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그 남자가 어그로를 끄는 방법.-1-
"뭐야? 왜 그래?"
"……."
내 발언에 화들짝 놀라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일행의 시선을 느끼며, 손에 들린 레시피 북을 읽고 또 읽었다.
이 강렬한 기시감. 군데군데 살짝 다른 부분도 있고, 전시용 레시피라 생략된 곳들도 많지만, 확실하다. 이건…….
'기성 호텔 레시피야. 최소 5성급이다.'
년 단위로 발간되는 서적 중 호텔 레시피 북이라는 것이 있다.
각 호텔이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등에서 이미 오래전 폐기한 철 지난 레시피를 모아 집필한 책. 회귀 전. 한창 호텔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던 시절, 십 수 권에 달하는 그 책들을 종이가 헤지도록 읽었더랬지.
적어도 두 시즌은 묵혀두던 요리의 레시피를 공개함으로써 '우리 호텔은 이렇게 대단한 요리를 만듭니다!'라는 홍보를 겸하여 있으나 마나 한 부수입을 목적으로 발간되는 책이지만, 실제 업장에서 쓰였던 레시피를 공부하기에는 그만큼 좋은 책이 없었다.
'이것저것 골라서 짜깁기한 코스이긴 해도, 분명해. 내가 한 번씩은 봤던 것들이야.'
새우와 관자에 감자퓌레를 더한 아뮤즈 부쉬amuse─bouche.
랍스타를 살코기는 물론 껍질까지 남김없이 이용하여 만든 비스크bisque.
수비드한 연어를 껍질까지 바삭하게 구워 무순과 래디시로 장식한 연어스테이크.
기름 속에 넣어 오븐에서 구운 오리 다리를 사과 퓌레 소스로 마무리한 콩피confit.
도톰하게 썬 토마토, 모짜렐라 치즈를 발사믹 소스로 마무리한 카프레제.
마카롱으로 장식한 치즈케이크.
과육을 파낸 오렌지 속에 아기자기하게 잘라낸 과일들을 채운 모둠프루츠.
'영리해. 누가 짰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고심 끝에 낸 라인업이야.'
기억에 남은 레시피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메뉴만이 모여 있는 레시피 북. 잘도 이렇게 모았다고 절로 감탄이 나왔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 레시피들은 적어도 몇 년은 지난 뒤에야 레시피 북에 실리는 것들일 텐데.
'잘못 봤을 리는 없어.'
아무리 자잘한 변화가 있다고는 해도 지금 당장 만들라면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익혀둔 레시피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호텔 등지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중인 레시피를 꺼내온 것이 틀림없다.
나는 믿고 있었다.
지금 내 팀원들과 나라면, 탑티어의 프로가 아닌 이상 질 가능성은 없다고.
그런데 상대가 다름 아닌 그런 탑티어의 프로라면?
'물론 만드는 사람이 프로는 아니지만, 문제는 종목이 전시라는 건데…….'
잠시 레시피를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일행들이 그 레시피 북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우와, 이거……."
"견본대로만 나오면 볼만하겠다."
화질이 좋지 못한 흑백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화려함.
레시피 북에 적힌 메뉴들의 진가를 알아챈 아이들이 신음을 흘린다.
"으음……."
"그, 그래도 우리가 준비한 것도 만만치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
어떻게든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밝은 모습을 연기하는 송지영이었으나, 곧바로 안창민이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니, 찬혁이 말이 맞아. 그렇게 쉽게 볼 일이 아닌 것 같다."
"내 생각도 그래."
나에 이어 안창민과 백예은까지 그렇게 말하자, 송지영의 얼굴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든다.
"그,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선 중요한 건, 지금 우리는 전시 대회를 하고 있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송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전시 전형의 채점 방식은 심사위원 점수가 8할, 관객 점수가 2할이지. 내 생각이지만, 우리랑 정찬고에서 각각 준비한 메뉴가 레시피 북에 적힌 퀄리티대로 나온다면 심사위원 점수는 막상막하일 거야."
"문제는 관객 점수지."
