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43화 (43/403)

43. 상천만향회.-2-

"직원용 다목적 홀까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 문을 향해 손을 뻗으며 길을 가리키고는, 발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이준 컨시어지. 일상적인 동작에서도 흠 하나 잡을 수 없을 만치 반듯한 걸음걸이를 자랑하는 그의 뒤를 우리는 마치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들처럼 열을 맞추어 따라갔다.

한, 두 해 연습한 걸로는 어림도 없는 행동거지. 이름난 호텔의 컨시어지는 패션쇼를 나가는 모델처럼 워킹까지 전문적으로 공부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낭설이 도는 이유를 알만하다.

'예전 호텔 컨시어지들도 다들 그랬던 걸 생각하면 의외로 진짜일지도.'

직원용 게이트를 지나 일반 투숙객은 들어오지 못하는 직원 전용 통로를 통해 걸으니, 주변을 지나가던 직원들이 아닌 척 우리에게 눈길을 준다.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를 보아 우리가 온다는 걸 다 알고 있었던 듯하다. 하긴, 외부 인력이 이렇게나 많이 들어오면 모를 리가 없겠지.

"저 애들이 성심고에서 현장 실습 나왔다는 애들인가?"

"다들 파릇파릇한 게 젊을 적 시절이 생각나네."

"그나저나 요즘 애들은 다들 저렇게 큰가……? 여자애가 반에서 제일 크네."

혹시나 들릴까 소곤소곤 귓속말로 대화를 하며 지나가는 카트를 끄는 아주머니 일행. 객실을 청소하고 나오는 길인지 하얀 시트가 카트 가득 채워져 있다.

"거 참. 무슨 대단한 거 본다고."

"응?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후로도 종종 들려오는 대화들을 흘려들으며 얼마간 걸었을까. 우리는 곧 목적했던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방음재로 되어 있는 두터운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간이로 만들어 둔 것으로 보이는 조촐한 생김새의 단상과 우리의 인원수에 맞춘 접이식 의자가 준비된 홀이 펼쳐졌다.

"자리에 앉아주세요. 전원이 착석을 완료하시면 마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손히 태도로 손을 뻗어 의자를 가리키는 이준 컨시어지. 그 말을 따라 다들 앞에서부터 자리를 채워 앉기 시작했다. 나 또한 뒤를 따라 적당한 자리에 착석. 옆에는 기숙사 때부터 행동을 같이한 김철정이 앉았다.

선생님은 가장 뒤에 서서 자리를 잡은 채 앉으려하지 않았다. 혹시 딴짓하는 녀석이 있을까 살피는 모습이다.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자, 출입구 옆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준 컨시어지가 단상 앞으로 나서더니, 이내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재차 인사를 하고는 단상에 있던 마이크를 집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까지 안내를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현장 실습 보조를 전담할 호텔 컨시어지, 이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그의 인사에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입을 모아 인사하자, 이준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잠시 후, 박수 소리가 멎는 것을 기다리던 이준이 말을 잇는다.

"지금부터 오늘 현장 실습 예정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중앙에서 물러나 옆에 있던 단상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가 있던 자리로 빔 프로젝터 스크린이 스르륵 내려와 딱 타이밍에 맞게 켜진 빔 프로젝터의 화면을 비춘다.

하얀 스크린 위로 커다란 원 그래프가 나타난다. 꼭 방학시간 계획표 같은 모양새다.

"화면을 주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분의 실습 예정 시간은 잠시 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50분 실습, 10분 휴식으로 시간이 배정되어 있으며 점심시간은 정오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한 시간의 식사 시간이 주어집니다.

시간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본격적인 현장 실습을 시작하기 전, 9시부터 시작하여 약 한 시간가량 본 호텔의 총주방장님이 주관하시는 이론 학습 시간이 이 자리에서 있을 예정이오니, 용변 등의 볼일이 있으신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 출입구에서 대기 중인 직원의 안내를 따라주시면 되겠습니다.

본 컨시어지의 설명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다만, 이론 학습 시작시간인 9시 5분 전까지는 자리에 다시 착석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을 끝맺은 그가 마이크를 단상 위로 돌려놓자마자, 뜨겁게 불을 지핀 난로에 뿌린 물 마냥 학생들 사이에서 소란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서로 모여들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허허 웃기도 잠시. 그런 이들과 마찬가지로 내 주변에 학생 여럿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 버스 내릴 쯤 부터 참고 있었는데. 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 건데 넌 안 가냐?"

