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스타트 라인.-1-
어느덧 시간이 흘러 대회를 보름 정도 앞둔 날. 교장 선생님이 3학년을 제외한 대회반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나란히 줄 선 우리를 앞에 둔 교장 선생님이 고개를 돌려 일행을 한 차례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연습이 한창인데 시간을 뺏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을 오늘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대회에 관해 전달할 사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효민아. 이것 좀 나눠주렴."
"네."
스테이플러로 박힌 인쇄물을 받아든 선배가 우리 사이를 돌아다니며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2020년 서울시 배 U-20 전국요리경연대회 참가자용 서류라는 글자가 한 면 꽉 차게 인쇄된 종이. 대충 표지를 보니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따로 안 봐도 알 것 같다.
'참가 전형이나 채점 방식 같은 거겠지.'
"자, 다들 잘 읽어보길 바라요. 모르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말에 따라 페이지를 넘기자, 역시 종이에는 내가 예상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라이브와 전시로 나누어진 참가 전형에 대한 안내.
각 전형에 따른 대회 진행 일정표와 심사 기준.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작품을 심사할 심사위원 명단까지.
"…… 응?"
잠깐만. 지금 뭔가 이상한 걸 본 것 같은데.
별생각 없이 뒤로 넘겼던 페이지를 다시 가져왔다.
심사위원 명단(예정)이라는 문장 아래로 그려진 표. 그 속에서 발견한 아주 익숙한 이름 하나.
특별 초청. 루이스 하멜 셰프.
"…… 셰프가 왜 거기서 나옵니까?"
해외 요리학교 졸업 후, 스타지에 생활을 하던 때 만난 또 다른 스승의 이름이었다.
***
"으음……."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아, 안녕하세요, 선배."
방금 있었던 간단한 미팅이 해산된 이후. 실습실에 남아 미팅 때 받은 인쇄물을 유심히 보고 있던 나를 어느새 찾아온 효민 선배가 불렀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초장부터 인상을 팍 쓰고 있다.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지."
그거 때문이냐. 나는 피식 웃으며 그 말에 답했다.
"편하게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전 이게 편해서요."
"너무 거리 두는 거 아니니?"
"누나라고 부르는 건 창민이 하나면 족하지 않아요?"
"동생한테 누나 소리 듣는 거랑 후배한테 누나 소리 듣는 건 다르다고 생각해."
거 참 대단한 논리다. 주아 녀석 생각하면 아주 이해 못 할 건 없다마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선배가 이윽고 평소처럼 표정을 풀었다.
"뭐, 농담이고. 그래서 어떨 것 같아? 대회."
"글쎄요. 좀 자신이 없네요"
"자신 없다니, 3학년이 없는 탓에 그렇게 된 거긴 해도 명색이 대회반 최초 1학년 단독 팀 출전인데, 왜 그리 패기가 없어?"
"아뇨. 그게 아니라요. 우승 못 할 자신이 없다고요."
교장 선생님이 검수해 주신 레시피에, 내가 봐도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멤버들의 기세. 거기에 더해 대회 경험은 적지만 경력 30년차인 나까지. 이 멤버로 청소년 대회에서 대상 하나 못 타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확신이 담긴 내 발언에 잠깐 어벙한 표정을 지은 선배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내가 우리 동생을 몰라봤네."
"그야 선배 동생은 따로 있으니까 그렇죠."
그리고 그 동생은 지금 지금쯤이면 이미 집에 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슬슬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조언해 주러 온 누나를 그렇게 쫓아내는 건 동생의 도리가 아니란다."
그러니까 무슨 동생이야. 지금 원래 나이 차를 생각하면 얼마나 불편한 소리인지 알고 하는 건가.
'그나저나, 웬 조언?'
딱히 생각에 없던 말에 선배가 내가 읽고 있던 인쇄물을 채가더니, 다른 페이지를 펼쳐 내게 들이밀었다.
"뭐예요?"
"전시 전형 출전자용 부스 배치도야. 한 번 봐봐."
선배가 내민 인쇄물을 받아 눈으로 쓱 훑었다.
'어차피 아까 봐서 우리 위치는 외워뒀는데. 더 볼 게 있나?'
