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신고식.-2-
안효민.
성심조리고등학교 2학년. 18세.
어깨 길이보다 살짝 더 기다란 흑발과 새하얀 피부의 대조가 인상적인 이 선배님은 앞서 말했다시피 이 성심고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한 손에 꼽는 인물이다.
'학생 중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는 최고의 유명인사고.'
학교 내에서의 이야기나 요리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안효민은 1학년 때 서울시 배 전국요리대회 개인전에서 우승한 기록을 가진 매우 뛰어난 요리인이다. 그에 더해 교장 선생님인 안영길 선생님의 손녀딸이기도 하고.
이것들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천재적인 요리인이자 주변 환경의 축복을 받은 인물인지는 확연하다. 다만, 그녀가 대중들에게마저 유명해진 계기는 그런 업계인 만 알법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한 TV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연휴기간을 노려 방영된 여러 국가의 방송국들이 제휴하여 만든 4부작 단편 방송.
내용은 별다를 것 없었다. 그냥 각 국가마다 가진 전통요리를 내세운 토너먼트 경기였을 뿐, 다만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단편 특집치고도 과하다시피 들어간 예산에서 비롯된 방송 자체의 퀄리티와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 홍보였다.
그곳에 한국을 대표하여 안영길 선생님의 조수 중 한 명으로 출전했던 그녀.
처음에는 한식의 달인 중에서도 고작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의 요리인이 출전 명단을 꿰찼다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룬 인터넷 기사를 시작으로 온갖 어그로를 끌었던 그녀. 덕분에 평생 먹을 욕을 그날 다 먹었다고 훗날 직접 언급한 바가 있다.
'그 와중에도 외모로는 아무도 못 깠었지…….'
하지만 이내 방송을 통해 공개된 그녀의 실력과, 이벤트 전에서 일본과의 1대1 선봉 대결을 치러 당당하게 승리하고, 끝내 한국팀의 우승에 크게 일조한 그 모습에 그때까지 부정적이었던 여론이 순식간에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이내 그녀는 프로그램의 대성공과 함께 작년 실검 1위까지 차지하며 가장 유명한 고등학생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었다.
덕분에 그녀는 아예 조기 졸업 권유와 함께 조리과가 있는 유명 대학과 외국 요리학교에서 러브콜까지 받고 있다.
본인이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못 박았고, 최근에는 대회 출전 기록도 없이 잠잠하게 학교만 다니는지라 유명세도 작년 만큼은 아니게 됐지만.
'그렇다고 그게 이 사람 이름을 헷갈릴 이유는 안 되지.'
오히려 나는 왜 자기 이름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지금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었나?
"저야말로 선배님이 제 이름을 아실 줄은 몰랐는데요."
"나도 차기 부장이니까. 동아리 부원들 이름은 알고 있어야지."
"아."
과연. 그건 생각 못 했다.
"그나저나, 지금 한 말만 들어보면 후배님은 실력에 꽤 자신이 있나보구나?"
묘한 웃음기가 서린 입가. 작게 휘어진 눈매가 나를 내려다본다.
음.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예. 뭐, 누구한테 꿇릴 것 같진 않아서."
이런 말 외에는.
내 대답에 안효민이 과장된 투로 놀란다.
"오. 역시. 사람 보는 눈도 재료 보는 눈에 안 뒤진다니까."
쿡쿡거리며 웃던 안효민이 이내 웃음을 멈추고 이만 됐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밥 먹는 걸 더 방해하기도 미안하니까 이만 가볼게. 이따 보자, 류찬혁 후배님."
"아, 예. 이따 뵙겠습니다."
"응. 그럼 밥 맛있게 먹어."
그러고는 한 손을 작게 흔들어보인 그녀가, 혼잣말처럼. 하지만 확실히 내 귀에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디, 실력이 자신감만큼 됐으면 좋겠네."
그 말을 끝으로 떠나가는 안효민.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철정이 숨을 참고 참다가 간신히 뭍으로 기어 나온 잠수부처럼 숨을 몰아쉰다.
"아니 이놈 진짜 머가리가 어떻게 된 건가?"
"왜 또."
쓸데없이 목소리가 거칠다. 누가 보면 화난 줄 알겠다.
"너는 왜 가는 데마다 안 찍히는 사람이 없냐?"
"찍히긴 누가 찍혀. 누구한테 찍힐 일이 있다고."
괜한 누명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내게 열불이 터진 듯 외치는 녀석.
