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그 남자가 어그로를 끄는 방법.-2-
"허억……! 후읍……!"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조리를 시작한 지 약 한 시간가량.
다른 팀원들보다 부담하고 있는 메뉴의 가짓수가 더욱 많은 백예은 혼자만을 보조하고 나선 찬혁을 대신하여 다른 두 사람의 조리를 보조하게 된 안창민은 내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마에서 조리모로 스며드는 뜨거운 땀줄기가 현재 안창민이 받고 있는 부담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고작 두 명. 원래 찬혁이가 하던 거에 비하면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숫자인데……!'
자신의 조리에 집중하면서 다른 팀원들의 조리도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 안창민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팀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저도 모르게 받아온 찬혁의 도움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의 빈자리를 맞이하고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보조가 좀 빠졌을 뿐인데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아, 죽겠다. 진짜 죽을 것 같아.'
류찬혁이라는 개인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업무량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일까.
개인이 부담하던 것을 네 명이 나누어 받았음에도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그들의 숨이 턱 막혔다.
"거의 다 했어. 조금만 더 힘내자!"
그런 팀원들의 고충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기에, 찬혁은 억지로나마 쇠하지 않은 기력을 담은 목소리로 그런 팀원들을 응원했다.
찬혁의 말대로 그들은 현재 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
조리하던 메뉴만 약 스무 가지. 중복되는 조리법도 여럿 있었고, 비교적 간단한 메뉴도 있었다지만 다른 팀들이 만드는 출품작의 평균에 두 배 가까이 되는 가짓수.
하지만 찬혁의 팀은 오히려 여타 팀들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메뉴를 완성했다. 이게 평소보다 느린 속도라는 것을 알면 다른 이들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다들 솜씨가 많이 늘었네. 내 생각이 맞았어.'
색색 가쁜 숨을 내쉬는 팀원들을 보며, 찬혁은 그 나름대로 감탄하고 있었다.
각자 늘어난 업무량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평소와 비슷한 속도. 두 달 동안 이어진 연습으로 팀원들의 기량은 그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장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안창민. 역시, 저 녀석한테는 리더의 자질이 있다.'
평소에는 전혀 해본 적 없을 팀원을 보조하는 역할.
그것은 단순히 손이 빠르고 요리를 잘한다고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넓은 시야와 메뉴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조리의 우선순위를 그 자리에서 매길 수 있는 센스.
안창민과 처음 같이 실습수업을 할 때 봤던 모습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지금의 안창민은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예상을 웃도는 성장속도였다.
'분명 엄청난 노력을 했겠지.'
찬혁의 시선이 옆에서 조리에 몰두하고 있는 안창민의 손으로 향했다.
온갖 곳에 붙어 있는 밴드 탓에 라텍스 장갑을 끼고 있는 성한 곳이 없는 손. 저 모습만 보아도 그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준기, 송지영, 심지어 노력하는 방법을 모른다며 자기 입으로 나불대던 백예은까지.
팀원 전체의 손에 나날이 상처와 굳은살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찬혁은 그런 본인들 이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런데, 어떻게 지겠냐고."
찬혁의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옆으로 작은 미소가 걸렸다.
'이 대회, 반드시 우승한다.'
메뉴가 완성되고 아스픽 처리를 하는 일만이 남은 상황.
지금까지는 그의 팀이 고생했으니, 이제부터는 자신을 몰아붙일 차례였다.
자신이 맡은 메뉴를 완성한 찬혁의 손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실리콘 페이퍼로 향했다.
***
'젠장…….'
루이스 하멜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가 왜 이딴 짓을 하고 있어야 하지?'
그는 지금 자신의 상황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땅을 쾅쾅 찍듯 울리는 소리는 그런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어찌나 싫었으면 과도하게 썬팅 된 새까만 선글라스로 가려진 루이스의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을 지경이었다.
'이런 귀찮은 짓은 딱 질색인데.'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요리경연대회의 전시장이었다.
어떻게 안 것인지, 그의 입국 소식을 들은 요리협회에서 그의 매니저를 통해 보내온 초청장. 그것을 단박에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있어서 뼈아픈 실책이었다.
애당초 그는 이런 로컬 대회 따위에 참가할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무슨 대단한 프로들이 나오는 경연이라면 모를까, 아직 제대로 일을 해본 적도 없는 꼬맹이들 대회라니?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루이스의 심정을 눈치챈 것인지, 그와 동행하고 있던 요리협회 출신의 심사위원이자 유학파 셰프로서 그의 통역을 전담하고 있는 배도연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루, 루이스 셰프.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지……?』
『아니, 별거 아니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쯧.』
그런 걱정 섞인 물음을 마치 칼로 잘라내듯 단호하게 대답하는 루이스.
