙이는 두 분. 대체 얼마나 저럴지 짠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이내 사장님 쪽에서 먼저 걸음을 뒤로 물린다.

"아, 이제 정말 가봐야겠네요. 아무래도 시간이 좀…… 아아, 배웅 안 나오셔도 됩니다. 앉아 계세요. 찬혁아, 이만 가보마. 주아도 잘 있으렴."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남긴 사장님은 혹여나 우리가 같이 따라 나갈세라 걸음을 서둘렀다. 미처 인사할 틈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몸놀림이었다.

"거 참, 뭐가 그리 바쁘다고."

사장님이 닫고 나간 문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학교에서도 주말에 곧잘 하던 아침 운동 겸, 사장님의 가게에 들르기 위해 나왔다.

적당한 츄리닝에 운동화. 날씨도 꽤 더워진 차라 반팔을 입었는데도 한바탕 달리고 나니 꽤 몸이 후끈거렸다.

집과 가게를 왕복하는 길을 따라 아침 햇살을 즐기며 조깅을 하던 도중, 그곳이 눈에 들어왔다.

"……."

사장님이 돌아가셨던, 그 가게.

어제 소방관이 다녀간 흔적인지, 가게와 그 뒷골목 쪽에 몇 겹의 폴리스라인이 설치되어 통행을 막고 있었다.

다행히 실제로 화재가 난 것은 아닌 듯 무언가 불탄 흔적 따위는 없었지만, 그 광경에 작게 가슴이 아려온다.

뛰던 발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중, 내 옆으로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의 수다가 들렸다.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인 것일까. 채소 등이 한가득 담긴 에코백을 들고 걷는 두 아주머니가 수다거리로 삼은 화제에 나도 모르게 귀가 쏠렸다.

"어머머, 여긴 왜 저런 게 쳐져 있대?"

"말도 마. 어제 소방차에 경찰차에! 아주 그냥 큰일 날 뻔했다니까."

"큰일이라니?"

"아니, 왜 여기가 지어진 지 오래돼서 도시가스 말고 가스통 받아서 쓰잖아? 아니 근데 밤새 쥐가 뜯었는지, 고양이가 뜯었는지 가스관에 구멍이 났다는 거야 글쎄!"

"정말로?"

"정말이래도!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자기 소방관 친구가 말하길 하마터면 어제 가게가 홀랑 탔을 수도 있었대! 그런데 누가 일찍 신고해 준 덕에 불나기 전에 해결했다는 거 보면 여기 할머니가 살 팔자였나 봐."

내 근처에 멈춰 이야기를 나누던 아주머니들은 몇 분을 더 떠들다 자리를 비웠다.

그 말을 들은 내 입에서 작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가스관?"

신고할 때 가스 냄새가 난다느니, 타는 냄새가 난다느니 이래저래 둘러대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원인 불명이라더니, 고작 그런 이유였나.

어이없는 소리였지만, 여러 해 살면서 사람이 꼭 그럴듯한 이유로만 떠나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나였기에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여기 할머니가 살 팔자였다는 소리는, 맞는 말이네.'

그 한마디가, 괜히 기억에 남았다. 살 팔자. 하하, 살 팔자라.

"한 명 팔자 정도는 피게 했네."

만약 사람에게 팔자라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 친다면. 적어도 오늘, 한 사람의 운명은 바꿀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다.'

회귀 전, 돼먹지도 못한 인종 차별주의자 놈의 정치질로 무너졌던 내 팔자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단단히 뿌리를 내린 기분이 들었다.

***

"응? 벌써 왔냐?"

그 일이 있은 뒤, 조금 더 달려 가게에 도착한 나를 본 사장님이 살짝 놀란 눈치로 말했다. 반가움과 어색함이 반반씩 섞인 표정에 한창 들떴던 기분이 쭉 내려앉는다.

'아니, 지금 누구 덕분에 이렇게 가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걸 어떻게 안다고.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벌컥 열어젖힌 문을 매가리 없이 닫으며 투덜댔다.

"사장님이 한 번 들르라면서요. 조깅 삼아 이 근처 뛰다가 마침 아침 개장 준비하실 시간이라 와봤죠."

"허어. 너 요즘 그런 것도 하냐?"

"사장님도 짬짬이 운동 좀 하세요."

"일도 힘든데 운동까지 하면 나 진짜 죽어."

"운동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오래 살 걸요."

