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신고식.-1-
"여러분 모두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점심 맛있게 먹고 내일 봅시다."
─예.
같은 날 수요일.
오늘은 4교시 오전 수업밖에 없는 날.
담임선생님이신 박예휘 선생님이 종례를 마무리하며 보낸 인사에 입을 모아 대답한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누구에게 뒤질세라 우당탕탕 거리며 자리를 박차는 아이들. 무슨 자리 차지하기 게임마냥 순식간에 저들끼리 짝을 맞추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재빠르다.
짐은 밥을 먹은 다음에나 챙겨갈 생각인지 누구 하나 가방을 들고 가는 녀석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턱을 괸 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내 어깨를 툭툭 건드는 손길. 철정이 녀석이다.
"야, 뭘 멍하니 앉아 있냐. 밥 먹으러 가자."
"어."
배고프다고 투덜대며 자리를 대충 정리해놓고 일어서는 철정을 따라 일어서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을 건넸다.
"야 철정아."
"왜?"
"너는 동아리 어떤 걸로 신청했냐?"
"나? 한식 심화1로 했는데?"
"한식 심화?"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중식 심화로 할 줄 알았는데.'
저번에도 말했듯이, 김철정은 고급 중화요리 전문점의 3대 독자 출신. 그렇기에 당연히 그쪽으로 갈 줄 알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한식이 튀어나왔다.
뚱한 얼굴로 대답한 김철정이 내게 되묻는다.
"너야말로 대회반 할 수 있겠어? 매일 공부에, 요리 연습에, 대회반까지 끼면 몸이 한 세 개는 있어야 할 텐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확실히 내가 봐도 암울한 상황을 예리하게 짚은 질문이었다. 가능한 한 무덤덤하게 넘기려 하는 내 시도를 비웃는 것처럼, 녀석이 더욱 질문을 가했다.
"어떻게든 되겠지는 무슨. 네 뚝배기나 몸뚱어리 중에 어느 쪽이 됐든 그게 먼저 어떻게든 되겠다."
할 말이 없다.
"……."
"봐봐 노답이지? 당장 점심 먹고 나면 동아리 시작할 텐데. 감당되냐?"
왜냐하면, 오늘 오후는 수업이 없는 대신 그 자리를 동아리 수업이 꿰차고 있으니까.
당장 눈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살인적인 스케줄의 나열에 머리가 띵해지기 시작했다.
'보자, 일단 대회반 들어가면 대회 연습도 해야되고, 중간고사도 5월 중순이니까 공부도 남은 진도 빨리 빼둬야돼…….'
그나마 실습 계열 중간고사는 정말 아무 걱정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그나마 내게 남은 마지막 안도감이었다. 전통적으로 성심조리고의 실습 시험은 중간고사 때 자격증 실기 시험 식으로 한 번, 그리고 기말고사 때 창작 요리로 한 번이니까.
'게다가 시험 메뉴도 수업 때 배운 것 중에서 나오니까…….'
아무리 박예휘 선생님이라고 한들 너무 어려운 것만 골라서 하라고 시키진 않을 것이다. 아직 1학년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걸 빼놓는다고 쳐도 나머지가 좀…….
교과목 시험은 요즘 들어 점점 진도가 맞춰지고 있긴 해도 시험 때 점수가 좋게 나오리라 기대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는 수준.
대회반…….은, 뭐. 대회반은 나중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1학년에게는 그렇게 크게 엄청난 부담이 가는 것은 아니고, 나도 충분히 경험이 있으니까 딱히 걱정될 것은 없다.
그래. 걱정말고 열심히 내 할 거 하다 보면 뭐든 잘 안 되겠는가. 이런 걸로 좀 힘들다고 칭얼대서야 미래의 나보다 더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의 내가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어도, 상황 자체는 지금이 훨씬 좋은 것을 위안으로 삼자.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었음에도, 급식실로 가는 내 발걸음이 묘하게 무거운 것은 숨겨지지 않았다.
***
"안녕!"
"응? 아, 너냐."
"반응 뭐야. 좀 더 반가워하란 말야."
팩트리어트 미사일로 변해 버린 철정이 녀석의 팩트 폭격에 침울해지기도 잠시. 어차피 내가 하기로 한 일인 데다가, 이미 돌이킬 수도 없게 됐으니 걱정을 내려놓고 밥 먹는 것에나 집중하던 내게 백예은이 찾아왔다.
