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8화 (38/403)

38. 신고식.-4-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완성된 요리를 들고 하나둘 모이는 인원들.

그들 대부분의 선택이 같은 한입 요리였기에 어쩌다 조리 시간이 비슷하게 걸렸을 뿐이지만, 다종다양한 요리들로 비어 있던 조리대가 가득 채워지는 모습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안효민은 생각했다.

"와아. 다들 빠르구나. 만듦새도 굉장히 좋아!"

그런 그녀의 감탄에 최윤재가 핀잔을 준다.

"자기가 제일 먼저 끝내놓고 말은 잘해요."

"에이, 윤재 너도 금방 끝냈으면서. 뭐야? 관자 카나페?"

"일단 먹어봐. 그다음에 알려줄게."

서로 틱틱대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손을 놀려 살짝 어지러운 조리대 위를 정리해나가는 두 사람.

그 모습을 보던 1학년 일동은 이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합을 맞춰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던 도중, 두 사람의 손이 잠시 멈춘다.

"응? 종류가 하나 부족하지 않나?"

"하나, 둘, 셋…… 여섯? 그러네? 아직 다 못 끝낸 사람 있어?"

주변에 모인 1학년들을 둘러보는 안효민. 그 물음에 찬혁이 손을 들며 대답했다.

"제 거가 아직 안 왔어요."

"그래? 아직 덜 완성된 거니?"

"살짝 식히는 시간이 필요해서요."

냉장고로 살짝 곁눈질하며 말하는 찬혁에게 효민이 웃음기를 띤 얼굴로 묻는다.

"뭘 내오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

"벌써 말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뜸이란 게 원체 다 익기 전엔 뚜껑을 열면 안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능청스런 대답에 효민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래, 알겠어. 기대하고 있을게."

"옙."

찬혁과 짧은 대화를 마친 효민이 다시 학생들을 돌아봤다.

"자. 그럼 각자 자기가 만든 것들 앞에 서보자."

그 말에 조리대 끝에 ㄷ자로 놓인 각 접시 앞으로 이동하는 일행들.

각자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하며, 효민이 말을 잇는다.

"다들 수고 많았어. 괜히 귀찮게 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들 잘 해준 것 같아서 고맙네."

"알면 다음부터 이러지 맙시다, 예비 부장님. 거 오랜만에 일찍 나오래서 와줬더니 괜히 왔어."

"응, 그러면 다들 한 명씩 자기가 한 요리가 어떤 건지 설명해 보자. 시작은 윤재부터."

"아주 읽씹이 오지십니다. 예."

"빨리 안 해?"

"아, 알겠어. 할게. 나 참 설명은 자기가 제일 못하면서……."

"쓰읍?"

중얼중얼 혼잣말로 불만을 토로하는 윤재였으나, 짐짓 화난 표정을 지은 효민의 재촉에 그는 먼저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

짧은 헛기침으로 목을 푼 윤재 형이 이내 자신의 접시를 살짝 내밀며 설명을 시작했다.

"크흠흠. 내가 준비한 건 관자 세비체를 사용한 카나페야. 튀긴 비스켓에 설탕을 살짝 뿌리고, 그 위에 초절임한 조개관자와 토마토, 양파, 그리고 마무리로 얇게 슬라이스 한 사과를 올리고 라임즙을 살짝 뿌렸지."

"오오……."

마치 튀긴 건빵 같은 갈색빛깔 비스킷 위에 올라간 저민 관자와 야채들. 살짝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냄새가 사정없이 침샘을 자극했다.

예로부터 신맛은 가장 침을 많이 분비시키고 식욕을 돋우는 맛. 분명 그닥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어진다.

그런 맘을 안 것인지, 윤재 형은 접시를 중앙으로 밀어두며 우리에게 말했다.

"자, 다들 먹어봐."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일행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갔다.

"와, 맛있다!"

"사과랑 세비체 신맛이랑 이렇게 어울릴 줄 몰랐는데. 아, 사과식초구나? 왠지 맛이 어울리더라."

"이번 1학년은 혀도 제법이네. 이렇게 빨리 맞출 줄이야."

다른 아이들끼리 오가는 분석에 감탄하는 윤재 형.

음. 역시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3년 동안 대회반 붙박이로 남을만한 실력이다.

새콤한 세비체의 맛과 사과, 그리고 튀긴 비스킷의 단맛 사이에 이루어지는 절묘한 조화.

굉장히 맛있는 일품요리였다.

훌륭한 요리에 작은 박수로 화답하는 우리. 그 뒤를 잇듯 재빨리 말문을 연 효민 선배가 자신이 만든 요리를 앞으로 내민다.

"다음은 내 차례네. 어…… 내가 만든 건 저민 대구 살로 말은 어선이거든? 근데 거기에 흑후추랑 배합한 식초를 곁들인……? 그러니까…… 아 몰라! 아무튼, 먹어봐!"