그 모습에 배도연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이게 어떻게 별거 아닌 얼굴이야! 혀까지 찼으면서!'
곰 만한 덩치를 가진 사람이 저렇게 인상을 팍 찡그리고 다니니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칠 지경이었으나, 그것을 꿋꿋하게 견뎌낸 그녀가 다시금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 루이스 셰프가 보시기에 이번 대회 수준은 어떤 것 같으세요? 다들 학생치고는 제법 모양새가 갖춰진 것 같은데요.』
점점 들어차기 시작한 관객들을 피해 사방에 전시된 접시들을 본 배도연이 감탄을 담아 말했다. 실제로 그녀가 이제껏 본 작품들은 다들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아도, 무엇하나 콕 집어 감점을 줄 만한 접시는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의 의견은 그렇지 않았다.
『흥, 다 거기서 거기요.』
어딘가 잔뜩 심통이 난 것 같은 그의 발언에 배도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반론을 표했다.
『그래도 아직 학생이잖아요…… 학생 수준에서 이 정도면…… 』
『이 업계에서 나이를 따지는 게 가장 의미 없는 짓이지. 고객이 언제 틴에이저 쿡이 만든 요리라는 이유로 맛도, 볼품도 없는 음식에 돈을 더 얹어주기라도 합디까?』
『아, 아니요…… 』
제대로 심사할 생각이 있기나 한 건지, 눈으로 보며 채점을 해야 하는 전시 심사에 임하면서도 선글라스조차 벗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애당초 이 대회 자체가 학생 대회잖아요!'
라고 반박할 용기는 아쉽게도 그녀에게 없었다. 솔직히, 그녀도 그의 옆을 따라다니고 싶지는 않았지만, 루이스가 이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게 된 것도 반쯤은 그녀 탓이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협회의 지인을 통해 루이스가 한국에서 장기 체류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의 매니저를 통해 초청장을 보낸 것이 다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런 짓을…….'
유학 생활 동안 루이스의 팬이 되었던 그녀의 팬심에서 일어난 작은 헤프닝이었고, '루이스 셰프가 받는 대회 초청장이 한 해에 수백 장은 될 텐데, 설마 정말로 오겠어?'라는 생각에 협회는 허가를 내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루이스가 정말로 그 제안을 승낙해 버렸다.
그 소식에 협회에는 바로 비상이 걸렸고, 책임의 소재를 따진 결과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던 배도연이 그의 에스코트를 담당하게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 소식에 좋아 죽으려던 도연이었으나, 그와 직접 대면한 이후 날이 가면 갈수록 물 밖에 꺼내놓은 생선처럼 죽어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루이스를 향한 팬심이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멀리서 보면 희극이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티비 화면 너머로 본 루이스라는 사람은, 강단 있고 능동적인 상남자 카리스마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으나, 바로 옆에서 함께 지낸 이 남자는 말을 가리지 않으며 옹고집 하나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폭한이었다.
하지만 루이스라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의는 거의 없이 대부분 타의로 참석한 대회였기에, 고등학생들이 만든 작품 따위를 감상하며 심사하고 싶은 생각이 들 리가 만무했다.
'나보고 하이스쿨 애송이들이 만든 요리를 심사하라고? 과학, 수학 올림피아드 심사를 아인슈타인과 폰 노이만한테 시키는 거랑 뭐가 다르다는 건지!'
누가 듣기라도 했다간 깜짝 놀랄 발상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에 틀린 점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 좋게 말하면 자부심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오만한 남자였다.
『…… 』
『…… 』
그런 짧은 대화 뒤에 찾아온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전시된 작품들을 살폈다.
배도연은 들고 다니던 채점판에 각각의 작품들에 대한 채점사항을 꼼꼼히 체크 했으나, 루이스는 보는 둥 마는 둥 쓱 보고 앞서 걸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거의 끌려다니는 듯 루이스의 뒤를 따르던 배도연. 그러던 그때, 그녀는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선 루이스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아얏!"
주방일로 단련된 돌덩이처럼 탄탄한 등판에 대비할 새도 없이 안면으로 충돌해 버린 그녀가 코를 어루만지고 있자니, 웬일로 루이스 셰프가 앞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배 셰프. 저건 뭐지?』
『아, 예?』
함께 다니며 그가 먼저 질문을 건네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깜짝 놀란 그녀가 코를 어루만지는 자세 그대로 되물었다.
