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신고식.-3-
갑작스런 효민 선배의 제안에 서로서로 떨어져서 각자 하나씩 조리대를 차지한 우리.
왜 굳이 해야 하는 거냐고 불평이 나올만한 상황임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건, 당장 우리만이 아니라 효민 선배와 일찍 왔다는 이유로 그것에 말려든 윤재 형 또한 빼지 않고 조리대 앞에 섰기 때문이었다.
'저 둘이 안 했어도 하긴 했을 테지만.'
윤재 형이야 둘째 치더라도 효민 선배쯤 되는 사람한테 실력을 평가받는 건 좀처럼 생기지 않는 일이다.
당장은 평가가 아니라 서로 알아가는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일단 먹어주는 건 먹어주는 거니까.
"보자…… 메뉴는 자유라 그거지."
사실, 무언가를 만들 때 가장 곤란한 경우는 바로 조건이 없을 때다. 적어도 대전제가 하나 정도는 있어 주는 것이 만드는 사람한테도, 심사하는 사람한테도 편하다. 최소한의 기준은 있는 것이니까.
'코스 메뉴를 내갈 때도 항상 식사나 메인은 알아서 해달라고 하는 손님들이 가장 힘들었지…….'
잘 먹는다면 괜찮지만, 괜히 마음대로 골랐다가 입에 안 맞는다며 불평을 하는 손님들도 아주 극소수이긴 했으나 없진 않았다.
세상에, 한 끼에 수 백 유로를 써가면서 굳이 자기가 직접 결정하지 않은 것에 컴플레인을 걸다니. 그런 사람들의 심리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당장 중요한 건 무엇을 만들지를 결정하는 일.
사장님이 언젠가 말하길. 단번에 생각해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우선 답을 도출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단계적…… 단계적…….'
좋아. 그럼 메뉴 구상을 단계적으로 나누어보자.
지금 내게 주어진 대전제는? 없다. 무슨 재료를 쓰든, 어떤 조리법을 사용하든 자유롭다.
대전제가 없다면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들 요리를 먹을 사람들.
그렇다면 우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고찰이다.
'먹을 사람의 수는 7명. 남녀 혼합. 10대. 그 외 특이사항…….'
다들 요리를 굉장히 잘하고. 지금도 요리를 만들고 있고. 또……
'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됐어.'
체크. 굉장히 중요한 사항이다. 이것으로 만들 요리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들 메뉴의 대전제가 정해졌다. 양이 적은 것.
식사를 막 마친 지 30분도 지나지 않은 사람들. 당장은 배가 꽤 차있을 것이다. 특히 오늘 메뉴는 피자와 샐러드. 포만감이 오래 지속되는 메뉴다.
'그럼 메인, 스프 계열은 제외하자.'
메인은 당연히 너무 무겁다. 이미 배불리 먹은 사람한테 한 끼 더 드시라고 억지로 밥을 퍼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아마 백예은이라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스프 같은 액체 계열의 메뉴는 피자를 먹은 후의 배에는 조금 부담이 간다. 탄수화물 특유의 팽창현상 때문. 어차피 스프 정도의 양으로는 그리 대단치 않은 수준에 그치겠지만 되도록 피하고 싶다.
'그러면 남는 게…….'
코스로 치면 전채나 디저트.
연회메뉴라면 한 입 요리.
그 외에도 이것저것 있겠지만, 일단 대체적으로는 이 선에서 정리가 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쳐내 보자.
전채의 목적은 이후의 메뉴를 위해 먹는 사람의 식욕을 돋우는 것. 하지만 지금은 이후의 식욕을 돋우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메뉴로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전채는 패스.
디저트는 대체로 식사가 끝난 후 마무리하며 입가심을 하는 것. 지금 상황에 부합이 잘 되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디저트는 대부분 제과 계열인데…….'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제과는 제빵과는 달리 보통 만들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을 거친 후에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당장 먹을 거니까, 굽는 시간 같은 것도 생각하면 좀 별로일 것 같긴 하지만…….'
일단 보류.
그럼 결국 가장 유력한 후보는 자동으로 한입 요리가 된다.
