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오래 익히면 맛이 없다. 너는 아니다.-4-
메뉴 고안, 메뉴 확정, 레시피 제작, 검토 및 수정까지.
내가 물꼬를 트자 집단지성의 힘 덕분에 회의는 일사천리로 술술 진행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회의를 끝마칠 수 있었다.
'나현주가 컴퓨터를 잘 못 다루는 건 의외였는데…'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좋은 노트북을 갖고 있냐고 물어봤더니 걔네 아버지가 영상통화가 하고 싶어서 세트로 맞춘 거란다.
요즘 핸드폰 성능이면 영상통화 하는 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것 같은데, 얼마나 대단한 영상통화가 하고팠기에 이런 노트북이 필요했던 걸까.
'이게 플렉스인지 뭔지 하는 그건가.'
말이 좋아 플렉스지 솔직히 말해서 과소비 아닌가. 그게 다 불장난의 원인이다 이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ppt정리는 내가 맡게 됐다. 직원 스케줄을 작성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의를 일단락 맺은 우리들은 적당히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다, 저녁을 먹은 후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주말을 즐겼다.
가끔 나현주가 동생들과 같이 나온 누나 취급을 받은 것만 뺀다면 큰 사건은 없었다. 본인은 울상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주말 중 하루를 즐겁게, 또 하루는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다시 돌아온 월요일.
선생님이 조례가 끝난 후 각 조의 조장들을 불러 모았다.
"하나씩 받으세요."
─네.
선생님이 나눠주신 용지는 언젠가 받아보았던, 익숙한 종이였다.
'이거, 대회반 입부 시험 치를 때 받았던 것 같은데.'
인쇄물은 전날 대회반 입부 시험에 앞서 작성했던 레시피 작성지였다.
'하긴, 이게 이 학교에서 가장 보편적인 양식이니까 재료 신청을 하려면 이거에 적어 내는 게 편하겠지.'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과제 제출 전날. 목요일 조례가 끝나기 전까지 그 서류에 각 조가 만들 메뉴의 레시피와 필요 재료를 작성해서 가져오세요. 조례 때 제출하면 그날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어떤 재료든 대부분 준비할 수 있을 테니 참고하세요."
혹시 종례 때 제출하면 그다음 날에나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선생님이 웃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했다.
'레시피는 이미 완성해서 쓰고 제출만 하면 되는데…'
지금 재료를 받아놔 봤자,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기에 우리 레시피는 조금 무리가 있다. 조원들도 그건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언제 모여서 실제로 조리를 할지도 정해놓은 상황. 지금 재료를 받아봤자 냉장고에 박아둘 뿐이다.
'그럼 레시피만 제출하고 나중에 날짜를 맞춰서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마치고 선생님에게 날짜를 맞춰 지급 받아도 되는지 여쭤보니, 당연히 괜찮다고 흔쾌히 수긍했다.
'음, 역시 별 문제 없나보네.'
"그럼 오늘 종례 끝날 때 제출하겠습니다."
"오. 류찬혁 학생 조는 벌써 레시피 구성이 끝났나요?"
"예. 주말에 조원들끼리 모여서 회의했거든요."
"좋네요. 성실한 학생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기대할게요."
"넵."
그렇게 조례를 마무리한 뒤 찾아온 짧은 쉬는 시간. 대체 언제 온 것인지, 어느새 나를 마주보고 앉은 백예은이 내게 투덜댔다.
"혁이네 조는 벌써 메뉴 구상 끝났어? 우리는 아직인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너도 빨리해. 과제는 벼락치기 할수록 빡세."
"같이 하자고 하니까 도망쳤으면서. 수비드는 많이 해본 적 없어서 안 그래도 힘들단 말이야."
뾰로통하니 볼을 부풀린 모습에 작게 웃으며 답했다.
"뭐, 너도 곧잘 열심히 하잖아. 그렇게 노력하면 잘 되겠지."
"에이, 너무 비행기 태운다. 헤헤."
"아니, 난 꽤 진심인데."
얘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요식업계에 매진했는지 알기에 나온 작은 조언. 하지만 백예은은 그런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작은 콧소리만 낼 뿐이다.
"…흐응."
"뭐야."
아까의 뾰로통한 표정은 어디 갔는지, 묘하게 서늘해진 눈초리로 백예은이 나를 살폈다.
"혁이는 있잖아, 가끔 보면 되게 신기한 거 알아?"
"신기한 거?"
"꼭, 다른 사람을 잘 아는 것처럼 대한다고 할까. 그런데 가끔 핀트가 엇나갈 때도 많고. 잘 모르겠어."
"…엇나가?"
솔직히, 지금 살짝 흠칫했다. 혹시 얘가 뭔가를 눈치챈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 내 속을 아는지 어떤 건지, 백예은은 다시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냐면 나, 노력이란 거 잘 안 하는 타입이라서.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고."
백예은은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는 백예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묘한 찝찝함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
'결국 그건 뭐였던 건지.'
그 일이 있었던 후로도 백예은은 평소처럼 사람을 귀찮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때처럼 분위기가 팍 죽어 있는 것보다야 낫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대체 뭐였던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뭐해?"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같은 주 금요일.
각자 받은 장비와 재료를 갖고 석식 이후 기숙사 주방에 모이기로 했다.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요리기에 빨리 해치워 버리자는 여론이 주세를 이뤘기 때문이다.
"재료는 다 챙겼지?"
"어, 향신료 같은 건 기숙사 주방에 있는 것만 써도 충분하니까, 이것만 챙기면 돼."
내 손에는 냉장고에서 꺼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고깃덩어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뭐, 사실 오늘 할 거라고 해봐야 양념하고 재워놓는 게 전부지만.'