내 말을 이은 안창민의 지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객 점수가 문제라니…… 심사위원 점수가 같으면 관객 점수도 똑같은 거 아냐?"
"그게 그렇지가 않단 말이지."
명확한 평가기준을 기준으로 채점하는 심사위원과는 달리, 관객의 점수는 일종의 호응도다.
우리가 준비한 것은 한식 수라상. 분명 훌륭한 메뉴 선택이긴 했지만, 정찬고가 준비한 메뉴에 비하면 확연히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쉽게 말해서, 어그로가 부족해."
"어그로?"
"우리가 준비한 메뉴는 다른 메뉴보다 비교적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더 예쁜 요리야. 화려함보다는 수려함이 더 돋보이지. 근데 정찬고는 반대야."
그 말과 함께 나는 가방 속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 간단한 예상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여러 가지 색상의 색연필이 새하얀 노트 위를 무서운 속도로 달린다.
잠시 후, 순식간에 우리 팀이 준비한 메뉴 배치도와 내가 예상한 정찬고의 메뉴 배치도를 그려낸 나는 팀원들이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활짝 펼쳐 보였다.
"봐봐. 이 두 개를 멀리서 봤다고 쳤을 때, 어느 쪽에 더 먼저 눈길이 갈 것 같아?"
"아……!"
계단식 탁자 위로 깔린 벨벳 테이블보에 층층이 전시된 알록달록한 색상을 자랑하는 정찬고의 메뉴와, 나란히 놓인 옻칠 반상 위, 깊이가 있는 황동색 유기그릇에 담긴 우리의 메뉴.
그것을 대조해 본 송지영의 눈에 깨달음의 빛이 스쳐지나간다.
"알겠지?"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인 송지영을 따라 자연스럽게 말을 잃은 일행들 사이에서, 안창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
"이대로 손 놓고 구경만 하다간 질 수도 있어. 뭔가 방법이 필요해."
그 뜻에 동의한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나 또한 그 말에 틀린 게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당장 마땅히 생각나는 방안이 없었다.
'난 팀장이다. 문제가 생겼다면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해.'
조리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약 10분. 내 눈이 우리가 준비한 재료로 향한다.
'재료는 다양해. 뭐에 어떻게 쓰든 부족하지 않다.'
그다음에는 우리가 챙겨온 도구들과 주방 안에 기본적으로 준비된 것들을 살폈다.
'방법…… 방법……!'
어찌나 머리를 굴렸는지 정수리에서 김이 오르는 것 같았다.
칼, 믹서, 프로세서, 거품기, 토치, 그리고…….
"실리콘…… 페이퍼?"
찾았다. 우리에게 부족할 어그로. 그걸 충족할 방법을.
***
마침내 찾아온 9시 정각.
조리 시작을 알리는 주최 측의 방송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주방에 있던 모든 학생의 손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은 세 시간.
요리를 만드는 게 전부라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지만, 전시를 위한 아스픽 처리를 하려면 빠듯한 시간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칼과 도마, 불과 냄비, 사람과 사람.
마치 돌림노래라도 튼 것처럼 한 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소리.
10분여를 넘는 긴 시간 동안 그 소리는 결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팀이 한 곳.
"창민아, 여기 오이채!"
"알겠어!"
"다음 메뉴 완성됐어! 아스픽 좀 먼저 해서 말려놔 줘!"
"가져갈 게 거기 놔둬!"
그것은 다름 아닌 성심고의 1학년 팀이었다.
"야, 야."
"왜, 바빠."
"쟤들 좀 봐봐."
"아 진짜, 왜 자꾸……? 와. 뭐야 쟤네."
마치 그들이 있는 곳만 시간 축이 어긋난 듯 보일 정도로 다른 팀과는 한 차원 다른 재빠른 몸놀림.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는지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생물인 것 같은 유기적인 팀워크.
찬혁의 팀은 그야말로 수준 차이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에 다른 팀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지만, 찬혁과 일행은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자신들의 요리를 준비하는 데에만 몰두할 뿐이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
그리고, 그런 찬혁의 팀을 바라보는 이가 또 한 명.