두루뭉술하다 못해 지리멸렬한 설명에 고개를 갸웃하는 일행들.

그 광경을 한 발 떨어져 살피던 윤재 형이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참견했다.

"얘들아, 봤지? 얘가 이래. 만들기만 잘 만들고 설명을 못 해. 그냥 자기 되는 대로 만들었는데 그게 맛있는 거야. 방송에서 나간 거 그거 다 교장 선생님 대본이라니까?"

"뭐래!"

윤재 형의 발언에 노발대발 성질을 부리는 효민 선배,

뜬금없이 드러난 선배의 정체에 일행의 표정이 아연실색해진다.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예전부터 '천재가 반드시 좋은 선생인 것은 아니다.'라는 말의 증거 그 자체인 사람이 바로 효민 선배였으니……

'오죽하면 레시피 따라 하는 게 암호 해독이라고 불렸을까.'

우스운 것은, 그런 암호 해독을 어떻게든 해나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실력이 길러졌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뭐 결과만 좋으면 됐지.

생각은 거기까지.

지금은 일단 시식을 해야 할 차례다. 다른 애들 요리도 아직 잔뜩 남아 있으니, 식기 전에 먹으려면 서두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둘 손을 뻗어 효민 선배가 자신 있게 내민 어선을 집어 들고, 그대로 입으로 넘겼다.

"와……!"

"오."

"……."

그리고, 그 한 조각 요리를 먹은 우리는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선배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과연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요리였다. 선배가 설명에 난색을 표하는 모습이 약간은 이해가 될 정도로.

대체 어떤 비율과 방법으로 섞은 것인지 완벽한 화합을 자랑하는 후추와 식초. 풍부한 후추의 향기가 새콤하고 강렬한 식초 속에서도 본연의 풍미를 잃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원래 만드는 어선이랑은 다르게 일부러 찌지 않고 초절임을 했어. 속은 찜기에서 익히는 대신 팬으로 충분히 익혀냈고.'

쉽게 말하자면, 정말 맛있었다.

단 한 가지, 이상한 점만 뺀다면.

"왜 하필 나랑 조리법이 겹치는 거야. 사람 초라해지게."

"에이, 윤재 네 것도 충분히 맛있어."

"충분한 거랑 엄청난 건 다르잖냐. 애들 반응 안 보여?"

서로 웃으며 티격태격 대는 두 사람, 하지만 나는 묘한 이질감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다.

'저 두 사람이 서로 메뉴가 겹쳤다고?'

효민 선배와 윤재 형이 만든 것은, 둘 다 많은 어레인지가 들어가기는 했어도 결국 세비체가 메뉴의 중점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같은 주제로 요리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스스로의 개성을 내비치는 자리에서 굳이 남과 겹치는 점이 있는 요리를 할까? 완벽한 접시를 위해서라면 실시간으로 레시피를 갈아엎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저 두 사람이?

'…… 뭔가 이상한데.'

그러나 그런 내 의문이 채 봉오리를 피우기도 전에, 두 선배의 뒤를 이어 재빨리 나서는 목소리가 내 의심을 가로막듯 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번엔 제가 만든 걸 설명해드릴게요!"

백예은. 자신의 접시를 앞으로 내민 녀석이, 활기찬 목소리로 외친다.

'…… 그래, 뭐 이유가 있겠지.'

일단 지금은, 다른 아이들의 접시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

백예은. 볶은김치와 치즈, 계란, 빵가루와 밥을 섞어 반죽하여 동그랗게 튀겨낸 김치치즈라이스 볼.

안창민. 사기 스푼에 한입 사이즈의 완자와 스프를 담아 오븐에서 졸여낸 미니완탕.

여준기. 라이스페이퍼에 실처럼 썰어낸 각종 생야채를 속이 터지도록 넣은 월남쌈.

송지영. 얇게 부친 중화식계란지단에 볶아 익힌 속재료를 넣어 말은 짜춘권.

'흐음…… 다들 실력이 괜찮네.'

1학년들이 준비한 메뉴를 하나씩 시식하며, 안효민은 그런 평가를 내렸다.

'작년 이맘때 우리랑 비교해도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아.'

물론, 그녀 자신을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메뉴, 조리법, 재료, 그리고 본인의 개성까지.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매끈한 옥처럼 빛나는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다만, 아직 조금 부족한가.'

효민은 오늘 1학년 아이들을 보기 전, 자신의 할아버지이자 성심고의 교장인 안영길과 나눴던 대화를 짧게 되새겼다.

선별과 평가.

곧 있을 서울시 배 U─20 요리경연대회에 1학년들끼리 팀을 꾸려서 참가하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녀의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단순했다.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것.

그리하여 시답잖은 촌극을 거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그녀가 보기에, 이 팀은 기술적으로는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어 보였다. 다만……

'구심점이 모자랄지도.'