내 기억대로, 성심조리고의 부스는 양쪽으로 나뉘어 띄엄띄엄 나란히 줄 선 부스 중에서도 가장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 있네요. 저희 학교."
손가락으로 학교 이름이 붙어 있는 부스를 가리키며 선배에게 보여주자,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 그 옆에 있는 부스 한 번 봐볼래?"
"옆에요?"
그 말에 따라 시선을 돌리자, 우리 바로 옆에 그려진 부스 위로 적혀 있는 이름 하나가 보였다.
"정찬조리고등학교? 여기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그거."
정찬고는 나도 알고 있는 곳이긴 하다.
명문 조리 특성화 고등학교로 소문난 성심고와 라이벌 관계인 학교지만, 작년에 있던 선배의 활약상 덕에 올해 들어 살짝 힘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 곳.
'실제로 올해 경쟁률도 우리 쪽이 좀 더 높았지.'
아마 내가 이 학교에서 떨어졌다면 정찬고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선배는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걸까. 그런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선배는 얕게 한숨을 내뱉으며 답했다.
"거기에 좀 귀찮은 애가 한 명 있거든. 작년 대회 때 만났던 앤데, 악연이라고 할지 뭐라 할지……."
"?"
좀처럼 말을 고르지 못하겠는지, 선배는 얼렁뚱땅 얼버무리며 말을 끝냈다.
"아무튼, 너희가 대단한 건 나도 알지만 긴장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야. 아마 그쪽에서 전시 대회에 출품하는 애들은 2학년일 테니까."
확실히. 보통 교사 라인에서 도움을 주기가 어려운 라이브 대회를 3학년이 가고, 그 반대인 전시 출품에는 2학년이. 그리고 각 팀에 1학년이 반반씩 섞여 출전하는 게 우리 학교의 전통적인 대회 참가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3학년이 없어서 1학년이 아예 한 팀으로 묶여 버렸으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1, 2학년을 섞어서 팀을 만드는 게 어떨까 싶지만, 지금 1학년 팀의 매서운 기세를 생각하면 이것도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이미 계산이 끝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저쪽은 3학년이 빠질 일이 없으니, 원래 하던 대로 2학년 팀이 전시에 나올 거란 말이야. 그래도 아직 질 자신이 없어?"
어딘가 짓궂은 미소를 지은 선배의 물음에, 나 또한 웃으며 답한다.
"요리를 나이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열 살 차이, 스무 살 차이 나는 전문 셰프들이랑 대결할 날도 있을지 모르는데, 고작 한 살 차이가 어때서요."
"바로 그거야."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대답이라는 듯 선배가 활짝 웃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설마 이번 초청 심사위원이 하멜 셰프일 줄은 몰랐어."
"아……."
이런, 일부러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선배 덕분에 잠시 머릿속에서 사라졌던 고민이 선배 탓에 다시 돌아왔다.
"너도 알지? 루이스 하멜 셰프."
"그야 알죠."
내가 그 양반 아래서 일한 게 접시닦이 1년. 스타지에 생활 2년을 합쳐 3년이다. 그 세월 동안 먹은 욕만 합쳐도 100살까지는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성질 급하고, 다혈질이고, 고집불통에 덩치는 곰 저리 가라 하는 아저씨지.'
"자기 이름을 대고 연 가게 중 미슐랭 스타를 받은 곳이 무려 다섯! 본인이 직접 오너 셰프를 맡은 업장은 무려 쓰리스타! TV에 출현이라도 했다 하면 항상 이슈를 끌고 다니는 시청률 견인기! 엄청난 사람이지?"
"예?…… 아, 아니. 맞죠. 네."
그런 사람이 우습게도 작금의 세대에서는 최고의 셰프를 꼽으라 하면 한 손에 꼽히는 엄청난 사람이라니. 세상 참 불공평하다.
'업장 중 미슐랭 받은 곳이 많은 건 그만큼 더럽게 깐깐해서 그렇고, 이슈를 끌고 다니는 건 특유의 다혈질적인 성격 탓에 일어난 사건, 사고 때문이지만…….'
대단한 실력을 가진 셰프라는 말에는 반박할 길이 없었다. 실제로 자신 또한 그에게 사사 받은 가르침에 많은 덕을 봤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대체 왜 이런 로컬 대회에 온 걸까?"