그러자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어딘가를 가리키는 루이스. 그 손을 따라 배도연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던 것은, 전시장의 중앙에 몰린 관객들이 웅성대며 핸드폰이나 카메라 따위로 무언가를 촬영하는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본 배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한다.
『어…… 아무래도 관객 여러분이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흠…… 흥미롭군. 우리도 한 번 보러 가세.』
『아, 예? 잠시만요, 셰프. 아직 안 본 작품들이…… 셰프?!』
배도연의 호소 섞인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걸음을 옮기는 루이스.
그 파천황적인 행보에 목 끝까지 솟아오른 울분을 간신히 삼킨 배도연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물샐 틈 없이 몰린 인파의 끝에 도착한 두 사람. 배도연이 길을 막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길을 열 동안, 루이스는 미국 미식축구계의 손실이라 불리었던 그 특유의 피지컬로 인파를 열어젖히며 나아갔다.
"잠시만요! 심사위원입니다! 심사가 있을 예정이오니 잠시만 비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례할게요!"
"꺄악! 뭐, 뭐야?!"
"아니 누가 이렇게 사람을 밀치!…… 아, 어…… 쏘, sorry? 지나가세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간신히 다다른 전시작 앞에서 두 사람이 재회했다.
한 명은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이 살짝 너저분해졌고, 한 명은 멀쩡한 상태였지만.
겨우 제정신을 되찾은 배도연이, 이내 그녀 앞에 있던 작품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우와, 이건……!"
3층 계단 형식으로 배치된 테이블 위에 깔린 고급스런 벨벳 테이블보.
단마다 층층이 놓인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접시에 장식된 작품은 그야말로 예술 그 자체였다.
마치 자그마한 보석 세공품처럼 반짝이는 요리들이 함께 장식으로 놓인 어여쁜 꽃들마저 무색할 정도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대단해! 이게 학생이 만든 작품이라고?"
심사를 시작한 뒤로 보았던 작품 중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배도연이 손에 들린 채점표와 전시 공간 옆에 서 있는 표지판에 적힌 숫자를 대조하며 이 작품을 만든 학교의 이름을 찾았다.
"정찬고! 과연, 정찬고 쯤 되면 정말 수준이 다르구나."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조리특성화 고등학교 중 하나인 정찬고의 이름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루이스를 돌아봤다.
『어때요, 루이스 셰프? 이 작품은 정말 훌륭하지 않나요?』
『…… 』
'우리나라 학생 수준이 이 정도는 된다고!'라는 마음을 담아 던진 질문이었으나, 정작 그 루이스는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조금 더 인상을 찡그린 것 같았다.
그 반응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그녀였으나, 루이스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흥, 좀 볼만한 게 있나 싶었더니.』
그런 의미심장한 말만을 남긴 채로.
『루, 루이스 셰프?!』
깜짝 놀란 배도연이 서둘러 그 뒤를 따른다. 다행히 이번에는 배운 것이 있어 루이스의 등에 바짝 따라붙었기에 아까 같은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지?'
하지만 루이스는 그 의문에 답해 줄 생각은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그때였다.
"와아, 이거 진짜 개쩐다……."
"여기 청소년 대회 아니었냐? 이걸 학생이 만들었다고? 에이, 교사가 만든 장식이겠지!"
그들이 뚫고 나가던 인파의 반대편에서 솟구치는 환성!
커다란 외침에 놀란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다.
『저기도 뭔가 대단한 게 있나 본데요? 어디보자, 저 위치면 정찬고 맞은편이니까…… 』
채점판을 살피던 그녀가 이내 루이스에게 말했다.
『아! 저기가 성심고 부스네요!』
『성심고?』
루이스가 어디선가 들어본 낯익은 이름에 호기심이 일어 되묻자, 배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 작년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에서 활약한 안효민 학생을 아시나요? 그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요.』
『아, 그녀라면 나도 압니다.』
세계적인 푸드쇼인 만큼, 셰프인 루이스와 배도연 또한 그 프로그램의 애청자였던 덕분이다. 안효민이라는 이름을 듣고 호기심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물었다.
『한 번 보러 가시겠어요?』
『…… 좋소. 그럽시다.』
배도연의 제안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윽고,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간 두 사람.
그렇게 작품 앞까지 도달한 그들의 앞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M, monster?!"
"와!"
단아한 상아색 비단 테이블보 위에 놓인 옻칠 반상.
빽빽하게 놓인 유기그릇들의 중심에서 튀어나온 다섯 마리의 괴수가, 절로 오금이 저리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