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51화 (51/403)

51. 오래 익히면 맛이 없다. 너는 아니다.-2-

이변은 없었다.

"조장 류찬혁. 조원 김철정, 나현주, 양희연. 항상 같이하던 애들이구나."

"아무래도 편해서요."

"그래, 익숙해진 크루라는 건 편한 법이지."

평소 실습 때 항상 조를 꾸리던 아이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받고, 선생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점은 나도 동의하는 바다. 오래 손발을 맞춘 크루들의 팀웍에서 나오는 안정감은 확실히 편하기 그지없으니까.

'뭐, 트롤러만 없으면…….'

다행히 당장 우리 조는 대부분 한 실력 하는 애들이다. 서로 전공도 다 다르고. 일식에, 중식에, 고기 전문. 나 같은 경우 대부분 할 수야 있지만 개인적인 주특기는 양식이다. 일한 세월이 있는 만큼.

백예은이 같은 조 하면 안 되냐며 칭얼댔지만 이 사람 많은 반에 대회반 두 명이 같은 조 돼서 뭐 할 거냐고 대충 고사했다.

명단을 제출하고 돌아와 기다리기를 잠시.

다른 아이들도 마저 명단을 제출하자 그것을 한쪽으로 정리한 선생님이 입을 연다.

"과제는 방금 말했다시피 수비드 기법에 대해서 조사해 오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사라기보다는 실제로 조리한 내용을 정리해서 제출하는 거죠. 각 조당 하나씩 수비드 기법을 이용한 메뉴를 만들어 만들 때까지의 과정, 만들면서 느낀 점 등을 ppt로 만들어 제출하세요. 기한은 2주일 뒤. 이 시간까지입니다."

조금 기한이 짧지 않나 생각하던 찰나,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하나둘 웅성거리는 말이 나왔지만, 그런 반응에 선생님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리 과정 같은 경우 순서만 나열한 한 페이지 분량 레시피로 충분하고, 느낀 점도 짧게 몇 줄 정도만 적어와도 충분해요. 다만 이런 과제를 여러분에게 주는 것은 수비드 기법이 실제 업장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비드는 조리 시간이 길지만, 대신 조리 후 보관만 잘 한다면 그냥 날것으로 보관할 때보다 훨씬 오랜 기간 보관할 수 있죠. 그리고 이미 익은 상태이기 때문에 준비시간을 제외한다면 조리 시간을 훨씬 짧게 단축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지.'

실제로 두꺼운 고기 등을 수비드하여 급속 냉동한 뒤 보관하면 고기의 질은 크게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해동을 통해 재빨리 조리해서 나갈 수 있다.

내가 아는 미국의 한 스테이크 전문점을 예로 들자면, 그곳의 특징은 딱 봐도 두툼한 두께의 통고기 스테이크다. 평균적인 두께는 약 4cm 정도일까. 그런 것을 아무 준비 없이 팬 프라잉으로만 익히려면 적어도 레스팅까지 합쳐 수십 분은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회전률은 떨어지고, 회전률이 떨어진다는 건 매출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 때문에 이 스테이크 하우스는 수비드 기법으로 미리 익혀둔 고기를 이용하여 극한까지 회전률을 뽑아냈다.

물론 준비시간이 길기도 하고, 하루 팔 수 있는 양도 정해져 있지만, 적어도 내 기억에 있는 그 전문점은 엄청나게 성공해서 사시사철 호황을 누렸다.

"수비드로 조리하는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기법의 요점은 이것도 결국 무언가를 익히는 작업이라는 거죠. 육류든, 해산물이든, 무엇이든지요. 당장 지금 하는 것처럼 닭가슴살을 수비드로 익혀 팬에서 겉만 잘 색을 내주면 그것도 충분히 수비드로 만든 요리입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이 한 번쯤은 경험해 보기를 원할 뿐이에요. 장비와 재료 또한 확실히 지원해드릴 테니,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마무리 지은 선생님은 한창 기세 좋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수비드 머신이 들어가 있는 수조에서 닭가슴살이 든 진공팩 하나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제 건 조금 더 일찍 넣어놨으니 이제 다 익었겠죠. 제가 먼저 시연을 보여드릴 테니, 여러분도 잘 봐두도록 하세요."

