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그 곰이 대회를 끝내는 방법.-2-
"5점…… 이요?"
『그래, 5점. 미리 말해두겠다만, 이것도 대다수의 팀 중에서는 좋은 점수다.』
진강태의 이마에 족히 5미터는 될 거리를 두고도 훤히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핏대가 선다.
하지만 루이스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런 진강태를 향한 너털웃음이 가득했다.
찬혁이 보기에, 그 광경은 꼭 고양이가 곰을 향해 털을 세우는 모습 같아 우스웠다.
"어째서 그런 점수를 주신 거죠?"
본인도 여기서 더 화를 내보았자 좋을 게 없을 것임을 깨달은 것인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던 표정을 어렵사리 푼 진강태가 조금이나마 진정된 목소리로 루이스에게 질문을 건넸다.
하지만 정작 루이스는 그 질문에는 대답도 없이 혼자 큭큭대며 웃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노기 섞인 눈초리를 그에게 향하는 진강태의 행태에도 아랑곳없이 웃음을 이어나가던 루이스가 몇 차례의 헛기침을 뱉은 후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그런 걸 만들고 이보다 높은 점수를 받으려 한 건가?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짓이지.』
배도연을 거쳐 한 차례 순화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파격적인 단어들의 조합에 진강태가 눈을 부릅떴다. 간신히 진정시켰던 성난 표정이 재차 슬금슬금 얼굴을 뒤덮기 시작했다.
악다문 입 사이로 진강태의 쇳소리 깃든 말이 간신히 빠져나왔다.
"무슨, 뜻입니까?"
『정말 모르겠나? 아무것도? 감이 잡히는 것도 없어?』
마치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의미 모를 물음만 되풀이하던 루이스의 능글맞은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이라도 된 것 마냥 싸늘하게 변했다.
『그게 문제다. 자기네가 뭘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무슨……."
『조용!!』
─찌이이이이잉!!
"으앗……!"
"아오, 귀야……!"
갑작스럽게 커진 루이스의 성량을 채 담아내지 못한 스피커가 내는 찢어지는 소리에, 가만히 있던 애꿎은 학생들이 귀를 부여잡았다.
개미 기어가는 소리마저 용납하지 않겠다는 압도적인 기세에, 진강태는 벌렸던 입을 조용히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
『지금부터 내가 이 점수를 준 이유를 설명해주마.』
거기까지 말한 루이스가 이내 품속에서 자그마한 수첩 하나를 꺼내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너나 할 것 없이 그것으로 쏠렸다. 루이스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수첩을 펼치더니, 그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호텔 샹그리아, 호텔 로마냐, 호텔 레오네스, 레스토랑 메르 코발트…… 이쯤 하지. 이 이름을 알고 있나?』
"……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프랑스, 미국, 스페인 등 각지에서 유명하기로 소문난 호텔과 레스토랑 이름을 어찌 모를까.
『그럼 잘 알겠구만. 네가 사용한 레시피 대부분이 방금 말한 호텔에서 쓰였거나, 아직도 쓰이고 있는 레시피라는 걸.』
"…… 예?"
다만, 그것은 학교의 교사에게서 레시피를 받아 스스로 부족한 점을 채우며 연습해오던 진강태 본인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상하게 생략된 부분이 많다 싶었는데, 설마 그런……!'
예상조차 하지 못한 루이스의 발언에 진강태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레시피를 어떻게 바꾸든 뿌리에 있는 기법은 쉽게 바꿀 수 없어. 자네들 것도 마찬가지야. 과정 한두 개를 빼먹거나, 반대로 더 집어넣어서 아닌 척을 해봐야 거기서 거기지.』
"그럼, 점수를 낮게 준 게 레시피를 맘대로 베껴 써서 그렇다는 겁니까?"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진강태가 질문을 던졌지만, 루이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자네가 심사위원이라면 피아노 콩쿨에서 베토벤의 악보를 보고 쳤다고 점수를 낮게 줄 텐가? 전시라는 것은 결국 만든 이의 기술력과 작품성을 보는 대회지. 설령 어느 호텔의 레시피를 갖다 쓰든, 설령 내 업장의 레시피를 갖다 썼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완성만 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이보다는 더 많은 점수를 받았을 거다.』
다른 이들은 쉽게 납득 하지 못할 말이었으나, 루이스는 뻔뻔했다. 정말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디 해보라는 듯이.
『레시피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들어가는지 알고 있냐, 애송아? 너희가 만든 작품. 그래, 보기는 좋지. 하지만 코스라는 컨셉을 갖고 모든 작품을 그렇게 만든 탓에 제대로 초점조차 잡히지 않아. 코스라는 것들이 죄다 자기 자랑하기 바쁘니, 상승효과 따위는 기대할 수조차 없지.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야 단순한 기술 자랑일 뿐. 예쁘게 깎은 나사와 톱니바퀴만 모아 "내가 이렇게 잘 만든다!"하고 내미는 꼴이다.』
어디까지나 당당하고, 고고한. 말 그대로 정상에 선 요리인의 눈빛.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아직 주제를 모른다고.
