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52화 (52/403)

52. 오래 익히면 맛이 없다. 너는 아니다.-3-

톡으로 계획을 짜고 하루가 지난 토요일.

3시 이후에 시간을 잡자는 말을 듣고 우리는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바깥에서 회의하고 저녁이나 먹고 들어올까?'라는 기획 아래 일정을 짰다.

어차피 서로 기숙사를 쓰는 사이인데 그냥 기숙사 주방에서 만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실습 난이도가 올라간 참이라 또 주방에서만 있기는 싫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었기에, 결국 나 또한 그 의견을 수렴하여 장소와 시간을 조율, 이렇게 바깥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입학한 뒤로 집 오갈 때 빼고 바깥 나온 적이 없었네.'

공부와 대회 대비, 그 외 기타 등등.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덕분에 2~3주마다 한 번 정도씩 집에 들릴 때 말고는 도통 바깥을 나온 적이 없었다. 철정이 녀석이 좀 놀러 나가는 건 어떻겠냐며 물어볼 때도 계속 다음으로 미뤘었고.

"사람이 좀 바깥도 나오고 해야 돼. 맨날 기숙사, 주방, 기숙사, 주방. 가끔 집. 얼마나 쓸쓸한 인생이냐?"

그래서일까, 적당한 봄나들이 옷을 입고 햇볕을 만끽하는 김철정의 얼굴이 해맑다. 공감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솔직히 내가 또 그렇게 아웃도어 스타일은 아니라.

오히려 바깥에 나갈 때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옷을 입지.' 같은 생각이 앞서는 전형적인 안방통수다.

'움직이는 건 일만 해도 충분한데 휴일에도 쏘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하루 평균 걸음이 최소 1만보를 넘어가는 직종에서 일하던 나다. 휴일에는 그냥 집에서 과자나 먹으면서 남은 스케줄 정리나 요리 공부를 하든가, 아니면 정말 가끔씩 아는 얼굴들이랑 술자리나 즐기는 게 전부였다.

'…… 다시 생각해 보니 술 말고는 지금이랑 별다를 것도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이 정도로 사교성이 없었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적어도 한국에 있을 시절에는 먼저 날 불러주는 친구들도 많았다. 성 셰프 업장에서 일할 때도 휴일마다 종종 선배들이랑 어울렸고.

…… 일 관계를 제외하면 사적인 친구가 없던 거 아닌가? 하는 암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람이 좀 바쁘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렇다고 넘어가자. 아무튼 지금은 나름 동년배 친구들끼리 과제 회의 겸 놀러 나온 것 아닌가. 당장은 좋아졌으니까 앞으로 더 잘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철정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살폈다.

슬슬 네 시에 가까워지는 시각. 곧 있으면 다른 둘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다.

시내에서 적당히 큰 대형마트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주소까지 찍어 줬으니 알아서 잘 도착하겠지.

앞서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마냥 다른 둘을 기다리고만 있기도 좀 그랬기에 아무거나 대충 주문하기로 했다.

"내가 가서 주문해올게. 넌 뭐 마실 거야?"

"나는 아이스 카페모카. 그냥 쌩 아메리카노는 못 마시겠어."

아마 나중 가면 단맛 빠진 커피 아니면 도무지 못 버틸 때가 올 텐데.

카페인의 필요성을 절절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알겠다며 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

"어."

그렇게 카페 2층에서 내려와 카운터로 가는 도중, 카페 출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전자벨 소리. 누가 들어왔나 보다 하고 한 차례 힐끔 쳐다본 내 눈에 들어온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

"응? 니 여깄었나? 마 도착했음 도착했다고 톡이라도 하든가. 톡방은 만들어가 뭐에 쓸라 그러는데?"

양희연이었다.

"어?"

"뭐꼬?"

솔직히 한 번에 못 알아볼 뻔했다.

하얀색 원피스에 베이지색 얇은 자켓. 평범하게 차려입은 것 같은데 옅은 구릿빛 피부와 묘하게 대비되어 눈에 확 들어왔다.

얘도 인물은 타고 났구나 하는 감상을 남기며 적당히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왔냐."

"어."

카운터를 향하던 내 옆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양희연. 뭐가 들었는지 모를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어깨에 맨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건넨다.

"마침 주문하려고 내려왔는데. 너도 같이 주문하지 그러냐."

"그르까? 아, 현주 가도 슬슬 다 와간다 캈으니께 가한테도 전화 함 때려보께."

"그러자 그럼."

카운터 저편에서 주문을 기다리던 점원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양희연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나 됐을까. 생각보다 짧게 통화를 끝낸 양희연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메리카노 뜨뜻한 걸로 해달라 카네."

"그래? 너는?"

"내는 요거트스무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내가 카운터로 다가갔다. 점원은 아직까지도 처음 지어 보이던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보면 신기하다. 나는 그냥 웃는 것도 솔직히 조금 힘들 때가 있는데.

그런 괜한 생각을 떨쳐내고 점원에게 음료를 주문했다.

아이스카페모카, 핫아메리카노, 요거트스무디. 그리고……

"에스프레소. 이렇게 네 잔 주문할게요."