"아니, 최태호 선생님도 그렇고. 황대호 선생님도 그렇고, 이번엔 안효민 선배까지. 너 지금 찍힌 거라니까?"
"최태호 선생님…… 은 그렇다 쳐도, 황대호 선생님한테는 딱히 찍힌 거 아니야. 선배는 몰라도."
진짜다. 최태호 선생님이야 내 잘못이 있긴 하지만, 황대호 선생님은 그냥 수업 끝에 남으라고 해서 왜 그런지 보니까 졸업 후에 자기 가게로 오지 않겠냐더라.
일식 심화3에 바로 TO 비워줄 테니 대회반은 다음 학기로 미루고 전문적으로 일식을 배워보지 않겠냐는 말과 함께.
'거절했지만.'
당장 중요한 건 대회반 자체가 아니라 대회반에 들었을 때 주는 온갖 혜택과 장학금이다. 게다가 어차피 가장 고급 코스인 일식 심화3 같은 걸 들어도 이미 다 성 셰프 가게에서 배운 것들일 확률이 높고.
"선배도 그냥 인사차 말 건 거겠지. 찍혀도 내가 찍힌 거 아니냐. 밥이나 먹자."
쓸데없이 열을 내는 철정이 녀석을 진정시키면서, 나는 방금 먹다 만 카프레제 샐러드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 줄까?"
"어? 아, 아니! 난 밥 다 먹었잖아."
자기 식판은 소스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비워놓고 내 식판에 남은 피자에 눈길이 쏠린 백예은의 모습만 아니었다면, 조금 더 평화롭게 밥을 먹을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니, 그걸 먹고 아직 모자란 거냐.
인류의 수수께끼 그 자체인 신체를 갖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결과적으로 말해서, 철정이 녀석의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로 끝났다.
"반가워, 후배님들. 대회반 부장 대리 안효민이야."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점심시간 뒤. 대회반의 부실 겸 실습실인 6층 조리실에 도착한 1학년 일행을 선배는 반갑게 맞이했다. 마찬가지로 인사로 답하는 우리였으나, 우리 반을 제외한 다른 두 명은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몇 명은 이미 아는 얼굴이지?"
"……."
나와 백예은, 그리고 안창민을 돌아보며 웃는 선배. 어째 수상한 미소다.
'꼭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그때였다.
─드르륵!
"나 왔다."
거칠게 실습실의 문을 열며 등장하는 한 남학생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아, 저거 비싼 건데.'
정작 내 관심은 다른 곳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 문, 냄새가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도록 감압장치까지 달린 문이라 고장이라도 났다간 큰일 날 물건이니까.
"안녕 윤재야."
"어. 안녕."
안효민 선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거친 태도를 보이는 윤재라 불린 남학생.
그가 건들건들한 걸음걸이로 효민 선배의 옆에 서서 묻는다.
"응? 1학년 신입생?"
"맞아. 이번에 시험 합격한 애들. 인사나 좀 나눠봐."
"안녕하냐. 보다시피 2학년인 최윤재라고 한다."
의아한 눈길로 우리를 한 차례 돌아본 윤재 선배의 자기소개에 다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대충 정리한 머리에 엉망으로 입은 교복. 거의 반쯤 풀어헤친 넥타이가 '나 양아치다.'라며 광고를 하는 것 같았다.
…… 근데, 뭔가 이상하다.
'…… 되게 어색하네.'
과거, 나름 양아치에 가까웠던…… 이라기보다, 양아치 그 자체였던 시절이 있어서 안다. 마치 억지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는 이 느낌.
'뭔가 했더니. 몰카라도 할 셈인가.'
방금, 효민 선배가 짓고 있던 웃음의 의미가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까 윤재 형이었네. 거, 하필 해도 저 형이 하냐.'
이름을 듣고 얼굴까지 보니까 좀 알 것 같다.
이 선배의 이름은 최윤재. 내가 대회반에 있던 2학기 시절, 1학년들 사이에선 거의 천사 취급을 받던 형이다.
성격은 대충 말하자면 두루두루 친한 성격. 착한 인싸. 딱 그런 사람이었다.
'전학 간 다음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연락했었는데.'
오죽하면 호텔 1차 면접에 성공했을 때도 이 형이 일하는 레스토랑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뭐, 출국하기 전 간단한 인사나 하러 돌아다니는 차에 어쩌다 가게 된 거지만.
그런 사람한테 저런 되도 않는 연기를 맡겼으니,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리가 있나.
"쓰읍, 선배가 먼저 인사했는데 어째 말이 없냐?"
