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뉴 시즌.-2-
성심고에서 준비하는 교육 커리큘럼은 정말로 다종다양한. 너무 다양하다 못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돼?'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이벤트 가짓수를 자랑한다.
대충 기억나는 것을 꼽자면 농업축산 특성화고 교류 현장 체험.
프랜차이즈 업체의 강사를 초청하여 받는 창업 교육.
실제 건축업자에게서 받는 업장 건축 구상 교육 등등.
필요한 게 있다면 모조리 가르쳐주겠다는 태도로 무슨 판촉행사 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이벤트를 끼워 넣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그리고 이것.
<4월 현장 실습 계획서> 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학교 공지에 쓰인 것 또한 그런 이벤트 중 하나다.
뭐, 쉽게 말하자면 반이 통째로 바깥으로 나가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온다는 이야기다.
어떤 현장이냐고?
요리사가 쌓아야 할 현장 경험에 다른 것이 있을까.
당연히, 실제 영업 중인 업장에 우리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
아침 HR 시간. 출석 확인을 마친 선생님이 우리를 돌아보며 위의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여러분. 어젯밤 올렸던 공지는 다들 잘 읽었나요?"
─네.
"좋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제가 한 번 더 설명하도록 하죠."
분필용 칠판을 옆으로 밀어내고, 그 뒤에 있던 전자칠판의 전원을 켠 선생님이 포인터 마우스를 이용하여 학교 홈페이지를 열었다.
학교 홈페이지의 배너에 떡하니 걸려 있는 <현장 학습 요강> 이라고 쓰인 이미지를 클릭하는 선생님.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본교에서는 매년 저희와 제휴가 된 업장을 통해 현장을 실제로 경험하는 현장 실습수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학생이 한 번에 나갈 수는 없기 때문에 매달마다 나가는 반이 정해져 있죠."
포인터가 화면에 크게 떠 있는 달력을 가리킨다.
"오는 4월 둘째 주 금요일. 우리 현장 실습에 가장 먼저 나가는 반은 저희 1반과 6반으로 정해졌습니다."
'흐음…….'
4월 둘째 주 금요일이면 약 3주 정도 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일찍 가는 건 일찍 가는 것대로 앞서 경험을 쌓는 의미에서는 좋고, 반대로 늦게 가는 것도 스스로가 더 많은 가르침을 얻은 상태에서 가는 것이니만큼 더 넓은 관점에서 보고 배울 수 있으니 좋겠지.
…… 좋겠지만.
'솔직히 가기 귀찮은데.'
다닌 주방 짬밥만 합쳐서 20년을 좀 넘어가는 나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하루 이틀 주방 일 좀 뛴다고 뭘 더 배우겠는가.
그렇게 감흥을 잃은 채 선생님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도중, 다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혹시 저희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아, 그걸 이야기해 줘야 하겠네요."
그러고 또 잠시.
말을 멈추고 교탁에 놓인 컴퓨터 앞에 앉은 선생님이 자판을 몇 번 두드리더니, 이내 사진 한 장이 전자칠판에 올라온다.
'어, 저기……?'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고층빌딩.
마치 옛 궁궐의 입구를 떼어다 놓은 것 같은 특이한 정문의 생김새는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평이 자자하다.
그도 그럴게, 나도 저기가 어딘지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 이거 또 애들 고생하겠네.'
"호텔 상천上天. 이곳이 저희가 가게 될 업장입니다."
선생님의 얼굴이, 낯익은 기분 나쁜 기색을 띠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호텔 상천…… 몇 번 들어본 적은 있는 곳인데."
"그래?"
"어. 아빠가 말하는 걸 들었던 것 같아."
HR이 끝나고 1교시가 시작하기 전, 방금 선생님이 보여주었던 호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든 김철정이 턱을 괴고는 곰곰이 생각하는 시늉했다.
"어디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혼신을 담은 얼굴 개그를 선보이던 녀석이, 이내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아, 생각났다. 저기 중국계 호텔이잖아."
'오. 진짜로 알고 있네.'
호텔 상천. 원어 발음으로는 호텔 샹티엔이라고 읽던가.
아무튼, 저 호텔은 중국에서도 유명세를 떨치는 회사 산하의 호텔이다.
시장이 폐쇄적인 중국에서 해외에까지 지사를 세웠으니, 위상을 알만하다.
"우리 아빠도 예전에 가본 적 있다더라. 괜찮대, 저기 밥."
"우리는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만들러 가는 거잖아. 밥이 괜찮은지를 볼 게 아니라 주방이 괜찮을지를 봐야지."
"뭐 내가 거길 가보기를 했냐 뭐를 했냐. 어떻게 알아 그걸."
하긴 그도 그렇다며 킥킥대기도 잠시.
나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방금 막 알아낸 척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며 철정에게 말했다.
"자, 봐봐. 대충 알아봤는데 여기 되게 유명하긴 하더라."
"진짜네. 블로그 글이 뭐 이렇게 많냐."
스크롤을 아무리 넘겨봐도 끝없이 나오는 인증글의 세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녀석의 얼굴이 눈썹부터 시작하여 하관까지 점점 굳어가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하다.=사람들이 많이 온다.=바쁘다. 대충 그런 공식이 성립한다는 것을 나름 실전을 겪어 본 이 녀석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이러는 것일 테니까.
결국 질린다는 듯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젓는 철정에게서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던 손을 거둬들이고는, 옆에 앉아 핸드폰을 톡톡 두드린다.
화면을 가득 채운 포스트 중 아무거나 골라 열어보는 우리.