"난 딱히 됐어."

"그럼 나 혼자 다녀온다. 어우, 싸겠어."

그렇게 후다닥 뛰어간 철정. 그 빈자리를 채 느끼기도 전에 그 자리를 채우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같은 대회반 소속이자 미래의 스타 셰프. 안창민이었다.

"뭐해?"

"뭐 할 게 따로 있겠어? 그냥 앉아 있지."

"흠……."

맥아리 없이 대꾸하니 별말도 없이 그냥 빈 옆자리에 앉는 녀석. 대체 뭔 생각인가 하고 시선을 주니 안창민은 그런 내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앞만 바라볼 뿐이다. 앞에는 마네킹처럼 미동 하나 없이 서 있는 이준 컨시어지밖에 없는데.

요즘 대회반 활동으로 비교적 친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서로 친구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관계. 녀석이 너무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한 모습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기도 잠시. 도통 모를 안창민의 의도를 대충 짐작한 내가 실실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야, 너 설마 같이 앉을 애 없어서 이리 온 거냐?"

─흠칫.

흠칫했지? 흠칫거렸지?

"아, 말을 하지. 난 또 뭐라고."

"…… 아니다."

"뭐가? 뭐가 아닌데?"

"하지 마."

"뭘? 내가 뭘 했다고."

"……."

아차, 여기까지.

조금만 더 찌르면 정말 폭발하겠네.

묘하게 귀염성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장난을 좀 쳤다. 이럴 때면 사장님이나 성 셰프한테 괜히 이상한 걸 배운 게 아닌가 싶단 말이지. 아는 어른이라곤 온통 장난기 가득한 양반들뿐이니 원.

아까보다 살짝 더 굳은 표정이 되어 버린 안창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녀석을 달랜다.

"농담이야 농담."

"……."

"허……."

아무래도 좀 삐진 것 같은데. 이건 또 어떡하나 싶은 그때.

무슨 오락실 대전격투게임에서 새로운 대전 상대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처럼 잔뜩 텐션이 올라간 목소리로 우릴 부르며 난입하는 인물이 한 명.

"혁이 여기 있었네. 찾았잖아~! 응? 창민이도 있었네? 웬일로 둘이 같이 있어?"

백예은이었다. 평소처럼 갑작스런 등장과 함께 옆에 앉아 그렇게 물어오는 그녀.

묻지 마라. 나도 살짝 당황스런 사태였다.

그런데, 난입자는 백예은 한 명만이 아니었다.

"마, 내 왔다."

"우리 왔어. 철정이는 어디…… 어라?"

쎈 언니 스타일로 사투리를 구사하며 등장한 양희연과, 익숙한 얼굴을 찾다가 오히려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굳어 버린 나현주.

내 뒷자리로 다가온 2인조가 제자리에서 멈춘다.

"……."

"……."

"뭐야, 왜 갑자기 조용해."

온 거야 뭐, 평소 학교에서 서로 대화 나누는 녀석들이 저희뿐이니 그렇다 치지만 말까지 잃을 건 뭐냐. 망부석처럼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아라.

"다녀왔…… 어?"

설상가상으로 막 화장실에서 돌아온 김철정까지.

두 명으로 시작했던 것이 순식간에 6인큐가 되어 버렸다. 고급시계 정도는 풀 파티로 돌릴 수 있겠네.

비교적 멀찍이서 그런 우리를 잠시 바라보던 김철정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나, 딴 데로 갈까?"

아니.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와서 앉으란 말이다.

…… 앉아주라.

순식간에 어색해진 일행의 분위기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

어색해진 분위기 속 서로 별 대화도 없이 자리만 지키기를 몇 분.

시간이 다 됐음을 확인한 이준 컨시어지의 알림이 우리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얕게나마 흐트러트렸다.

그 알림에 다시 자리로 돌아가 착석하기 시작하는 아이들. 하지만 내 주변으로 모여든 녀석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좀 돌아가라.

그런 생각에도 아랑곳없이 학생들이 다들 잘 착석한 것을 확인한 그가 말을 잇는다.