한입 요리란 말 그대로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요리. 예를 들자면 카나페나 자그마한 꼬치, 라이스볼, 춘권, 그 외 기타 등등의 핑거 푸드가 그에 속한다.
당장은 유력한 정답. 하지만……
'그게 최선인가?'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것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 나는 먼저 눈을 굴려 각 조리대에서 어떤 요리가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폈다.
빵을 비롯한 크래커나 치즈, 과일 등등. 그 외에도 이런저런 재료를 챙긴 이들이 있었지만, 디저트를 고른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아마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것일 터.
겹치더라도, 똑같은 걸로 승부를 볼까?
'최선이 최고는 아닌 법.'
언젠가 보았던 격언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 씨. 요리사한테 정답이 뭔가.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게 바로 정답이지.
"정했다."
내가 만들 메뉴는, 디저트로 결정이다.
다 한입 요리를 만든다고 내가 따라갈 필요는 없다. 뛰는 놈이 있다면, 나는 그 위에서 하늘을 나는 놈이든, 수영을 하는 놈이든. 내가 되고 싶은 게 되면 되는 거다.
종류를 정했다면, 다음에는 세부적인 메뉴를 구상할 차례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내 예상보다 비교적 쉽게 풀렸다.
'먼저 재료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우선 밀가루가 들어가는 디저트는 생략했다.
쿠키 종류라면 몰라도 빵으로 가는 순간 발효라는 시간을 잡아먹는 과정이 싫어도 추가된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게다가, 이미 피자를 먹은 사람한테 밀가루로 만든 걸 디저트로 먹이는 건 좀 어떤가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데 디저트에서 밀가루를 못 쓰면…….'
남는 것은 차가운 것 위주의 메뉴들뿐. 셔벗이나, 아니면 아이스크림 같은.
근데 나는 개인적으로 찬 디저트 또한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바깥이 춥거든.
현재 날씨는 3월 중후반.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낮에도 실내에서 히터를 트는 중인데,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아무리 맛있어도 나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정리해 보자.'
디저트.
밀가루를 쓰지 않은.
차갑지 않고 되도록 따듯한.
생각…… 생각……
'좀처럼 생각이 안 나네.'
으음, 디저트는 전문 분야가 아니다 보니 좀처럼 딱 떠오르는 메뉴가 없다. 그래도 어느 정도 구체적인 전제가 잡혔으니만큼, 앞으로 한 조각만 맞춰지는 조각이 있다면 머릿속 퍼즐이 시원하게 풀릴 것 같은데……
"응?"
그렇게 메뉴를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며 온갖 비싸고 희귀한 조리도구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선반을 보고 있던 그때, 특이한 생김새를 한 도구─그렇지 않은 놈이 드물긴 하지만─가 내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마치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배기관을 끝에만 뚝 떼어놓은 것 같은 주방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 그 이름하여……
"시어잘?"
이거 참 운이 좋다. 덕분에,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
만들기로 결정했다면 재빨리 실행이다.
메뉴를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고민이 살짝 길어진 탓에 다른 애들보다 시작이 늦었지만, 다행인 게 있다면 내가 선택한 메뉴는 그렇게 난도가 높지 않다는 것일까.
"재료부터 챙겨오자."
뭐, 챙긴다고 해도 그렇게 대단한 재료들은 아니다.
계란, 설탕, 우유, 생크림. 다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재료들. 그나마 구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지금 챙긴 바닐라빈 정도?
거기다가 부재료로 적당한 크기의 고구마 한 개와 물엿.
지금부터 만들 요리에 들어가는 건 고작해야 이게 전부. 그나마도 뒤에 두 개는 원래는 딱히 필요 없는 재료다.
가져온 재료들을 조리대에 늘어놓아도 한참은 자리가 남았다. 이 요리가 얼마나 만들기 단순한 요리인지 절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완성품은 엄청나지.'
시작은 고구마부터.
겉을 깨끗하게 씻겨낸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 스몰 다이스로 자른다. 대충 예를 들자면 왜, 코x팜에 들어가는 하얀 젤리만한 사이즈라고 할까.
그렇게 고구마를 잘 잘랐다면, 그것을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넣어 살짝 볶는다. 겉에만 아주 살짝 색이 들 정도로.
─치이이익!