그런 우리를 반겨준 것은 엄청나게 넓은 홀이 찍혀 있는 사진 한 장. 창문 바깥으로 펼쳐진 야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샹들리에의 빛이 황홀하게 빛나는, 굉장히 잘 찍은 샷이었다.
다만, 요리인인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그게 아니었지만.
"야, 이거 설마……."
"어. 그거 맞아."
"…… 에이, 여기 주방이 이거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다른 글들 다 찾아봤는데도 거기 밖에 안 보이더라."
"실화냐……."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말도 안 되게 넓은 홀에 그득히 들어찬 사람들과, 그리고 그 크기에 결코 지지 않는 규모를 자랑하는 방대한 양의 음식들이었다.
"여기, 뷔페더라. 그것도 규모 한 번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고급 중식 뷔페."
"인생……."
김철정의 탄식이 교실 바닥에 낮게 깔려들었다.
'하긴.'
나도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녀석도 벌써 얼마나 힘들지 예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 차라리 그냥 평범한 주방이었으면 몰라, 하필 뷔페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일반적인 일품요리를 내가는 주방과 뷔페 주방이 서로 확연히 차이가 날 만큼 엄청나게 힘들고, 힘들지 않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뷔페 주방과 일반 주방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예측이 되고, 안 되고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일품요리를 내가는 계열의 호텔 주방은 대부분 예약제로 돌아간다. 그 예약에 맞춰 그날 하루에 쓸 재료의 양을 계산 해 준비하는 게 보통이다.
그에 반해 뷔페 주방은 몇 명이, 얼마나, 언제 올지는 알아도 정확한 식자재 양을 산출하기가 좀 곤란하다. 인원수에 비해 식재료의 소모가 많은 날도 있고, 그 반대인 날도 있으니까. 일단 고객이 있다면 뷔페 주방에서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계속 빈틈없이 대비를 해야만 한다.
즉, 똑같은 막내 직급으로 각각의 주방에 들어간다고 쳤을 때, 아마 더 힘든 쪽은 분명 뷔페 주방일 것이다.
"어쩌겠냐, 이미 정해진걸."
"하아……."
잠시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내저은 철정이 녀석이 다른 애들을 둘러본다.
우리처럼 폰으로 막 정보를 찾아낸 아이들 중 유독 눈에 띄게 풀이 죽는 일부의 아이들. 아마, 김철정처럼 일종의 예습을 뛰고 온 녀석들이겠지.
"알 만큼 아는 녀석들은 다 똑같네."
"흔히 말하는 예습반 애들이니까."
요 몇 주 사이. 서로를 잘 모르던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정해진 몇 가지 재밌는 별명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예습반'. 말 그대로 학교에 오기 전 미리 예습을 거치고 왔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별명이다.
"그것도 좀 웃기지 않냐. 예습반이 뭐냐 예습반이. 무슨 대단한 학원 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집이 요식업이라 일 좀 경험해 보고 왔다고."
"그래도 학원반 보다는 낫잖아?"
"하하, 하긴 그렇긴 하지."
학교에 오기 전 가게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으니까 예습반.
반대로 일해 본 경험은 없이 일종의 입시 요리 공부를 하고 온 애들을 학원반.
'거 참. 이맘때 애들은 이상하게 편 가르는 걸 좋아해.'
물론 이 둘이 깔끔하게 나눠떨어지는 부류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당장은 우스갯소리로나 쓰이는 말이긴 해도, 2학기쯤 되면 꽤 메이저한 단어가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우습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학교에 좀 더 빠르게 적응한 건 확실히 예습반 쪽이긴 하니까.'
그에 비해 전체적인 성적 분포를 보면 학원반 애들이 더 높다.
뭐, 사실 이거나 저거나 내 눈에는 다 엇비슷하게 보인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희미해질 분류. 굳이 나눠놓을 필요를 나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조금씩 투덜거리는 김철정에게 말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 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 다음 순번 애들이 더 힘든 업장 걸릴 수도 있어. 그리고 그나마 좀 시원할 때 가는 게 어디냐. 여름에 업장 들어갔으면 진짜 죽는 기분일 텐데."
"…… 하긴."
솔직히 말해 상천보다 막내 라인한테 더 힘든 업장이 몇 개나 되겠냐마는.
뒷말을 억지로 삼키고 웃음 섞어 김철정을 위로하니, 그제야 알겠다는 듯 인상을 피는 녀석. 그 모습을 본 나 또한 적당히 풀린 마음으로 멍하니 책상에 턱을 괴었다.
'하필 고르고 골라 뷔페라…….'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나는 묘하게 직장 운수라고 할까, 그런 게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가는 곳마다 일복이 무슨 폭격기가 폭탄 쏟아내듯 터지던 놈이었으니까.
'유학 가기 전 업장이나, 성 셰프 가게에서 있었던 걸 생각하면…….'
손님이 끝도 없이 오는 매장에서 사고가 터져 나한테만 일감이 쌓이던 게 대체 몇 번이었는지……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런 내 운수의 기미가 이때부터 점점 싹을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 뭐 어쩌겠어."
그런 걸 고민해 봐야 아무 쓸데도 없다. 어차피 손님 가려가며 요리할 것도 아닌데. 내 눈앞에 닥친 일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해치우는 수밖에 없는 법이지.
─딩동댕동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날 깨우는 학교의 종소리.
그립고도 새로운 소리가 다시 한번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려왔다.
……
……
하루하루. 또다시 찾아온 노력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꽃샘추위가 가시자 살랑살랑 찾아온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가득 쏟아지는 하늘.
봄이, 땅을 뚫고 나온 새싹처럼 수줍게 우릴 향해 얼굴을 내민다.
4월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