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40화 (40/403)

40. 뉴 시즌.-1-

"그래서, 선배. 아까 하신 말씀은 뭐예요?"

동아리 시간도 끝나고, 다른 아이들을 먼저 보낸 뒤 둘만이 남은 실습실 안.

구석으로 치워져 있던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다주고 앉으라 말하는 선배에게 감사를 표하며 일단 나는 자리에 앉았다.

"보자……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잠시 말을 고르던 선배가, 이윽고 머릿속 정리가 끝났다는 듯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보통 성심고에서 대회에 출전할 때는 팀을 두 개로 나눈다.

하나는 3학년 팀. 또 하나는 2학년 팀.

1학년은 그 두 팀의 조수로 들어가 대회의 시스템에 적응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3학년이 전원 출장을 못 하게 됐다고요?"

"응."

"아니 왜요?"

대회반에 있다면 가장 중요한 과제는 대회에 출전하는 것일 텐데,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올해에 상하이에서 푸드 엑스포가 열리는 건 아니?"

"상하이 푸드 엑스포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

몇 년 주기로 열리는 전 세계적 음식 문화 축제인 푸드 엑스포. 약 100곳가량의 나라가 참가하는 엄청난 행사다.

'올해에는 상하이에서 주최할 예정이라는 기사를 학교 신문에서 봤던 것 같은데…….'

"예. 학교 신문에서 본 것 같아요."

"신문 같은 것도 챙겨 읽는구나. 어쨌든 알면 설명할 수고가 줄겠네."

"근데 3학년 출장 불가랑 엑스포 사이에 무슨 상관이…… 아."

설마.

"혹시 저희 학교에 초청장 왔어요?"

"어머, 초청장도 알아?"

"당연히 알죠. 명색이 요리사 지망생인데."

푸드 엑스포에서 보내오는 초청장.

이른바 엑스포 메일이라 불리는 이것은 말 그대로 초청장이다.

왜, 귀한 발걸음을 옮기셔서 부디 누추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이 초청장은 세계 유수의 부호나 권력자들이 아닌, 요리인을 대상으로 발송된다는 점이다.

높은 실력을 가진 요리인들을 참가시켜 엑스포 전체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한 꿍꿍이지만, 이것은 일종의 국가적 인증서이기도 하다. '이 요리인은 우리가 손수 초청하여 모실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진 인물이다.' 같이 해석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누구한테요? 교장 선생님한테 온 거예요?"

"응. 정확히 말하자면, 작년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출전자 중 8강 이상으로 올라갔던 팀의 팀장들한테는 전부."

"그랬군요."

근데 그게 3학년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의아한 시선으로 선배를 바라보자, 선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엑스포가 원체 자주 있는 이벤트는 아니잖아?"

"그렇죠."

"그에 비해 전국요리경연대회는 년에 한 번씩은 꼭 하는 행사고."

"아."

과연. 이해했다.

"교장 선생님, 3학년 선배들을 조수로 데려가시려는 거군요."

"맞아. 이해력이 높은 아이는 좋아해."

"칭찬 감사합니다."

하긴. 푸드 엑스포도 일종의 심사 제도가 있다.

참가자들이 전시장과 시식 코스를 돌며 자유롭게 줄 수 있는 표. 그 득표순으로 수여되는 상과 명예는 그것이 설령 장려상 수준에 그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고작 한 나라에서 받는 상보다는 훨씬 가치가 높다.

요컨대 전국요리대회와 푸드 엑스포를 저울질하여 후자를 택했다는 뜻이다.

"어차피 서울시 배 전국대회는 우리가 재작년부터 계속 우승했으니까, 그쪽에선 힘을 좀 뺀다고 하시더라고. 오죽하면 나까지 따라오라 했다니깐."

"가시지 그랬어요. 좋은 기회였을 텐데."

"그게 또 힘들었던 게, 이번 엑스포랑 전국대회랑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하거든. 안 그래도 부장이 자릴 비우는데 예비 부장인 나까지 대회반을 비우면 너희는 어떻게 해."

"……."

"…… 왜 그래?"

"아뇨, 선배는 좋은 사람이구나 싶어서요."

"무, 무슨 소리야?!"