불에 무언가를 구울 때 나는 냄새는 어떤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 천차만별, 가지각색으로 다른 자신만의 맛을 갖고 있지만, 고구마가 익을 때 뿜어내는 달큰하면서도 고소한 향기는 다른 재료가 감히 따라가기 힘든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특히 기름을 살짝 먹은 고구마는 그냥 굽거나 찐 고구마랑은 전혀 다른 풍미가 난단 말이지.'
그 특유의 풍미가 약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할 때 즈음, 고구마의 양에 맞추어 물엿을 투입.
처음에는 서로 끈적끈적 엉겨 붙어 풀어지지 않는 물엿에 서서히 열을 가하자, 마치 꽁꽁 얼어 있던 얼음이 녹아드는 듯 작은 주사위 모양으로 잘린 고구마 사이로 틈틈이 침투한다.
이쯤 말하면 알겠지만,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일종의 고구마 맛탕이었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이건 어디까지나 부재료. 이것은 진짜 메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적당히 볶아져서 물엿으로 골고루 코팅된 고구마들. 숟가락 끝으로만 살짝 떠서 입에 넣자, 깊고 부드러운 달콤함과 함께 살짝 서걱대는 식감이 전해진다.
실수한 거냐고? 아니, 이게 딱 좋다. 약간 덜 익어서 생긴 이 서걱거림. 이게 내 노림수다.
'좋아.'
이다음에 준비할 것은 계란이다.
커다란 볼에 계란의 노른자만을 골라 넣고, 정확히 계량한 양만큼 설탕을 투입.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만, 제과제빵은 다르다.
제과제빵에서는 시작이 8할의 비율을 차지한다.
정확한 무게, 정확한 양, 정확한 레시피를 지키지 않는다면 완벽한 결과물은 나오지 않는다.
'…… 고, 가르칠 때는 다들 말하지만 말이야.'
사실 제과제빵도 요리인이 만드는 것. 항상 같은 환경, 같은 도구를 사용해서 만든다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습도, 기온, 광원, 도구를 비롯한 모든 상황이 항상 달라지는 법이니 도통 현실적이지 않은 말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고쳐 말하자면, 시작은 8할. 하지만 요리인이 채울 수 있는 것은 고작 2할이 아니다.
같은 레시피,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요리인의 감각에 따라 그 맛은 100% 이상을 넘볼 수도 있다.
'뭐,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냐면, 정석 레시피와는 다르게끔 조미료의 양을 적당히 조절하겠다는 것이다. 애당초 고구마 맛탕이 같이 들어가는 이상 이미 정석은 물 건너가긴 했어도.
노른자와 설탕이 잘 섞인 것을 확인하고, 그 양에 비율을 맞춰 계량한 생크림.
냄비 속에서 서서히 열을 받아 약 70도가량으로 데워진 생크림을 앞서 만든 노른자와 설탕이 섞인 것에 천천히 부어가며 거품기로 두 액체를 혼합한다.
너무 뜨거우면 계란이 익어 버리고, 너무 차면 계란과 섞은 설탕이 제대로 녹지 않아 완성했을 때 일체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실패작이 되어 버린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천천히……
'좋아. 색이 잘 나왔어.'
새하얀 크림에 노란 물감이 스며든 듯 보이는 옅은 노란빛. 어디 뭉친 곳 없이 잘 섞였다는 증거.
이걸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끝이다.
잘 완성된 혼합액을 한 차례 체에 거르면, 아직 덜 녹은 설탕 결정이나 혹시 실수로 들어갔을지도 모를 부산물들이 깔끔하게 제거됨과 동시에 사이사이 공기가 주입되어 더욱 부드러운 맛을 연출한다.
그 후에, 인원수에 맞춰 준비한 컵 모양 오븐 그릇에 이것을 잘 채워 넣고, 살짝 찰박거릴 정도로만 물을 깔아준 오븐팬 위에 올려 160도 오븐에서 30분.
여기까지 걸린 시간. 약 10분.
완성까지 남은 시간. 약 50분.
50분 뒤. 내 메뉴는 완성된다.
프렌치에서도 그 이름을 널리 떨친 디저트.
그것에 살짝 변형을 가한 나의 특제 크렘브륄레creme brulee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