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54화 (54/403)

54. 오래 익히면 맛이 없다. 너는 아니다.-5-

손으로 쥐었을 때 으깨지는 식재료를 골라보라면 무엇이 있을까.

예를 들면 지금 막 쪄낸 떡이나, 아니면 부드러운 두부. 잘 익힌 감자. 그 외에도 수많은 식재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묻고 싶다.

손으로 쥐었을 때 뭉개지는 고기를 본 적이 있는가?

"와…"

"어때, 괜찮지?"

그 고기가 지금, 내 손에 잡혀 있었다.

겹쳐 낀 목장갑과 비닐장갑 너머로 전해져오는 열기. 손을 대기도 꺼려질 만큼 뜨거운 열탕 속에서 스무 시간이 넘도록 천천히 익힌 고깃덩어리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열원이었다.

"야, 이거…만지는 느낌 장난 없는데?"

나는 비닐장갑을 끼고 진공포장 된 고깃덩어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는 김철정의 손길에서 서둘러 고기를 뒤로 빼냈다.

"조심해. 이거 거의 녹기 직전까지 익은 거야. 잘못하면 손가락 들어간다."

"아, 지건 마렵다."

"뭐래."

지건이라니, 그 만화가 완결난 지가 언젠데. 아, 지금은 아니던가.

한창 오븐을 세팅하던 양희연이 장난을 치며 여유 부리던 우리를 재촉했다.

"마, 장난 그만하고 빨리 온나."

"아, 미안, 미안."

가위를 이용해 진공포장을 살짝 뜯어낸 뒤, 그 속에 가득 들어 있던 액체를 조심스럽게 따로 담았다.

"근디 이건 뭐꼬? 포장 잘못해가 물 들어간 거 아이가?"

"아, 이거."

타당한 의문이었다.

분명 진공을 확실하게 잡았는데 포장 내부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의심할 만도 하다.

그런 양희연의 의문에 나현주가 나 대신 답했다.

"저건 바깥에서 들어간 게 아니라 고기가 익으면서 유출된 수분이야. 물이 아니라 육수 약간에 돼지기름이 대부분이거든, 저거."

"맞나."

"소스로도 쓸 수 있으니까 버리면 안 돼."

정확한 설명이었다.

그런 문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나도 내 할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나섰다.

안에 가득 찬 액체를 깔끔하게 따라낸 다음 그 속에 담긴 고기를 조심스럽게 받아낸다.

'조심…조심…'

아기를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놀린다. 단백질 결합이 풀리기 직전까지 푹 익어버린 고기는 얇은 종이 껍질 한 장으로 둘러싸인 액체괴물 같은 상태니까.

얇게 저민 양파를 수북하게 쌓아놓은 오븐 팬 위에 고기를 조심스럽게 얹은 뒤, 그 위로 꿀과 섞은 바비큐 소스를 꼼꼼하게 바르고 예열한 오븐 속에 넣는다.

"오케이. 됐다."

조원들 사이에서 풍선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장 조심해야 할 작업이 끝난 덕분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토치를 이용해 연기만 올라오게끔 불을 피운 훈연칩을 오븐 안에 같이 넣고 문을 닫는다,

"이대로 한 시간 정도 익혀주면 돼."

"왜? 다 익은 거 아니었어?"

"일부러 겉에만 살짝 태워서 색을 내주려는 거야. 그래서 소스에다 꿀도 섞은 거고."

꿀은 열에 특히 쉽게 타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살짝 첨가해 주면 겉면의 색채를 맛깔스럽게 살리면서도 살짝 바삭한 느낌이 들게끔 만들어줄 수 있다. 내 대답을 들은 김철정이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에 불붙여서 넣은 건 뭐야? 연기 엄청나던데."

"그건 연기만 나는 훈연칩. 원래 풀드 포크라는 게 그릴에서 숯의 열기로만 천천히 익히는 요리거든. 수비드로 익힐 수는 있어도 숯 특유의 훈제향은 입힐 수가 없으니까 간이 대책이지."

"아."

레시피만 있으면 아마추어라도 프로와 별 다를 바 없는 퀄리티로 만들 수 있다는 게 수비드의 장점이지만, 아쉽게도 그런 몇몇 부분만큼은 쉬이 흉내 내지 못할 때가 있다.

"후우…"

오븐의 타이머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으며 툭툭 손을 털어냈다. 자,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내 할 일은 끝이다.

"마, 이리 온나. 우리는 설거지 하께 조장님이 이 좀 써주라."

전언철회.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리며 얕게 뜬 눈으로 실실 웃는 양희연의 모습이 살짝 얄미웠다.

***

한 시간이 지나고.