『설령 어디 하나 모자란 나사와 톱니바퀴밖에 없더라도, 그런 부족한 부품을 그러모아 종국에는 예술품을 만들 수 있어야 프로다. 근데 너는 어떠냐.』
"……."
루이스는 자기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마이크를 놓았지만, 진강태의 귀에는 그 뒷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희가 만든 건, 예술품이 아닌 한 무더기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는 말이.
그가 진강태의 팀에 부여한 점수는, 작품에 대한 점수가 아닌 기술에 대한 점수였던 것이다. 아마 그의 눈에는 다른 팀의 작품도 다를 바 없었겠지. 결국, 대다수의 팀보다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끝내 말을 잃고 고개를 숙인 그를 보며, 발언의 주도권을 다시 넘겨받은 배도연이 입을 열었다.
"…… 추가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선수, 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적막한 고요 속에서 막을 내린 1차 점수 발표.
찬혁이 예상한 대로, 이변은 없었다.
***
"와…… 티비에서 본 게 약과였구나."
내게서 방금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들은 효민 선배가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1차 점수 발표가 끝난 뒤, 짐을 정리하고 대회의 마지막 경기인 라이브 결승을 보러온 참에, 마침 주어진 쉬는 시간을 십분 활용해 후배들을 보러 왔다는 선배.
나는 그런 선배가 건네준 결승용 메뉴 레시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 셰프가 한 성깔 합니다. 애들한테는 조금 관대할 줄 알았는데, 역시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아, 여기 이거, 이렇게 하면 퐁드가 좀 남을 텐데 그걸로 만든 소스로 글레이징하면 소스맛도 더 잘 배고 예쁘게 나오지 않을까요?"
"아, 그러네.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걸 쓰다 보니 깜빡했나 봐. 고마워. 그런데 찬혁이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어…… 요즘 영어 공부하려고 일부러 해외 요리사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거든요. 간단한데 유용한 레시피나 그쪽 최신 조리법 같은 정보가 종종 올라오니까 영어 공부 겸 요리 공부도 되고 해서 자주 보는데, 가끔가끔 같이 일한다는 쿡들이 올리는 글에서 봤어요."
"와, 신기하네. 다음에 어딘지 좀 알려주라."
"옙."
지금 나는 결승용 레시피를 같이 검토해달라는 선배의 부탁으로 짧게나마 선배와 어울리고 있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좀 살핀다고 뭐가 되기는 하는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선배는 특유의 감각으로 내가 건네는 얼마 안 되는 힌트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매번 참신한 발상을 생각해냈다.
'다른 2학년 선배들이 따라갈 수 있느냐가 문제기는 한데…….'
뭐, 효민 선배라면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다.
"그나저나, 1학년이 자기들끼리 팀 꾸려서 우승까지 했다는데 반응이 너무 심심한 거 아닙니까?"
아까 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우승했다는 것보다 루이스 셰프의 실제 성격에 더 놀라던 것에 살짝 핀잔을 흘리자, 선배는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에이, 우리 후배님 그게 그렇게 아쉬웠어요? 누나가 신경을 못 써줬네~! 미안해요, 미안해."
"…… 일단 손을 좀 치우시죠."
이제는 숫제 살살 등허리 부근을 쓰다듬는 손을 밀어 치워내자 눈에 띄게 울상을 짓는 선배. 하지 마라, 소름끼친다.
묘하게 간질거리는 감각이 남은 어깨를 툭툭 털어내고 있자니, 선배는 다시 손에 들고 있던 레시피로 눈을 돌렸다.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의아한 표정으로 선배를 바라보니, 선배는 눈을 레시피에 그대로 둔 채 내게 말했다.
"창민이 있잖아. 집에 와서는 맨날 새벽 늦게까지 연습하더라고. 우리 엄마가 그만 좀 하라고 계속 말리는 데도 하나도 안 듣고 그러지 뭐야. 걔가 그런 적이 없었거든. 맨날 책이랑 요리프로만 보면서, 적당히 지식으로 때워도 걔한테는 충분했으니까."
"그런데요."
"그래서 물어봤지. 왜 답지 않게 몸을 굴리냐고. 그랬더니 걔가 뭐라 그랬게?"
"글쎄요."
"머리만 갖고 해서는 도저히 못 따라갈 애가 있다더라. 히히. 그 애가 누구일 것 같아?"
걔도 참 요령이 없지? 라며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보며 웃는 선배의 시선을 피했다. 걘 또 왜 사람 부끄러워질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지.
"창민이가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하게 만든 애가 나보고 반드시 우승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당연히 믿고 있었지. 이미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는데, 더 놀랄 이유는 없잖니?"
"거 참, 그렇게 아무나 잘 믿으면 나중에 큰일 나요."