"주문 감사드립니다. 진동벨 울리시면 가지러 와주시면 되세요."

"예."

점원이 건네주는 진동벨을 받아들고 몸을 돌리자, 날 기다리던 양희연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낸다.

"에스프레소? 니 그런 거 마시나?"

질색팔색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양희연의 모습에 괜히 무안해졌다. 그런 거가 뭐냐, 그런 거가.

"…… 마시면 안 되냐."

"내는 그리 쓴 거는 못 먹겠다. 그런 거 마시믄 잠은 어야 잘라꼬?"

하긴, 스무디를 시키는 걸 보면 단 걸 좋아하는 타입인 거겠지. 그렇다면 에스프레소의 그 깊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억지로 납득시켜 가며 대충 대꾸했다.

"적당히만 마시면 못 잘 것도 없어. 그냥 취향이야, 취향."

"하이고 마……."

거의 민트초코 먹는 사람을 보는 민초 혐오자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양희연을 외면하며 적당히 자리로 돌아갔다. 한창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탓인지 옆에 앉을 때가 돼서야 고개를 드는 김철정. 녀석이 내 옆에서 따라온 양희연을 보고 놀란 눈이 된다.

"뭐야, 언제 왔어?"

"지금 왔는데."

"주문하러 갈 때 마침 들어오더라. 나현주 거까지 같이 주문하고 왔어."

덤으로 계산은 내가 했다. 커피값은 알아서 주겠지.

우리 맞은편 자리에 앉은 양희연은 더 말도 없이 챙겨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무어인가 하고 보고 있으려니, 딱 봐도 꽤 고가로 보이는 얇고 넓은 노트북 하나가 떡하니 튀어나왔다.

"오."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하얀색 노트북의 모습에 깜짝 놀란 우리. 분명 간단하게 회의만 하자고 한 것 같은데, 이 거창한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와, 우리는 그냥 노트랑 필기도구 조금 챙겨왔는데."

그런 김철정의 말대로, 적당한 공책에 볼펜 몇 개 챙겨온 우리랑은 장비부터가 달랐다. 대단하단 시선으로 노트북을 꺼내든 양희연을 보고 있자니, 녀석도 고개를 저어 보이며 자기도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이거 내 거 아니다. 현주 가가 회의 때 쓸 노트북 미리 가방에 챙겨놨다고 부탁해가 가져온 거지."

"이거 나현주 거였어?"

"맞다. 아, 찬혁이 니 이거 선 우에 꽂는지 아나?"

"어. 알아."

"그라믄 좀 해봐라. 내는 잘 모르겠다."

그 말에 따라 가방에 동봉되어 있던 전원선과 마우스를 각각 알맞은 곳에 꽃았다.

'마우스는 또 무선 마우스네.'

앉아 있던 소파 아래 붙은 콘센트에 전원 코드를 연결하고 있자니, 벌써 준비가 끝났는지 진동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녀올게. 준비 좀 하고 있어봐라."

"어, 다녀와."

그렇게 말하며 진동벨을 집어 들고 내려가는 양희연.

사실 준비랄 것도 없지만. 남의 노트북을 멋대로 열어보기도 좀 그러니.

적당히 서로 보기 편한 위치에 노트북을 세팅 해놓고 양희연이 올라오길 기다리기도 잠시,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에 그쪽을 바라보니, 단차로 가려진 계단 너머로 누군가의 머리가 얼핏 보였다.

무언가 익숙한 두상에 혹시나 싶어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방금 내려간 양희연과 지금 막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나현주가 나란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앞서 걷는 건 양희연이었는데 먼저 보인 건 오히려 나현주라니. 새삼 저 둘의 신창 차이가 크게 다가온다.

흰색 오픈 숄더 티에 검은 탱크톱. 빡빡한 스키니진을 입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나현주. 키도 큰데다 팔다리가 길쭉길쭉해서 그런지 무슨 모델인 줄 알았다.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더플백을 무슨 종이 쇼핑백 다루듯 들어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는 녀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응, 안녕. 미안, 좀 늦었지?"

"별로? 딱 시간 맞춰 왔네."

애당초 카페 안에 걸린 시계도 아직 4시를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시간을 잘 지키는 조원…… 이게 옳게 된 조별과제의 모습이지.'

약속한 시간에 잘 모이는 조원들만 있어도 조별과제는 반은 먹고 간다.

내심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그래도 조 하나는 괜찮게 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사람도 다 모였겠다 회의 한번 시작해 보자."

자리에 앉은 애들에게 하나씩 서로가 주문한 음료를 나누어준 뒤,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한 우리. 가장 먼저 꺼낸 화제는 다름 아닌 메뉴의 구성안에 대한 것이었다.

"수비드에 대한 설명은 어제 선생님이 되게 자세하게 해주셔서 당장 그쪽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아직 이해 잘 안 되는 사람 있어?"

"아니. 난 대충 이해했어."

"내도."

"좋아."

고개를 젓는 나현주까지 확인을 끝낸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력이 좋은 팀이다.

"그럼 일단 메뉴를 정해야 하는데…… 수비드라는 게 다시 보면 그냥 단순히 익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조리법이 굉장히 한정되거든."