"현재 문 바깥에 총주방장님이 도착했다고 하십니다. 그럼, 총주방장님을 모셔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 뒤, 이론 학습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덜컥.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들려오는 문이 열리는 소리. 얼마나 관리가 잘 된 건지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 말고는 들리지도 않는다.

'지금 총주방장은 누구더라…… 나중에는 왕 씨였던가 그랬던 걸로 아는데.'

이 호텔 상천에서 일하는 요리인은 거의 대부분이 현지인으로 구성되지만, 본사 지침에 따라 총주방장은 언제나 본토에서 파견 나온 본사 임원이 맡는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내가 아는 호텔 상천 해외지점의 총주방장들은 항상 중국인들이었다.

물 건너 땅에서 일하다가 몇 번 건너고 건너 들었던 정보를 반추하고 있자니, 어느새 까만색 조리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인물이 단상에 선 것이 눈에 들어온다.

60대 쯤 되어 보이는 얼굴. 살짝 나온 배. 살짝 찐빵이 생각나는 동그란 얼굴이 인상적이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하긴, 실질적으로 주방에 선 경력을 치면 나와 2세대 정도는 차이가 나는 셰프일 테니, 아는 게 이상하긴 하다.

"안녕하세요. 성심조리고등학교 후배 여러분. 호텔 상천의 총주방장, 장 퍼치엔이라고 합니다. 장백천 사부라고 불러주세요."

"오."

이준 컨시어지가 건네준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건네는 셰프.

의외로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생각보다 우리말을 잘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이내 소형 마이크를 따로 챙긴 이준 컨시어지가 그 옆에 서서 말했다.

"장백천 총주방장님은 아직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말이 익숙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첫인사는 꼭 우리나라의 말로 하고 싶으시다며 많이 연습하셨으니, 환영의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짝짝짝짝!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네.'

솔직히, 내가 아는 중국 본토 셰프들은 자존심이 엄청나게 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중화요리야말로 식食에 있어서 가장 발전된 형태의 요리라고 하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덩어리가 바로 그들이었으니까.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중국 본토 셰프는 일종의 파랑새 같은 건데.'

마이크를 잡은 이준 컨시어지가 이후로는 본인이 통역을 맡겠다며 나섰다. 이윽고, 단상에 두 손을 올린 장백천 셰프가 중국어로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내용은 뭐, 별것 없었다. 대부분 내가 아는 내용이었으니까.

주방이 맡은 일에 따라 어떤 식으로 나누어지는지, 보통 처음 들어온 이는 무엇을 하는지, 고객을 응대할 때 지켜야 할 주의 사항이나, 주방에서 결코 집중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 등등. 일종의 상식을 교육함과 동시에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하게 될지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그런 장백천 셰프의 말에 집중하는 아이들과는 달리, 대충 논조만 이해하며 이준 컨시어지를 통한 셰프의 말을 듣던 도중,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한국이란 나라에서 식에 대한 교육을 받는 너희가 고작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중화에 담긴 사상을 이해하고, 충분히 배워갈 수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러우나, 부디 겸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받아 중화요리가 여타 저급한 미식 흉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진실로 깨우치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조리 교육을 받아온 여러분에게 반나절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중화요리에 깃든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교육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여러분이 중화요리의 특별함을 깨우칠 수 있도록 겸손한 자세로 가르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 뭐?'

잠깐 기다려라. 지금 내 귀에 저 두 사람 말이 다르게 들렸는데.

요리사의 세계에서 요리실력 다음으로 중요하게 치는 것이 회화 능력이다. 회화가 안 되면 실시간 소통이 필요한 주방에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나도 죽어라 외국어를 공부했고, 그 덕에 지금 나는 영어, 일본어, 불어, 중국어. 총 5개 국어를 단편적이나마 할 수 있게 됐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지금, 저 장백천 셰프라는 양반의 말을 이준 컨시어지가 전혀 다른 뉘앙스로 통역하고 있다는 것을.

내 착각인가 싶어 눈을 부릅뜨고 앞에 선 두 사람을 살피니. 과연, 착각이 아니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까지만 해도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짓고 있던 이준 컨시어지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으니까.

"쓰읍……."

젠장. 파랑새라는 건 동화에서만 나오기에 파랑새인 법이라더니.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솔솔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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