"흥."
진강태.
그의 눈빛이 그들을 향한다.
'썩어도 안효민 녀석이랑 같은 학교라 이건가. 솜씨는…… 나쁘지 않군.'
한눈에 봐도 주변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실력.
객관적으로 보아도 겸양이 낀 그러한 평가가 자신의 라이벌인 안효민 이외의 누군가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자존심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자존심마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할 정도로, 그들 개개인의 실력과 팀워크는 고작 학생 수준이 아님을 그 또한 느끼고 있었으니까.
저 엄청난 속도에도 불구하고 너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 저들의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에서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진강태는 그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없음을 재빨리 깨닫고 자신의 팀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어차피 간은 안 해도 돼! 맛보다는 색감과 형태를 만드는 거에 집중해!"
저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진강태의 눈이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오더에 힘차게 대답한 팀원들의 손이 더더욱 속도를 더한다. 그들의 대결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한편, 그런 주변의 눈길을 한 몸에 받는 찬혁의 팀은 현재…….
'주, 죽을 것 같아……!'
'연습할 때보다 훨씬 힘들어!'
절찬리 몸이 갈려 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말 없는 슬픔의 외침을 짓씹고 있었다.
***
"잘 들어. 방법이 있어."
안창민은 조리가 시작되기 전 찬혁이 팀원들에게 했던 말을 되새겼다.
"방법?"
"어. 우리한테 부족한 주목도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여준기가 되묻는다.
"그게 뭔데?"
"간단해. 주목도가 끌릴만한 무언가를 만들면 되는 거야."
"……."
"……."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그걸 누가 모르냐.'라는 뜻이 담긴 눈빛을 보냈지만, 찬혁은 꿋꿋했다.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안창민이 물었다.
"그래서, 계획은? 그렇게 자신 있는 걸 보면 이미 구상은 끝낸 거지?"
"물론이지. 전부 이리로 모여 봐."
아까 전시 예상도를 그렸던 노트와 색연필을 챙긴 찬혁이 팀원을 불러 모았다.
잠시 후, 찬혁이 새롭게 바꾸어 그린 예상도를 일행에게 보여주자, 일행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믿기지 않는다며 찬혁을 닦달했다.
"이, 이걸 정말 하겠다고? 진심이야?"
"가능한 거 맞지……?"
"와, 혁이 이런 것도 할 줄 알았구나."
"……."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는 일행을 향해, 찬혁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 믿어. 할 수 있어."
반박하고 싶어도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눈빛. 찬혁이 정말로 진지해졌을 때 보이는 모습이란 것을 이미 아는 일행은 그런 그를 보고 저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게 정말 가능하다면 분명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팀을 보고 찬혁이 말한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만들려면 이제까지 연습했던 것보다 조리 과정이 훨씬 복잡해질 거야. 아마 내가 너희를 제대로 케어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그의 시선이 안창민에게 향했다.
"창민아. 나 좀 도와주라."
"……."
"나 혼자서는 모자라. 하지만, 너라면 내 빈자리를 충분히 메꿀 수 있다. 해줄 수 있겠어?"
안창민은 찬혁이 이 팀에서 맡은 역할을 떠올렸다.
다과상 만들기와 비교적 손이 덜 가는 첩 수에 들어가지 않는 반찬류. 그리고 팀원 전체의 서포트.
생각을 마친 그가 찬혁의 시선을 곧게 마주 보며 끄덕였다.
"할 수 있어."
"좋아. 그럼 시작하기 전에 포지션 좀 재배치하자. 시간 없으니까 잘 기억해둬."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팀원들 앞에 선 찬혁이 계획을 읊는다.
간단명료한 설명을 듣고 곧 찾아올 고된 시간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일행을 보며 찬혁이 웃었다.
"괜찮아. 우리는 할 수 있어."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치는 웃음이었다.
이윽고 울리는 9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
서울시 배 U-20 전국요리경연대회.
그 장절한 싸움이 지금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