"확실히, 맞는 말이야."

턱을 괸 채 수긍하는 나현주의 대답.

알지 모르겠지만 날것으로 무언가를 먹는다는 조리법은 보통 동양에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서양에도 식재료를 반쯤은 날것으로 먹는 조리법이 의외로 많다.

'카르파쵸라던가…… 저번에 세비체도 그런 경우고.'

일단 수비드를 한다는 것은 그런 메뉴는 깔끔하게 빼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메뉴적 다양성도…… 솔직히 많다고는 못하겠어."

"당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거래 봐야 수비드로 고기를 먼저 익힌 다음 스테이크 식으로 굽는 거고. 어제 실습한 것처럼."

나현주의 그런 넋두리에 이번에는 김철정이 나를 보며 대꾸한다. 어제 내가 했던 말이다.

그 문답을 잠자코 듣던 양희연이 한마디를 보탰다.

"그라믄 기냥 스테이크로 하는 게 낫지 않나?"

"그게 가장 확실하고 편한 방법이긴 해."

"하지만 재미가 없다. 그거지? 어제도 그렇게 말했고."

"바로 그거야."

인상적이지 않다는 것. 그게 우리의 고민이었다.

선생님이야 그냥 적당히 부담 없이 해도 괜찮다 했지만, 기왕 하는 거 최선을 다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

각자 자세를 잡고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우리.

고뇌에 빠진 신음만이 가득하던 일행 사이에서, 양희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라믄 이건 어떻게 생각하나? 반대로 생각하는 기라, 반대로."

"반대로?"

반대로 생각하다니, 이건 무슨 소리인가.

"수비드 기법이 안 쓰이는 요리들을 수비드로 만들게끔 재해석을 해보는 기다."

"수비드를 쓰지 않는 요리?"

"왜, 저짝에서도 차슈라고 있다 안 카나. 고놈은 원체 삶고, 굽고, 졸여서 맹그는 것인디, 이런 걸 수비드로 해보믄 어떻겠노?"

오, 괜찮은 지적이었다. 수비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만큼 오히려 참신한 시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일까. 이 말에는 나현주도 동의하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은 것 같아. 응."

"수비드 기법으로 익힌 재료로 메뉴를 만들기보다, 수비드 자체로 메뉴를 하나 만들던가, 아니면 그걸 소재로 2차 요리를 만든다는 거지?"

현주도 철정이도,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다. 과연, 그럼 이걸로 대전제는 대충 정해진 것 같은데……

"그럼 생각해 보자. 원래 조리법에 수비드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게 뭐가 있을까?"

"우리나라로 치면…… 족발이나 수육?"

"중식에는 동파육이나 오향장육 같은 것도 있어."

"아니믄 생선 조림 같은 것도 있다."

다들 자신의 특기 분야에서 하나씩 생각나는 것을 꺼내든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조금 더 곰곰이 생각했다.

'보자…… 양식 같은 경우에는…… 비프스튜처럼 고기를 넣고 같이 끓인다거나, 아니면 바비큐처럼 그릴에서 오래 굽는 식으로…… 어, 바비큐?'

문득, 머리를 스치는 이미지가 하나.

하지만 아직 살짝 흐릿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뭔가 단서 같은 게 있다면 단박에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

"와, 오빠.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여기 빵 되게 맛있다!"

"그치? 너 맛있는 거 먹여주려고 인터넷 추천 글 올라온 거 엄청 뒤졌다니까?"

'아 씨, 뭐야. 좀 조용히 해라.'

그때였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뭔가 보일 것 같은데, 갑자기 초를 치듯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집중을 깨트린다.

대체 무엇인가 하고 잔뜩 짜증이 서린 얼굴로 소란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니, 왠 커플 하나가 서로를 껴안고 부둥부둥 재잘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씁…… 왜 카페에서 저 난리들이야.'

여기가 무슨 독서실처럼 반드시 조용히 해야 하는 곳은 아니라지만, 기본적인 에티켓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대체 왜 저러는 것인지 그들이 앉은 테이블을 살피자, 왠 커다란 빵 덩어리 하나가 귀퉁이가 뜯겨나간 처량한 모습으로 접시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아이들도 그런 목소리가 거슬렸는지 시선이 다들 그쪽을 향해 있었다.

"뭐꼬."

"뭐 대단한 걸 먹었다고 저러냐……."

"뜯어 먹는 식빵 같은데? 안 자른 거."

한마디씩 보태는 아이들에게 우리 할 일이나 하자며 말하려다가, 작게 귀에 들려온 신경 쓰이는 코드가 하나.

'아, 그거다.'

내 머릿속 퍼즐에서 부족했던 한 가지가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야, 얘들아. 나 좋은 생각이 하나 났는데."

뜬금없는 나의 발언에, 아이들의 이목이 다시금 내게로 쏠렸다.

그런 일행의 시선을 받으며, 작게 웃음을 띤 내가 말한다.

"이번 과제. 뜯어 먹는 고기는 어때?"

뜯어 먹는 고기. 그것이 바로 내가 떠올린 메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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