내 말이 뜬금없었던 건지, 눈에 띄게 얼굴을 붉히는 선배의 모습을 보며 웃는 나.

사회에는 대단한 놈들이 많다.

자기가 앞서 나서기 위해선 망설임 없이 앞서가는 사람 등에 칼을 꽂는 녀석도 있는가 하면, 죄책감이라곤 하나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사는 녀석들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는 대신 다른 누군가의 등을 밀어주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리고, 이 안효민이라는 사람은 그런 인물이었다.

지금 선배는 혹시라도 우리가 제대로 대회반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자신의 기회를 선뜻 포기한 것이다. 예상이겠지만, 아마 가지 않겠다고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는 것도 굉장히 많은 힘이 들었겠지.

무조건 남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 나조차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것이 선의를 가진 사람을 깎아내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웃는 낯으로 자기를 바라보고만 있자, 조금 허둥거리던 선배님은 헛기침을 몇 차례 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대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또 다음에 알려주도록 할게. 다른 아이들이면 몰라도, 팀장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거니까."

"옙."

"좋아. 힘내자, 류찬혁 후배님. 오늘은 이만 가서 쉬렴. 고생 많았어."

"선배님도요."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며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선배에게 할 말이 생각났다.

"아, 선배?"

"응?"

"제 이름이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맨날 후배, 후배 붙이면 번거롭잖아요."

"그래? 하긴…… 그래, 그러자. 그러면 너도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찬혁아."

"…… 누나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이 마흔을 넘어 여고생을 누나라고 부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

그날 저녁.

간만에 석식도 급식으로 해치운 나는 침대에 누워 팔을 베고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 그러고 보면 학교 끝나고 와서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는 게 얼마 만이지?'

잊어먹어도 한참을 잊어먹은 갖은 교과목 공부.

실습수업이 끝날 때마다 주어지던 과제.

저녁은 일부러 직접 만들어 먹으며 요리 연습.

고작 한 달 안팎이지만, 정말 쉴 틈 없이 달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생각보다 공부가 수월했다는 것일까.

머리는 아저씨지만 몸은 팔팔한 10대 청소년이다 보니 아직 머리가 덜 굳은 느낌이다.

조금 무리를 해도 다음 날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일도 없고.

미래에서는 막연히 젊음을 부러워했지만, 이 상황이 되어 보니 젊음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관절염 증상이 조금씩 나오고 있었단 말이지…….'

나이를 먹은 요리사라면 조금씩 달고 사는 고질병 같은 것들이 있다.

중화 전문 요리인들 중 많은 사람이 손목 관련 질병을 달고 사는 것처럼.

그나마 수 셰프까지 올라가서 직접 나서서 일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종일 서서 주방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야 했던 건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막 들어갔을 때가 좀 편했던 것 같아.'

시키는 대로만 딱딱 깔끔하게 끝마치는 것.

직급이 높아지니 아래 부하들을 어떻게 굴려야 하는지 머리가 빠지도록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보다 몸이 힘든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견습 시절의 찬혁이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킬 말이지만.

잠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이내 실실 웃었다.

오랜만에 쉰다고 여유가 생긴 머리가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한다.

'그나저나, 1학년 팀 팀장이라…….'

갑자기 권유받은 자리.

효민 누…… 선배는. 그래. 선배는 네가 정 싫으면 사양해도 된다고 했지만, 굳이 그럴 것 있나.

어차피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애들의 팀장 정도야 뭐, 대단할 것 없으니까. 오히려 아무 예고도 없이 대회에 1학년끼리 나가야 한다는 소리를 애들이 받아들일지 걱정이지만, 의외로 다들 처음 들을 때만 놀랐지 이후에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다들 자신감이 있는 거지.'

대회 정도야 거뜬하다고 믿는 자신감이 말이다.

다만 그보다 더 예상하지 못했던 건, 그런 자신감을 가진 애들이 좀 부당하지 않나 싶은 과정을 통해 팀장을 뽑은 일에 대해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야 물론 다시 정당하게 평가를 봐서 팀장을 선출하자 해도 별문제는 없겠지만……

'내 경력이 경력인데 애들하고 진지하게 자리 두고 다투는 것도 좀…….'