선생님이 꺼내든 닭가슴살은 익힌 닭고기 특유의 새하얀 색으로 익어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60도가량의 저온에서도 충분히 익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비닐팩을 칼로 찢어 닭가슴살을 꺼내 겉으로 배어 나온 수분 등을 키친타월을 이용해 꼼꼼히 닦아낸 뒤, 그것을 팬에서 가볍게 구워내는 선생님.

끝으로 마늘과 허브, 버터 등을 넣고 닭가슴살 맛이 배어든 기름에 끓여 고기 위로 뿌려주는 아로제Arroser 기법으로 조리를 마무리한다.

"이게 수비드한 닭가슴살로 간단하게 조리한 스테이크입니다. 단면을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만 팬에서 구웠는데도 속까지 잘 익었죠? 이미 팬에서 굽기 전에 고기가 다 익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수비드 한 고기는 식감도 기존의 방식으로 구운 것들과는 굉장히 많은 차이가 생기죠."

과연, 그 설명대로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닭가슴살은 이 멀리서 봐도 굉장히 부드러워 보였다. 이쪽까지 흘러온 닭가슴살의 고소한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니, 벌써 군침이 돈다.

─삐삐삐삐! 삐삐삐삐!

그때, 마치 맥락을 끊는 듯 수비드 머신의 알람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를 들은 선생님이 손에 들고 있던 닭가슴살 스테이크를 조리대 구석으로 치워내며 말했다.

"아, 마침 여러분들 것도 다 됐네요. 그럼 지금부터 직접 만들어봅시다."

점점 식어가는 스테이크의 모습에, 누군가의 탄식이 흐르는 듯했다. 뭐, 누군지는 대충 알겠지만.

***

"맛있더라, 스테이크."

"그러게."

잠시 후, 하교한 나와 김철정은 기숙사 방에서 쉬며 방금 실습 때 만들었던 닭가슴살 스테이크를 머릿속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뻑뻑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촉촉한 수분기. 부드러운 육질. 이러저런 고기를 먹어 봤지만, 수비드를 했을 때와 다른 조리법을 썼을 때의 갭이 가장 큰 고기는 역시 닭가슴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맛을 반추하기도 잠시.

이내 몸을 돌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김철정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냐?"

"뭘?"

"과제 말이야."

"글쎄다. 보통 생각하면 아까 했던 것처럼 스테이크가 제일 보편적이긴 한데……."

"한데?"

"좀 재미없지 않아?"

무심코 나온 발언에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김철정이 별 이상한 소릴 한다는 듯 눈을 부라린다.

"재미? 뭔 재미를 찾고 앉았어."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뭐냐, 인상적이지 않다는 뜻이지. 점수 좋게 받으려면 인상적인 편이 좋잖아."

"…… 그야 뭐, 그것도 그렇긴 한데."

아마 수비드 스테이크 정도는 누가 됐든 가장 먼저 떠올릴 요리일 것이다. 바로 아까 직접 하기도 했으니 분명 그렇겠지. 다만, 그런 만큼 독창성이 없다는 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인 것이다.

"그래도 담임쌤도 적당히 부담 갖지 말고 하랬잖아."

"부담을 갖지 말란 게 생각 없이 하란 말은 아니지 않나?"

"뭐요?"

"아, 난 맞말 함."

몇 차례 연달아 말을 받아치다가 결국 서로 킥킥대며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대화.

잠시동안 이어진 웃음을 적당하게 끊어낸 나는 테이블 위에서 뒹굴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말했다.

"기왕 고민 시작한 거 우리끼리 할 것도 없지 않냐? 다른 애들한테도 한 번 물어보자."

"걔네? 뭐야, 너 번호 있냐?"

"번호는 없어도 반 단톡방 있잖아. 거기서 빼서 초대하면 되지."

"아."

생각해 보면 그랬지 하는 표정으로 자기도 핸드폰을 찾아드는 철정이 녀석. 그 모습에 괜히 실소를 픽 터트린 나는 반 단톡방 명단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찾아 새로 만든 단톡방으로 하나씩 초대했다.

─ㅇㅇ

─ㅇ? 뭐야?