사공이 많은 배는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진 어린아이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녀는 이 팀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저 애한테 그게 가능할까?'

그녀의 시선이, 아직 자신의 요리를 내놓지 않은 찬혁에게 향했다.

또래들과 그렇게 다를 것 없는 몸과 꾸미는 것을 모르는 듯 수수한 차림새를 한 아이. 하지만 저 아이에겐 자신을 보고도 주눅이 들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

'할아버지는 되게 기대하고 계신 모양이지만…….'

안효민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관을 우선으로 하고 싶었다. 요리인으로서 그 정도의 고집은 가져도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실력이 소문에 뒤지지 않길 바랄게, 류찬혁 후배님.'

거기까지 생각하고, 안효민은 자신의 모습이 살짝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일까, 오늘 처음 만난 아이에게 벌써 묘한 기대감을 품고 있는 꼴이라니.

그것이 자신 앞에서 입이 닳도록 저 아이를 칭찬한 할아버지 탓일지, 아니면 이전에 보았던 영문 모를 자신감 가득한 모습 탓일지.

잠시 고뇌하던 효민은,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결국, 판단은 요리가 나온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

선배들을 비롯한 일행의 메뉴 소개도 나만 빼고 전부 마쳤을 쯤,

식히는 작업 탓에 자연스럽게 가장 마지막 순서가 된 나. 덕분에 쟁반에 요리를 내오는 나를 보는 일행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매서울 정도로.

"마지막 차례는 찬혁이네. 찬혁이는 뭘 준비했어?"

"저는 디저트로 준비했어요."

"디저트?"

궁금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는 효민 선배와 아이들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하얀 오븐그릇 안에 담긴 연노랑빛 커스타드크림. 그리고 그 위에 골고루 뿌려진 갈색 가루.

그것을 본 선배가 놀라며 말한다.

"오. 크렘브륄레네?"

"예. 메뉴 정할 때 보니까 다들 한입 요리로 만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디저트로 만들어봤죠. 마침 순서도 마지막이고, 딱 좋지 않아요?"

"아주 마음에 들어."

"칭찬 감사합니다."

마지막 차례가 디저트인 덕분인지,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 듯 보인다. 특히 여성진들이.

그럼 기대를 배신하지 않도록 화룡점정을 찍어보도록 할까.

쟁반 한 쪽에 따로 챙겨왔던 시어잘. 어찌 보면 내가 이 메뉴를 고르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이 특이한 조리도구의 사용처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시어잘은 일종의 토치다. 다만, 불을 직화로 쏘아서 가열하는 일반적인 토치와는 달리, 복사열을 이용한 가열을 하는 조리용 토치라는 것이, 바로 이 시어잘의 특이점.

시어잘에 불을 붙이면, 꼭 횃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널따란 토치 끝부분에 영글어진 불덩어리가 이글거린다. 이것을 조리할 식재 가까이 가져다 대어 불을 쐬어주는 것이 바로 시어잘의 사용법이다.

이 시어잘이 토치에 비해 좋은 점이 무엇이냐면, 토치로 불을 쐬는 것과는 달리 넓은 면적을 동시에 가열하는 덕분에 한 곳만 까맣게 탈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맛만큼이나 겉모습이 중요한 베이킹에서 그런 특색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화르륵.

시어잘에 조심스럽게 불을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 불길이 화구 앞 철망까지 혀를 낼름거린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크렘브륄레 위로 보내어 열기를 쐬어주니, 커스타드 크림 위에 올라가 있던 갈색 가루들이 순식간에 액체로 변하여 크림 위를 뒤덮는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시럽. 여태껏 맛있는 음식의 향기가 가득하던 조리실을 단숨에 장악한 카라멜의 압도적일 만치 달콤한 향기가 실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강에마저 순식간에 파고든다.

이것이 바로 크렘브륄레. 크림crème을 불태워brûlée 낸다는 이름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일품.

"와아……."

눈을 감고 감미로운 카라멜 향을 만끽하는 일행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불을 끈 시어잘을 한쪽으로 치웠다.

잠시 뒤, 차게 식힌 커스타드 크림의 온도 덕에 순식간에 유리처럼 굳어진 시럽.

어디 하나 탄 곳 없이 골고루 배어든 진한 메이플 시럽의 색채. 내가 만들었지만 완벽했다.

조금만 더 놔두었다간 난동이라도 피울 기색인 일행에게, 작은 쇠숟가락과 함께 크렘브륄레를 하나씩 나누어준다.

숟가락을 집어 들고 나의 마무리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사람들.

그 기대에 부응하여, 나는 과장스런 동작으로 뮤지컬의 배우마냥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며 그들의 기다림을 종식시킨다.

"단 고구마를 곁들인 크렘브륄레crème brûlée avec doux patate douce.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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