오븐에서 꺼내어 가벼운 레스팅까지 마친 풀드 포크가 그 자태를 드러내자, 아이들 사이에서 가벼운 환성이 울렸다.

'상당히 잘 됐어.'

진한 갈색으로 그을린 겉면 아래로 뭉친 촉촉한 살결의 감촉. 훌륭한 일품이었다.

풀드 포크를 조리대에 놓인 널따란 접시로 옮긴 뒤, 일행을 그 주변으로 불러들인다. 이 요리에 풀드 포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려줄 시간이다.

"소스 만들어둔 건?"

"여기."

내 질문에 나현주가 조리대 한 쪽에 놓여 있던 믹싱볼을 보여줬다. 방금 수비드 한 고기에서 빼 두었던 액체와 바비큐 소스를 알맞은 비율로 합쳐 끓인 소스에서 새콤달콤한 향이 솔솔 올라온다.

"좋아, 그럼 시작한다."

아까 벗어놓았던 목장갑과 새 비닐장갑을 다시 낀 뒤, 드디어 장장 24시간 동안 익힌 풀드 포크에 손을 올렸다.

─뭉클

풀드 포크는 꽤 여러 차례 만들어 본 요리지만, 그릴에서 구워 만든 것과는 어딘가 미묘하게 다른 촉감이 손을 타고 전해진다.

'살짝 더 탱글탱글하네.'

그래도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육즙의 손실이 훨씬 적은 수비드로 익힌 풀드 포크니, 조금 더 수분기가 있겠지.

'그럼 어디…!'

망설이듯 고기 이곳저곳을 툭툭 건드리던 손을 고기 위에 얹고, 이번에는 과감하게 주먹을 움켜쥔다.

─꾸욱!

"와!"

"오우야."

그 순간 튀어나오는 탄성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 손가락이 그 두꺼운 고깃덩어리를 단숨에 쥐어뜯어 버렸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대단한 악력이라도 있으리라 착각할 것 같은 광경.

그 주체자인 나는 내 나름대로 놀라움이 담긴 탄성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오…'

이 부드러움.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지만 여전히 엄청나다. 아니, 이 정도면 이전에 만들었던 그 어떤 풀드 포크도 따라오지 못할 촉감이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뜯어낸 고기를 일행을 향해 펼쳐 보였다.

"이게 풀드 포크야. 말 그대로 손으로 당겨서pulled 뜯어 먹는 돼지고기pork 요리. 너희도 한 번 해봐."

나와 마찬가지로 손에 2중으로 장갑을 낀 아이들이 풀드 포크를 향해 손을 뻗는다. 직접 만지고, 찢고, 쪼개보며 좀처럼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들이 마치 흙장난을 하는 어린이처럼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만지작거렸을까. 거의 결을 따라 분해되다시피 갈라진 풀드 포크를 입에 넣자, 다시 한번 감탄을 내뱉는 아이들이다.

"와, 이거 뭐냐? 이 두꺼운 고기에 이렇게 간이 잘 배어 있다고? 고작 12시간 만에?"

"정확히 말하면 36시간이야. 양념은 재울 때만 배는 게 아니라 익어가면서도 배이거든."

"무신 말인지 내도 알겠다. 요컨대 조림이랑 비슷하단 말 아이가."

"정답. 단백질 결합이 느슨해질수록 그 속을 양념이 채워나가는 거지. 그래서 이렇게 깊게 맛이 배는 거야."

"나, 수비드 할 때 양념해 본 적이 없어서 그건 몰랐어."

"…그럼 대체 고기를 무슨 맛으로 먹는 거냐…?"

"간 너무 세게 하면 근손실 오거든."

"…"

"농담이야."

거 참 살벌한 농담도 다 있다.

아무튼, 이렇게 잘게 뜯어낸 풀드 포크에 아까 끓여서 살짝 식혀둔 소스를 듬뿍 부어주고, 겉절이를 하듯 골고루 뒤섞어준다.

"이제 진짜 끝이야. 다들 수고했어."

그제야 어깨에 멘 짐이 좀 가벼워졌다는 듯 얕게 숨을 내뱉는 아이들. 그런데 어쩌나, 풀드 포크가 끝인 거지 과제 할 게 끝났다고는 말 안 했는데.

"그럼 2차 요리, 시작해 볼까?"

"…뭐?"

"에이 왜 그리 놀라냐. 미리 말했었잖아."

내 발언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되묻는 우리 조원들. 그런 일행에게서 등을 돌리고 기숙사 주방에 있는 냉장고까지 걸어가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아이들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고 챙겨둔 수많은 재료가 그 속에서 나를 반긴다.

빵, 버터, 치즈, 채소, 시판 소스. 그 외에도 기타 등등.