─찬혁이야?

─옴

짧게 톡 하나를 올리자마자 재빠르게도 반응하는 두 사람. 오히려 내가 초대한다고 미리 말까지 해뒀던 김철정의 톡이 제일 늦었다.

'뭐 같이 핸드폰이라도 보고 있던 건가.'

아무렴 어떻겠는가. 빨리 대답하면 좋은 거지.

예상보다 살짝 빠른 대응에 조금 당황했지만, 우선 단톡방까지 새로 파가면서 부른 목적을 설명했다.

─과제 메뉴?

─ㅇㅇ 뭐 만들지 같이 생각 좀 해보자고 불렀지.

─나 솔직히 수비드는 별로 아는 게 없는데…… 좀 아는 사람 있어?

─나도 잘 모름

'흐음…… '

일단 양희연과 김철정은 별로 아는 게 없어 보였다. 하긴, 수비드는 보통 양식에서나 쓰는 것이니 상세한 조리법 같은 건 알아봤자 나나 알겠지.

'근데 문제는 나도 참신한 조리법 같은 건 잘 모른다는 건데…… '

보통 업장에서 수비드 머신을 써서 고기를 조리한다고 해봐야 그냥 적당히 소분 한 통고기에 마리네이드 좀 해서 미리 익혀두는 게 전부다. 그걸 굳이 참신하게 쓰기 위해 조리법을 조사해 본 적이 있냐면…… 딱히 그렇진 않다고 답해 주고 싶다.

결론을 내보자.

우선 적당한 지식과 경험은 있지만 참신함에는 크게 자신이 없는 나.

각자 전공에는 뛰어나지만, 수비드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한 철정과 희연.

그리고……

─나는 좀 알아.

'오.'

예상하지 못했던 캐리머신이 한 명.

과연, 이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아까 선생님과 나눴던 문답도 그렇고 평범한 학생 이상의 지식은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나저나 나현주 얘는 수비드 같은 걸 왜 알고 있는 거지…… '

수비드란 것이 애초에 평범하게 먹고 지내다 보면 딱히 손댈 일이 없는 분야인데, 아무리 도축 공장 가계의 귀한 따님이라지만 이유로서는 좀 빈약하지 않은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것인지, 양희연이 내가 궁금했던 것을 그대로 물어본다.

─너네 집 도축 공장이란 말은 들었는데, 공장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쳐줘?

─아니. 그냥 내가 혼자 공부한 거야. 종종 해서 먹기도 하고.

─해서 먹어?

─닭가슴살이나 소고기 같은 거. 냉장고에 있는 것들 소모도 해야 하고. 뭣보다 단백질 보충은 중요해. 굉장히.

손으로 썼다면 그야말로 엄격, 근엄, 진지한 궁서체로 썼을 기세인 진중함이 핸드폰 화면 너머로 전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 얘, 이런 애였었나.'

점심시간의 그 탄수화물 발언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아까 초대할 때 얼핏 보였던 프로필 사진이…… 아, 역시. 혹시나 해서 다시 열어본 나현주의 프로필 사진의 배경에는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헬스장의 전경이 찍혀 있었다.

"……."

"……."

─ㅋㅋㅋㅋㅋ

적당한 초성만을 남긴 양희연을 제외한 남자 둘이 말없이 굳어 있기도 잠시, 뭐 헬스장이 취미인 여고생도 있을 수 있지 싶은 마음으로 당황스러움을 제치고 내가 앞서 애들에게 물었다.

─톡으로만 이야기하기도 뭐한데, 어차피 전부 기숙사에 사는 거 내일 만나서 이야기할래?

─내일? 난 괜찮아.

─나도.

─나도 괜찮은데, 대신 시간만 세 시 이후로 해줄 수 있어?

─세 시 이후? 괜찮긴 한데 볼일 있으면 그다음날로 미뤄도 괜찮아.

나름 배려를 담아 그렇게 이야기하자, 나현주가 괜찮다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내일 pt 받는 날이라. 한 시부터 두 시까지. 아무튼, 조금 이따가 마저 얘기하자. 지금 조깅 하러 나와 있어서.

…… 아, 그래.

이건 또 만나본 적 없는 타입이라고, 무심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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