'내가 더 궁금한데.'
애당초 이 대회는 고작 고등학생들이 모여 우열을 가리는 대회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대회에 특별 심사위원을 맡아달라며 초청한 위원회나, 그걸 또 받아들인 루이스 셰프나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가 안 간다.
'무슨 약을 먹었기에 그런 생각을 한 거지?'
1학기 때는 대회에 아예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일할 때도 사적인 이야기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 사람이었기에 더욱.
한창 고민에 빠져 신음을 흘리던 내게 선배가 말을 걸었다.
"잘 생각해 보면 이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니?"
"그야 그렇긴 하죠."
루이스 셰프가 아무리 성격이 더러워도 엄청난 명성을 가진 셰프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오죽하면 회귀 전에는 그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까지 나왔을까.
'심지어 손익분기점까지 넘었다고 했던가.'
어지간한 국내 대회에서의 수상보다 루이스 셰프의 평가로 얻을 수 있는 명예가 더 클 것이다. 심지어 이건 전국구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하는 명함이 된다.
좋게 생각하자.
아무리 그 양반이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이 만든 요리를 박하게 평가하는 사람이래도 학생 신분인 어린애들한테까지 그렇게 굴지는 않겠지.
'…… 않겠지?'
솔직히 장담 못 하겠다. 다만 믿을 구석은 지금까지 해온 연습과 내가 피땀 흘려 쌓은 노력뿐이다.
"하아……."
도저히 이 상황에 이해가 가질 않아서 작게 한숨을 내쉬자, 걱정 말라는 듯 선배가 등을 두드리며 응원해 줬다.
"그렇게 자신감 넘치던 동생은 어디 갔어? 우승한다며?"
아니, 이건 응원이 아니라 놀리는 것 같다.
눈을 가늘게 뜨며 그런 선배를 흘겨봤다.
"선배는 괜찮은 겁니까?"
슬슬 가서 연습이나 하라는 완곡한 신호. 선배는 그것을 태연히 웃으며 무시했다.
"당연하지. 나도 자신이 없거든. 우승 못 할 자신이."
"하."
역시 이 선배도 대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눈부시게 웃는 선배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결국 시간은 흐른다.
구르는 수레바퀴, 돌아가는 초침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결국 하나였다. 우직하게 앞을 향해 걷는 것.
"아스픽 처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분의 젤라틴 용액이 남지 않게끔 깔끔하게 처리하는 겁니다."
─위, 셰프!
7일 전.
"한식, 그리고 한식의 정점에 있는 궁중요리에 담긴 사상은 유교의 겸허함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특유의 미학을 잃어서는 안 돼요. 과한 장식은 필요치 않으나, 볼품이 없는 요리는 그 자체로 미식의 질을 헤치게 됩니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거죠. 아시겠어요?"
─네!
6일 전.
"너희들이 대회에서 할 요리는 지금까지 해온 것들과는 전혀 달라. 전시 대회에 출품할 작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조리법은 말이 좋아 조리법이지, 과학 실험이나 마찬가지야. 한 번 만든 요리를 완전히 분해하고 다시 조립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해."
─예!
5일 전.
대회 본부에 제출한 레시피를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할 정도로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과장을 좀 보태 자기가 맡은 것이라면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4일, 3일. 2일.
그리고 마지막, D─1.
"이제까지 수고했어요. 대회 전날은 푹 쉬어두고, 대회 때 사용할 체력을 비축해둡시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대회 전, 딱 하루 동안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 기는 개뿔.
여유를 가지는 건 중요하지만, 어차피 길어봐야 반나절 동안 하는 대회. 팀장으로서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레시피를 탐독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대회 중 눈이 멀어 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그리고 드디어 D─Day.
'지금부터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대관한 대회장 앞. 나는 속속들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대회장 정문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지금부터, 내 두 번째 기회가 시작된다.'
이미 물러설 길은 없다. 내리막길을 구르기 시작한 돌덩어리는 멈추지 않는다.
박힌 돌을 빼내든, 속도에 못 이겨 온몸이 부서지든. 그 전까지는 결단코.
서울시 배 U-20 전국요리경연대회.
이곳을, 나의 스타트 라인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