과장을 좀 보태어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재료들을 본 일행의 시선 속에 경악스런 감정이 깃든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김철정이 더듬더듬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야, 우리 곧 있으면 점심시간 아니냐? 그건 다음에 하자, 다음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고작 그런 핑계로 이 상황을 피하려 한 거냐.

한껏 코웃음을 친 나는, 걱정 말라는 듯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걱정 마. 끝날 때쯤에는 점심 생각 안 나게 해줄게."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일행의 눈빛이, 묘하게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은 기분 탓이리라.

***

"…참 많이도 했구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과제 제출 예정일인 금요일.

종례시간을 앞두고 교무실까지 찾아와 제출한 우리 조의 과제물을 받아든 선생님이 처음 꺼낸 말은, 그런 것이었다.

척 보기에도 제법 두께가 있는 과제물. 저게 우리 조가 점심시간을 희생하고 얻은 값진 결과물이었다.

'뭐, 다들 완성하고 먹을 때쯤 돼서는 다들 신나서 먹었지만.'

애들 굶겨가며 혹사 시킨 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동안, 선생님은 과제물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우리가 적은 내용을 유심히 살폈다.

잠시 후.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긴 선생님이 제법 놀랍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풀드 포크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수비드로 그걸 만들겠단 말에 적잖게 놀랐었다만, 오늘 보여준 건 한술 더 뜨는구나. 샌드위치, 파니니, 버거, 피자, 타코…너무 빵에 치우쳐 있는 건 어떤가 싶지만, 잘 했다. 아주 인상적이야."

"아무래도 만든 거하고 제일 잘 어울리는 게 빵이더라고요."

향신료 향이 강한 고기다보니, 아무래도 밥보다는 고기와 일체감이 강한 빵이 더 잘 어우러졌다. 이건 실제로 먹어보고 판단한 것이다. 심지어 이걸로 초밥도 쥐어봤다. 결과는…썩 좋지는 못했지만.

'되게 다양한 방법으로 테스트 했지…'

그 말에 선생님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애당초 서양에서 개발된 요리니 서양의 주식에 맞춰져서 레시피가 발달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겠지. 실패작 모음도 나름 재밌게 읽었다. 실험정신은 칭찬받을만해."

솔직히 나는 좀 부끄러웠다. 주먹밥도, 초밥도 실패했으면서 그걸 넣자고 우긴 양희연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을까.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란 말인가.

고개를 푹 수그린 나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은 선생님이 과제물을 가방 속에 갈무리했다.

"정확한 점수는 성적표에 따로 나오겠다마는, 구두로나마 평가를 하자면 아주 좋은 시도였다. 아마 업장에서 실제로 쓰일 일은 없는 레시피이긴 하다만, 과제만 봐도 너희 조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지 잘 알겠구나. 기대한 것 이상이었어. 잘 했다."

"감사합니다."

거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 선생님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한 뒤 교무실을 나서 반으로 돌아오자, 내 자리에 모여 무어라 수다를 떨고 있는 조원들이 보였다.

그 자리로 다가가자 일제히 나를 향하는 일행의 시선, 적당히 그것을 흘려내며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이 쏟아진다.

"어떻게 됐냐?"

"잘 했대?"

"어, 칭찬 많이 해주시더라."

그 말을 꺼내자마자 좀 진정됐다는 듯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그 와중에도 양희연 녀석은 거 보라며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내 말이 맞다 안 카나. 그게 기냥 실패처럼 보여도 그게 다 성공의 어무이 아이겠나."

자기가 만든 부끄러움이 나한테 전가됐단 걸 알고 하는 말일까.

작게 한숨을 뱉은 뒤,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이제야 한숨을 돌렸다는 듯, 긴장감을 내려놓은 일행이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난 쟤네 조 점수 별로일 것 같대서 엄청 깐깐하게 볼 줄 알았어."

"응."

"뭐야, 어디 말하는 건데?"

대화 도중에 난입한 탓에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다.

"백예은 조. 아까 걔네 조원이던 애가 그러더라. 과제 점수 그다지 좋진 않을 것 같다고. 다른 애도 아니고 백예은 조가 그렇다는데, 어지간하진 않을 줄 알았지."

철정의 말을 듣고 백예은의 자리로 시선을 돌리니, 평소보다 묘하게 차분한 태도로 핸드폰 화면에 고개를 떨군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가만 보면 저번 주부터 묘하게 상태가 이상하다. 특유의 생글생글한 미소는 여전했지만, 이상하게 눈에 밟히는 무언가가 있다.

가만히 그런 백예은의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눈을 돌렸다.

'당장은 놔두자.'

아마 조만간 나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

그리고, 시간이 지나 중간고사를 거쳐 대회가 점점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나는 이때의 생각이 완전히 틀려먹었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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