그런 의미에서 아무 충돌이 없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또, 이걸 다르게 말하자면 다른 애들도 내 실력을 인정했다는 의미니까.

"개최가 7월이라고 했지?"

7월은 기말고사 시즌. 너무 일정이 꽉꽉 들어차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실습 관련 점수는 대회 수상 시 자동적으로 만점 처리가 되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선배가 말했다.

사실 이미 알고 있기는 했어도, 그렇다고 무안하게 만들 수도 없어서 그냥 알려주셔서 고맙다고만 했다.

이른바 말하는 'ㄹㅇㅋㅋ만 치라고' 같은 상황이었지 싶다.

그나마도 주아가 톡에서 종종 쓰는 말을 어쩌다 배운 거지만.

팀장. 팀장이라……

그 두 음절 단어에 담긴 책임감이 어색하다.

주방의 책임자라면 또 몰라도, 대회 팀의 책임자라.

팀원으로서 큰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야 있지만, 팀장으로서 참가해 본 적은 없다.

실제 주방도, 대회에도 참가해 본 경험이 있기에 안다.

주방을 조율하는 것과 대회에서의 조율은 꽤 큰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효율의 타협점을 찾는 것과 최고 코스트로 최고 품질을 뽑아내려 노력하는 것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잘 할 수 있을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혼자 고민에 빠져 있을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덜컹.

"아, 시원하다."

먼저 씻고 온 내 뒤를 이어 씻으러 다녀온 철정이 녀석이 목에 수건을 걸치고 너털너털 걸어 들어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지만, 굉장히 아저씨 같았다.

'남자면 다 비슷해지는 걸지도.'

슬리퍼를 벗으며 젖은 발을 닦아내는 녀석이 나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냐 너? 쉬는 거야?"

…… 왜 사람이 쉬는 거에 놀라는 거야.

"난 뭐 쉬면 안 돼?"

"…… 아니, 안 될 건 없지."

자기가 말하고도 이상하다 싶었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철정.

태평히 자리에 가서 앉고는 드라이기를 꺼내며 내게 말했다.

"그러고 있는 걸 보니 꽤 힘들었나 보네, 대회반."

"응? 아니 뭐. 그다지 엄청 힘들지는 않았어. 그냥 오랜만에 머리 좀 식히는 거야."

"그래. 좀 자주 식혀라. 기계도 쉬는 시간이 필요한데 사람이 기계보다 더해요, 아주."

실실 웃어 보이며 드라이기를 켜는 철정. 뭐라 말하려다 너무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에 잠깐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말해 봤자 잘 들리지도 않는다.

이내 머리를 다 말린 듯 드라이기를 한쪽으로 치우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녀석.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웃기지도 않는다. 저 짧은 머리를 드라이기까지 써가면서 말리다니, 머리나 좀 길면 몰라.

"야, 드라이기 좀 새 걸 사든가 해라. 얼마나 오래됐으면 모터 소리가 시끄럽냐."

"뭘 새로 사, 새로 사긴. 바람만 잘 나오면 됐지."

내 핀잔에 대꾸하며 이번에는 손에 드라이기 대신 폰을 쥔 철정이 뜬금없이 놀란 소리를 냈다.

"엉?"

"왜?"

"야, 반톡에 선생님이 공지 올려놨는데?"

"진짜?"

첫 수업 시간 때 선생님이 주도하여 만든 반 아이들 전부가 들어간 단체 톡방.

철정은 지금도 반짝반짝 새 톡이 왔다는 알림을 쉴 새 없이 울리고 있는 핸드폰의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아 맞다, 알람 꺼놨었어."

"한 번 봐봐. 애들도 말 많은 걸 보니 좀 중요한 거 같은데."

그 말을 들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올려두었던 폰을 집었다.

잠금을 풀고 화면을 켜자, 노란색 말풍선 아이콘 옆으로 점점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길래.'

톡방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생님의 이름으로 올라온 공지사항 하나.

작은 쪽지 모양으로 접힌 그 공지를 탭하여 펼치니, 그곳에는 이런 글귀와 함께 학교의 홈페이지로 이어진 링크가 쓰여 있었다.

<1반 여러분께 알리는 4월 현장 실습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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