이 사람은 칭찬이라고 한 말일 텐데, 내 입에서는 괜한 핀잔만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솔직하지 못하다고 깔깔대는 선배가 쓸데없이 얄미웠다. 남매가 쌍으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
"아무나라니, 그럴 리가. 아무튼, 나도 슬슬 가볼게. 시간이 다 돼서."
시계를 살피고는 허리춤을 툭툭 털며 일어난 선배가 나와 함께 검토하고 있던 레시피 북을 흔들었다.
"같이 봐줘서 고마워. 덕분에 나도 우승할 수 있겠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네요. 선배도 잘 해요. 서로 우승한다고 말했는데 저 혼자만 우승하면 서로 어색할 거 아닙니까."
"히힛, 걱정 마셔. 이 누님이 클라쓰가 뭔지 보여주고 올 테니까. 그럼 다녀올게!"
"아, 예. 부디 그러십쇼."
자신감이 흘러넘치다 못해 폭발할 것 기세로 떠나가는 선배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찰나, 앞서 걷던 선배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아, 맞다. 찬혁아!"
"예?"
"대회 끝나고 최대한 빨리 여권 한 개 뽑아놔! 다른 애들한테도 말하고!"
"예? 그건 무슨…… 아, 선배! 말은 다 하고 가요!"
자기 할 말만 쏟아놓고 바로 다시 뛰기 시작하는 선배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날, 성심고는 두 개의 금상패를 받았다.
***
"그 사람은 결국 안 왔네."
"그러게."
잠시 후.
대회의 폐막을 알리는 시상식 자리에서 은상을 수상 중인 정찬고의 면면을 둘러보던 백예은이 꺼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와 라이브.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종목 다 은상은 정찬고, 금상은 우리 학교가 받게 됐다.
하지만 무대 위에는 전시 팀의 팀장이었던 진강태가 아닌 다른 이가 나가 대신 상패를 받으며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정찬고 일행이 모인 자리를 보았으나 그곳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딜을 좀 쎄게 박긴 했지…….'
루이스 셰프가 좀 많이 가감이 없는 사람인 탓에 혹시나 싶었지만, 정말로 크게 멘탈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설마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을 줄이야.
"자업자득이지 뭐. 처음 시비 걸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아하하……."
꼴 좋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말하는 송지영의 말에 백예은이 얕게 웃는다. 나 또한 그 녀석의 인성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실력 하나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다.
'아마 루이스 셰프가 없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왠지 모를 아쉬움에 신음을 흘리고 있을 때, 수상자들이 내려간 무대 위에서 사회자가 우리의 이름을 호명했다.
"전시 전형. 금상. 성심고. 라이브 전형. 금상. 성심고. 두 팀의 팀장은 자리로 올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른다. 어서 올라가 봐."
"어. 다녀올게."
일행의 재촉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조리복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일부러 두 개를 챙겨왔는데,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카라 위치와 소매, 앞치마 매듭 등을 꼼꼼히 점검하고 있던 내 옆에 효민 선배가 나란히 와서 섰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아래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간 우리를 맞이하는 서울시 요식협회장과 심사위원들. 그중에서도 특히 덩치가 큰 루이스 셰프가 눈에 띈다.
"위 선수는 서울시 배 U-20 전국요리경연대회에서 아래와 같은 성적을 거두었으므로 이를 수여합니다. 축하합니다. 류찬혁 선수."
"감사합니다."
팀장을 필두로 나란히 팀원의 이름이 적힌 상패를 받으며 악수를 하고 자리에 선 내가 뒤를 돌아 고개를 숙이자, 관객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도, 이제 끝이다…….'
힘든 일도 많았고, 별 이상한 사건사고도 잔뜩 꼬였지만, 그래도 무사히 마친 이번 대회. 속에 뭉쳐 있던 피로를 작은 한숨과 함께 내뱉으니 그제야 뭉친 어깨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내려가면 되나요?"
"아니, 잠깐만."
인사까지 마치고 무대 아래로 내려갈 타이밍을 잡던 나를 효민 선배가 멈춰 세운다. 왜 그러나 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효민 선배를 보던 그때,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운영요원들이 고급스런 천으로 덮인 판떼기 하나를 꺼내와 관중들에게 그것을 들어 보이자, 그 옆에 서 있던 사회자가 놀랍다는 톤으로 크게 외쳤다.
"시기가 일러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루이스 하멜 셰프의 후원으로 본 대회의 금상 수상자들을 위해 특별히 추가된 부상! 지금~공개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운영위원들이 판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내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났다.
커다란 상품권 그림이 인쇄된 스티로폼 판 위로, <상하이 푸드 엑스포 여행권> 이라 적힌 금박 글씨가 찬란하게 빛난다.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선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배, 혹시 아까……."
"응. 저거야. 운영위원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거든."
오.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는 말. 이제는 그 말에 담긴 뜻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