무려 2kg이나 되는 돼지 통 목살. 이놈이 우리를 모이게 한 이유였다. 양념이 고기 속까지 깊게 배어들게 하려면 한두 시간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최소 12시간은 필요했다. 우리가 지금 모이자고 한 것 또한 주말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양념에 재우기만 하면 끝이랬지?"
"어. 하는 건 간단한데 기록 같은 거 하려면 다른 사람 도움도 필요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김철정을 재촉하며 방을 나섰다.
…
……
잠시 후. 터벅터벅 지하로 내려가 주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느새 도착한 것인지 이미 대부분의 준비를 끝마친 양희연과 나현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양념만 간단히 할 거니까 그냥 평상복으로 와도 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리복까지 깔끔하게 챙겨 입은 모습이었다.
"굳이 조리복 안 입어도 된다니까. 어차피 기록 하는 것도 해봐야 10분도 안 걸릴 텐데."
그런 논조로 툭 핀잔을 던지니 양희연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답한다.
"니도 그렇게 입어놓고 말이 많다."
"그야 난 직접 조리를 해야 하니까 그렇지."
"우리도 그냥 편해서 입은 거야. 어차피 오늘 빨아야 되니까."
"…그럼 나만 그냥 옷 입고 온 거네."
"아."
그러고 보니 얘한테도 조리복 입지 말라고 내가 그랬었지. 괜히 동떨어진 느낌을 받게 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뭐, 어차피 금방 끝나니까. 빨리빨리 하고 가자."
내 말에 다른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걷어붙이며 작업을 시작하려 하던 그때, 노트북을 키고 자료를 입력하겠다고 나선 철정이 녀석이 내게 질문을 건넨다.
"야, 찬혁아. 이거 요리 이름 뭐랬지?"
그 말을 들은 내가 대답했다.
"풀드 포크. 잘 기억해놔."
풀드 포크pulled pork. 당겨서 뜯어 먹는 돼지고기. 그게 우리가 만들 메뉴의 이름이다.
***
미리 말한 대로, 그날의 일은 굉장히 간단하게 끝났다. 내가 고기 전체에 바를 럽을 만들 동안 나현주가 목살에 붙은 지방과 근막을 제거해주었다.
'조리복을 입고 온 게 좋은 선택이었지.'
적당한 식감을 위해 적정량의 지방을 남기면서도 입에서 걸릴 근막을 제거하는 것은 숙련되지 않으면 조금 힘든 감이 있는데, 나현주는 여봐란듯이 단숨에 작업을 해치웠다. 역시 조별과제의 캐리머신이 될 것이라는 내 예상은 정확했던 것 같다.
나현주가 고기를 처리할 동안 나는 굵은소금, 통후추, 갈릭 파우더, 어니언 파우더, 파프리카 파우더, 흑설탕, 말린 허브, 그 외 기타 향신료 등을 직접 갈아 럽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럽을 꿀과 올리브 오일로 잔뜩 버무린 고기에 골고루 묻혀서 진공포장 한 것이 바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것이다.
"이제 이걸 수비드로 익히기만 하면 되는 거지?"
"맞아. 뭐, 익힌 다음에 오븐에서 살짝 마무리를 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낮 10시. 철정이 적당히 숙성이 끝난 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드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진짜 그 큰 고기가 고작 그 온도에서 익는 거야?"
"된다니까, 이게."
"아직 잘 모르겠네…"
아직 이해가 부족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철정이었지만, 조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인지라 적당히 된다는 설명 말고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뭐, 모르겠으면 직접 해보면 될 일이지."
나는 미리 세팅을 마친 수비드 머신을 책상 위에 올렸다. 주방에서 해도 됐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니만큼 우리가 보고 있지 않는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항상 곁에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장비가 좋다는 거야.'
만약 저가형 기계였으면 시끄러워 잠도 못 잤을 텐데, 학교에서 대여해준 장비가 굉장히 고가에 속하는 저소음 제품인지라 그럴 걱정은 없을 듯했다.
74도. 23시간. 세팅은 충분했다.
이제 진공포장 한 고기를 넣어주기만 하면, 기계가 알아서 물을 순환시키며 최적의 온도에서 오랜 시간 동안 꼼꼼히 고기를 익혀주겠지.
'요리는 장비빨이란 말도 괜히 있는 건 아니야.'
한창 현역일 시절, 그런 논리를 펼치던 선배의 말을 되새기며 실실 웃자, 김철정이 얘가 왜 이러나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시간이 열 시니까…'
아홉 시가 되면 끝날 것이다.
수증기를 피워올리며 물속 깊이 잠겨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보던 중, 문득 어제 백예은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나는 회귀 전에 사석에서 백예은을 본 적이 있다. 그 녀석한테는 사석이고 나한테는 공적인 업무 자리였지만.
회귀 전 본의 아니게 이래저래 교류가 생기고 몇 차례 보았던 백예은의 행동거지가 이상할 정도로 지금과 똑같다는 걸 깨달은 것은 얼마 전이었다.
사람의 행동거지라는 것이 본래 점점 성장해가며 조금씩은 변하기 마련인데, 백예은은 이상할 정도로 변한 것이 없다. 내 기억 속에 남은 미래의 모습과 지금 백예은의 모습을 비교할수록, 그 의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대체 뭐지…'
어제, 백예은이 내게 보여주었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꼭, 꾸욱 눌러 쓰고 있던 가면이 한순간 벗겨진 것 같은 서늘한 무표정.
그 표정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를 일이었지만, 한 가지. 그 녀석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것은 있다.
"노력하는 방법을 모른다…웃기시네."
나는 알고 있다. 그 노력가 백예은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74도의 열탕 속에서, 차가운 살덩이는 점점 열기를 자신의 품에 받아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