그렇게 농담 섞인 대화를 나누다가, 사장님이 갑자기 나를 자리에 앉히더니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못하게 하던 탄산음료를 따다가 내게 따라줬다.

"웬일로 이런 걸 다 주신대요? 평소에는 아깝다고 못 마시게 하시면서."

"인마,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몸에 안 좋아서 안 주는 거다."

"운동도 잘 안 하시는 분이 무슨 건강 타령이에요. 아무튼, 잘 마시겠습니다."

"이 녀석이…… 그래, 잘 마셔라."

평소처럼 잔소리라도 하시려는 듯 말을 끌다가, 곧 어물쩍 넘기는 사장님의 모습에 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때, 사장님은 잠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웬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는 다시 나왔다.

온통 새까만 흑단목 상자. 두 뼘이 채 안 되는 크기다.

대체 무엇인가 싶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사장님이 그것을 내게 밀었다.

"열어 봐라."

"뭔데요?"

"일단 열어 봐."

이쪽을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사장님.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며, 일단 시키는 대로 상자를 열어 본 나는, 이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어때, 괜찮지?"

상자와 대비되는 하얀색 비단 위에, 상자와 같은 고급스런 먹빛을 뽐내는 칼집과 손잡이. 손에 쥐기 쉽게 팔각형으로 깎인 손잡이는 어찌나 마감이 잘 됐는지 윤기가 흐를 정도로 매끈매끈하다.

조심스레 들어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지 않게끔 걸어주는 멈치못을 뺀 뒤, 천천히 칼집을 벗겨내자 드러나는 손잡이부터 친 파도를 그려낸 듯 이어진 촘촘한 물결무늬. 면도날이 부럽지 않을 만큼 세심하게 갈린 20여cm 길이의 은빛 칼날 위로 부딪친 한여름의 아침 햇살이 산란한다.

내 손에 들린 것은 바로 식칼이었다. 그것도 그냥 기성품이 아닌, 공방에서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야 하는, 척 보아도 수십만 원은 가볍게 호가할 고급 셰프나이프.

"사장님. 이건 무슨……."

"잘 봐라. 그거 네 거야."

"예?"

그 말을 듣고 칼로 눈을 돌리자, 과연. 식칼의 손잡이 바로 위 칼몸 부분에 달필로 쓰인 세 음절의 한자.

류찬혁柳璨奕.

크게奕 빛나라는璨 뜻을 담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고민하여 지어주신, 내 이름.

그것을 본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눈으로 사장님에게 시선을 향했지만, 사장님은 여전히 내게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뒤, 사장님이 입을 열었다.

"원래는 네가 그 학교에서 1학년을 마칠 때 종업 축하 선물로 주려고 미리 준비한 거다.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어엿한 도전자가 된 기념으로 말이다. 근데, 대회에서 수상까지 했으니 이미 발을 들인 수준은 옛적에 넘었을 것 아니냐."

"……."

대신 그걸로 지난 생일선물이랑 대회 우승 선물은 퉁 치는 거다.라고 말하며 작게 웃는 사장님의 옆모습을, 나는 잠시 말을 잃고 쳐다봤다.

"아무튼, 비싼 칼이니 조심해서 쓰고, 그렇다고 너무 아끼지도 말고. 결국 칼은 소모품이니까. 들리라고 한 이유는 그게 다다. 이제 일해야 하니까 어서 가봐. 고생했을 거 아니냐. 너도 쉬어야지."

자신도 어색한 듯 어딘가 퉁명스런 말투로 말하는 사장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 좀. 주려면 잘 주시던가요. 왜 좋은 거 주고 분위기를 다 망치고 있어요."

"뭐 인마?"

내 핀잔에 고개를 홱 돌린 사장님이, 나를 보며 흠칫 놀랐다. 아마 그렇겠지. 나는 아마 지금, 태어난 뒤로 가장 밝게 웃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요. 잘 쓸게요."

이전에는 존재조차 몰랐으나, 지금은 내게 주어진 이것.

내 마음속 어딘가에, 칼로 후빈 듯 새겨진 2020년 7월 25일이라는 글자 위로 작은 빗금이 그어졌다.

처음에는 너무도 작아 기별도 되지 않던 빗금은, 겹치고, 또 겹쳐져, 어느새 그보다 더욱 커다란 글자가 되어간다.

2020년 7월 25일이 아닌, 2020년 7월 26일이란 글자로.

슬픔의 흉터에서, 기쁨의 훈장으로.

날짜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언제고 지나가고, 반드시 그다음이 오는 법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도 늦게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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