"죄, 죄송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야, 적당히 해. 얘들아 긴장 풀어. 우리 그런 동아리 아니야."
'그런 동아리가 아니기는.'
허술한 다그침에 서둘러 대꾸하는 아이들을 따라 나도 고개를 숙였다. 일단은 걸리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무안하지 않을 테니까.
"거 이번 학년에는 빠릿빠릿한 녀석들이 없네."
'이번 학년은 무슨, 자기들도 신입생 받는 건 처음이면서.'
점점 지리멸렬해지는 대사 처리에 이쪽도 슬슬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됐고, 다들 고개 들어 봐라."
그 말에 고개를 드는 아이들. 곁눈질을 살짝살짝 해보니, 나를 비롯한 우리 반 애들은 입만 다물고 있을 뿐이지 티끌만큼도 긴장하고 있지 않다는 게 훤히 보였다.
'솔직히 좀…… 뻔하긴 하지.'
상황이나 연기실력 면이 특히나.
그런 우리의 반응에 윤재 형도 살짝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그, 그러니까. 어…… 그래! 우리 대회반에 들어왔으면 꼭 거져 가야 하는, 아니아니. 거쳐 가야 하는……!"
결국,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큭, 크크크……!"
"아니, 네가 웃으면 어떡해?!"
웃음을 터트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효민 선배. 그 웃음소리에 연기를 할 의욕을 몽땅 잃은 윤재 형이 불평을 터트린다.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있었다간 내가 웃을 판이었으니까.
"속은 애들이 반도 안 되는데 뭘 더 하겠다고? 푸흐흡!"
"아, 좀만 더 밀었으면 다 끝난 거였는데!"
'그래, 끝났겠지. 내 인내심이.'
아직 상황파악이 좀 덜 끝난 애들을 비롯한 우리에게 미안하다 사과를 하며, 효민 선배가 웃음기를 간신히 걷어내고 말했다.
"아, 오랜만에 웃었다. 미안해 얘들아. 우리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좀 비슷하게 당했거든. 그때는 연기하는 선배 마스크 탓에 꽤 오래 속았는데 우리는 그런 인재가 없네."
"네가 훼방만 안 놨어도 됐다니까?"
"그래. 그랬겠지."
옷을 고쳐 입으며 성을 내기 시작한 윤재 형에게 대충 대꾸하며, 효민 선배가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얘 원래 성격은 이렇거든. 장난 좀 칠까 싶었는데 마음대로 안 되네. 그래도 긴장은 좀 풀렸지?"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캔 음료수를 꺼내 하나씩 쥐여주며 웃어 보인다.
"사실 대회반이라는 게 말만 대회반이지, 당장 잡힌 일정이 없으면 알아서 요리 연습을 하든 뭘 하든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추세거든. 대신 어떤 선생님한테든 부탁하면 이것저것 가르쳐 주시긴 하지만 말이야.
오늘도 딱히 할 게 없어서 서로 안면이나 익힐 겸 장난이나 쳐볼까 했는데, 올해 후배님들은 우리랑 다르게 눈치가 좋네. 배우가 나쁜 탓도 있지만."
그 말에 일행 사이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그나저나 할 게 없다니, 정말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건가?'
모처럼 힘들게 들어온 대회반에서 학생들이 하릴없이 놀게 놔두지만은 않을 텐데.
그런 내 의문을 불식시키듯 효민 선배의 말이 이어진다.
"아, 그럼 오늘은 간단하게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좀 가져볼까?"
'자기소개라도 시킬 생각인가.'
거 참, 또 지루한 시간이겠다 싶은 마음이 들던 그때, 효민 선배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나의 예상을 깨부쉈다.
"요리사가 서로를 알려면 요리를 해봐야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서로한테 요리를 만들어주는 시간을 가져보자. 재료는 이 실습실 안에 있는 거라면 뭐든지 써도 좋아. 물론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야 한다? 나도 그럴 거니까. 실망시키면 안 돼?"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1학년 일행을 비롯한 윤재 형까지 굳고 만다.
저 기라성같은 요리인들 사이에서도 당당한 1등성으로 빛나는 안효민 선배가 실망하지 않을 요리를 만들라니,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루할 것 같다는 건 취소해야겠네.'
내 입가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점점 번져나가고 있었다.
"뭐야? 나도?"
"당연하지. 안 할 생각이었어?"
"…… 아니, 해야지."
괜히 일찍 왔다가 거미줄에 걸린 꼴이 되어 버린 윤재 형의 표정이 볼만했던 것 또한, 내가 웃는 이유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