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42화 (42/403)

42. 상천만향회.-1-

"하아, 춥다."

"어우, 이 떨리네, 진짜."

4월의 둘째 주 금요일. 아침 7시.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방을 나선 우리. 옷깃을 파고드는 서늘한 공기에 부르르 떨다가, 이내 옷깃을 굳게 여미며 현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4월이 되고도 한 주가 넘게 흘렀는데 이놈의 날씨는 뭐 이리 춥고 덥기가 제멋대로인지, 변덕스럽기는 따라갈 녀석이 없다.

"안녕."

"어, 안녕."

"하암……! 어우,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나가던 도중, 우리처럼 좀비가 되기 직전인 얼굴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애들을 보고 힘없이 손을 흔든다. 요 몇 주간 등교하며 얼굴을 익힌 기숙사에 사는 같은 반 남자애들이다.

늘어지게 하품을 뱉으며 인사를 돌려주는 아이에게 대충 대꾸하니, 하품이 옮았는지 나도 슬슬 입이 벌어지려는 것이 느껴진다.

"어우, 하필이면 금요일이야. 좀 일찍 가면 안 되나."

"인정 쌉인정. 안 그래도 매일 실습한다고 힘들어 죽겠는데."

어느새 그 아이들과 붙어 투덜대기 시작하는 철정이 녀석. 평일 끝자락인 금요일에 하필 현장 실습을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지만, 글쎄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아니, 야. 생각해 봐."

"응?"

"거기 딱 봐도 엄청 바쁠 거 아니냐? 다녀오면 죽어라 힘들겠지? 그 상태로 주말 올 때까지 계속 등교하면 그게 더 힘들어. 그나마 오늘 다녀오면 주말은 쉴 거 아냐."

"오…… 설득력 있어."

사실 이것도 일종의 조삼모사지만.

대충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학교 정문에 다다라 있었다.

핸드폰으로 화면으로 보이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7시 10분. 20분까지 모이라고 했으니 나름 일찍 도착했다.

집합 장소인 운동장으로 가보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학생 일행과 운동장 옆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는 커다란 버스 두 대, 대충 저기로 가면 되겠다 싶어 그쪽으로 발길을 향한다.

"안녕."

"좋은 아침."

"안녕."

적당히 모여 있는 반 애들에게 한 번씩 인사를 돌리다가, 낯익은 2인조의 모습을 발견한 내 발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좋은 아침. 일찍 나왔네."

"응? 아, 난 또 누구라고."

"안녕 찬혁아."

같은 여자끼리 모여 있는데 키 차이가 20cm는 되어 보이는 애들이 이렇게 있으면 당연히 눈길이 쏠린다. 그나마 우리 반 애들은 익숙해졌으니 그렇다 쳐도, 옆에 자기들끼리 그룹을 짓고 있는 6반 애들의 눈길이 이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대충 흘려보내며 그 둘에게 손을 흔든다.

양희연과 나현주, 맨날 철정과 더불어 조를 짜다 보니 익숙해진 2인조다.

양희연은 요 3주간 나름 표준어가 늘었다. 아직 좀 어색하긴 해도 연습을 하고 있는가 보다. 좀 틱틱대는 건 여전하지만, 적어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야 훨씬 나아졌다.

나현주도 요즘은 덜 굳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긴장이 풀렸다고 할까. 학교에 익숙해진 덕분이리라.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안 추워?"

"조금 쌀쌀하긴 하네. 으으…… 좀만 이따 올걸 그랬어. 도착한 지 10분은 됐는데."

"교실에라도 들어가 있지 그랬냐."

"왔다갔다 귀찮잖아."

"그렇게 부들부들 거리면서 말은 잘 해요. 현주 넌 안 추워?"

"응? 나? 나는 별로. 아침 조깅은 자주 하니까 익숙해졌어."

"그러냐……."

가디건까지 입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양희연과, 그와 반대로 평범하게 교복 차림인데 멀쩡히 서 있는 나현주. 언제 봐도 참 닮은 부분이 없는 듀오다.

지금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하는 양희연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시간 계산을 하고 왔어야지. 아무튼, 집합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버텨봐."

─끼익.

때마침 들려오는 학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양반은 못 된다는 듯 타이밍 좋게 학교 건물에서 나오는 박예휘 선생님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린 아이들이 입을 모아 엇박으로 인사를 드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미소로 아침을 여는 선생님의 인사.

한 손에는 출석부, 반대쪽 손에는 큼지막한 더플백. 단단히 준비하셨나보다.

선생님의 등장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선생님 앞으로 모여든다.

잠시 후, 출석을 부르며 적당히 빠진 아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선생님이 출석부를 닫으며 말했다.

"다들 늦지 않고 잘 왔군요. 평소보다 많이 이른 시간에 모이라 해서 늦진 않을지 걱정했어요. 준비물은 잘 챙겨왔나요?"

─네.

선생님이 말한 준비물이란 개인 조리복, 위생모, 주방화. 이 세 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없으면 기본적으로 주방에 들어가서는 안 되니까.

이구동성으로 답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선생님이 출석을 체크하느라 잠시 운동장 잔디 위에 내려놓았던 더플백을 다시 어깨에 멘다.

"좋아요. 이제 버스에 탑승하도록 합시다. 저희가 탑승할 차량은 빨간색 줄무늬 1호차에요. 버스 앞쪽에 보시면 몇 호차인지 표시도 되어 있으니 헷갈릴 때는 꼭 확인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말을 마친 선생님이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그에 따라 나도 핸드폰 시계를 본다. 현재 시각 7시 30분. 출발할 때였다.

***

─툭. 툭.

"아아. 마이크 테스트. 여러분, 잘 들리나요?"

─네.

"잘 들리나 보네요."

현장 학습 장소로 향하는 버스 안.

얼마나 돈을 써서 대여한 건지 그 흔한 덜컹거리는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 버스의 시트에 등을 기대고 히터의 온기에 취해 있던 아이들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버스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학생들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 짓는 선생님.

가장 앞 좌석에 앉은 채 마이크를 쥐고 몸만 틀어 버스 뒤쪽에 눈을 돌린 선생님이 학생들을 부른다.

"다들 주목하세요. 지금부터 저희가 가는 업장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버스 천장에 매달린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뒷좌석에 앉은 애들은 잘 보이지 않겠지만, 앞 좌석 가까이 앉아 있던 덕분에 내 눈에는 나름 화면이 잘 들어왔다.

하얀색 바탕에 떠 있는 프레젠테이션. 그나마 잘 보이도록 전체적으로 볼트체로 쓰여 있는 글씨들에 시선이 간다.

'시간표?'

"잘 안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설명도 같이하도록 할게요. 저희가 가고 있는 호텔 상천에 대해서는 다들 조사해 봤나요?"

저번 주 금요일 종례 시간에 양식 수업 과제를 업장 조사로 대신한다고 했으니까. 다들 최소한의 조사는 마쳤을 것이다.

"여러분이 조사했듯이, 호텔 상천의 뷔페, 상천만향회上天晩餉會의 영업시간은 오후 3시부터 새벽 1시까지입니다. 점심시간에 운영을 하지 않는 대신 저녁시간 외에도 나이트 타임이 따로 있죠. 브레이크 타임은 오후 9시부터 10시. 그 이후에는 야간 개장으로 안주를 위주로 메뉴가 바뀝니다."

'거기 야간개장 유명하지.'

호텔 상천의 중화 뷔페는 맛있기로 유명하지만, 나이트 타임에만 소량으로 나오는 안주 메뉴들은 하나같이 디너 메뉴 그 이상의 퀄리티를 자랑한다며 소문이 자자하다. 괜히 vip 이외의 예약은 받지 않는 게 아니다.

'뭐, 당장 우리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

우리가 그때까지 일할 것도 아니고. 애당초 그렇게 늦게까지 학생들을 붙잡아두면 잡혀간다.

선생님도 그 이상의 설명은 딱히 할 생각이 없는지 PPT의 페이지를 넘겼다.

"우리의 현장 학습 시간은 잠시 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쉬는 시간은 있을 거고, 점심도 그쪽에서 제공 받기로 했으니 너무 길다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수업 시간에 대해서야 이미 알고 있는 우리였으나, 그에 대한 화제로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우리를 선생님이 웃으며 달랬지만, 솔직히 난 믿지 않았다.

'입에 침이나 바르시죠. 호텔 상천이 어떤 곳인데.'

상천만향회의 1인 입장 비용이 30만원을 훌쩍 넘는다는 걸 익히 아는 나다.

왜 그렇게 비싸냐고? 그 뷔페를 운영하는데 그만큼 엄청난 인건비와 재료비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초고급 뷔페라는 게 허명은 아니지.'

그곳에선 다른 중저가형 뷔페에서 쓰는 냉동식품이나 기성 양념 등을 일체 사용 하지 않는다.

전부 손으로 지지고 볶아가며 그날 들어오는 신선한 재료로만 음식을 조리하고, 남는 식재는 가차 없이 폐기하여 신선도를 유지한다. 뭐, 거기에서 식재가 남는 일 자체가 별로 없지만.

아무튼, 그런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사람 손이 엄청나게 필요하다.

덕분에 퀄리티 하나는 굉장히 빼어나고, 그만큼 장사도 잘 되지만, 갈려 나가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그 갈려 나갈 사람이 우리가 된다는 걸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다른 애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알고 있다면 이렇게 웃고 떠들고 있지는 않았겠지.

정작 나는 별 걱정이 없는데, 다른 애들이 잘 해낼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강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얘들아.

***

"여러분, 조심해서 내리세요."

호텔 상천의 직원용 주차장.

버스에서 우르르 쏟아지듯 내린 학생들이 선생님의 말에 따라 나란히 정렬했다.

뒤이어 버스가 호텔 근처에 마련된 대형차량 전용 주차장으로 떠나고 박예휘와 학생들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자, 다들 놓고 내린 것 없는지 확인합시다."

그 말에 소란스럽게 깜빡한 짐이 없나 확인하는 학생들.

잠시 후, 빠진 사람이나 분실물 없이 다들 잘 내렸다는 확인을 박예휘가 마칠 때쯤. 직원 전용 게이트가 열리며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찬혁의 시선이 그 인물에게 향한다.

보는 사람이 감탄할 만큼 티끌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검은 정장.

이쪽이 갑갑해질 정도로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반듯하게 조인 넥타이.

그러면서도 다른 이의 긴장마저 풀어낼 것처럼 서글서글한 미소가 지어진 얼굴.

고풍스런 아이보리색 무광 명찰이 눈에 띈다.

약 서른 후반쯤은 되어 보이는 낯선 이의 등장에 한곳으로 모이는 학생들의 시선.

이윽고 그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인물이, 어려도 한참은 어린 학생들에게 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오십시오. 성심고등학교 1학년 1반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호텔 상천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안내를 맡게 된 호텔 컨시어지, 이준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넓은 어깨. 반듯한 등.

말끔하고 올곧은 인상과, 학생에게도 공손한 태도에서 느껴지는 호텔의 품격.

학생들은 이때야 비로소, 그들이 정말로 실제 현장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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