한 손에 들린 식판에는 오늘도 산더미 같은 양의 밥.
그 광경에 슬슬 익숙해진 덕분인지 덤덤하게 '어, 또 왔네.' 같은 표정을 지은 철정이 인사를 건넨다.
"안녕."
"응! 철수도 안녕!"
"누구냐 그게. 난 철정이야."
"그래, 철구야!"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헤헤. 농담이야~."
내 맞은편에 앉은 철정이와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옆에 앉는 백예은. 그 식판에 담긴 밥을 보며 저번 시험이 끝난 뒤에 이 녀석에게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바쳤던 기억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때 몇 인분을 만들었더라…….'
적어도 나는 결코 다 먹지 못할 양이었다. 덕분에 계란을 몇 개를 썼는지……
그렇게 괴로운 기억을 동반한 사색을 백예은이 방해하며 나섰다.
"나 옆에 앉아도 돼?"
"말 안 해도 앉을 거잖아."
"그럼 앉을겡."
"거 봐라."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옆자리를 꿰차는 모습에 작게 숨을 내쉬고는, 수저를 잠시 식판에 내려놓은 채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웅?"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오늘의 메뉴인 피자를 한입에 한 조각씩 욱여넣고 있는 백예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볼이 꼭 햄스터 같다.
"…… 아니, 미안하다. 다 먹고 말하자."
─끄덕끄덕.
"…… 하아."
모르겠다. 나도 일단 밥이나 먹자. 모처럼 빵식인데 따뜻할 때 먹어야지.
입으로는 피자를 씹으며 손에는 포크를 잡고 발사믹 드레싱이 뿌려진 카프레제 샐러드를 휘젓는다.
적당히 뒤 섞인 샐러드 속, 큐브 모양으로 잘린 토마토, 아보카도, 모짜렐라 치즈의 적, 녹, 백색이 서로의 색채를 뽐낸다.
"음. 오늘도 맛있네. 진짜 밥 때문에 등교하는 것 같아."
"솔직히 좀 인정."
"웅!"
"너는 그냥 조용히 먹어라."
밥 먹을 때 굳이 말하려 들지 말고, 좀.
어차피 좀 늦게 온 거 매점에서 콜라나 사갖고 오지 않은 자신을 타박하며 식판을 반쯤 비웠을 때, 숨 막히는 급식과의 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전쟁영웅 백예은(17)이 티슈로 입을 닦고는 말했다.
"하아, 맛있었다!"
"그래. 맛있어 보이게 먹더라."
벌써 싹수가 보였다. 저렇게 와구와구 먹으면서도 허겁지겁 먹는다거나 게걸스럽게 보이는 게 아닌 복스럽게 보이도록 먹는다는 점에서 특히.
'얼굴 빨인가…….'
패완얼이라는 말도 있잖은가. 어쩌면 먹방의 완성도 얼굴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것 같은 백예은의 모습에 나 또한 먹는 것을 잠시 멈추고 질문했다.
"밥 다 먹었으면 여기 온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이유가 없음 옆에도 앉으면 안 돼?"
뾰로통 하니 묘하게 삐졌다는 투로 말하는 백예은에게 털털한 웃음으로 답한다.
"해 본 말이야 해본 말. 이따 대회반 때문 맞지?"
"응?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기는. 네가 밥 먹을 때 나 찾아온 게 대회반 일 말고 더 있냐."
"꼭 난 무슨 일 없음 너 안 찾아오는 줄 알겠다?"
짐짓 삐진 표정을 짓는 녀석.
솔직히 "맞잖아."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지금도 댓 발은 나와 있는 입이 더 튀어나와서 오리 주둥이가 될 것 같아 그만뒀다.
"내 말은, 좀 별일 없이 얼굴 좀 보고 살자 그거지."
"어머? 혁이 혹시 나 보고 싶었어? 그럼 말을 하지~."
아니. 딱히 막 보고 싶진 않았는데.
이 말도 그만뒀다.
이제야 좀 얼굴이 펴진 녀석.
잠시 큼큼하고 헛기침 하더니 말을 잇는다.
"아무튼, 좀 이따 첫 대회반 활동이잖아?"
"그렇지."
"혁이 너 대회반 명단 받은 건 잘 봤어?"
"명단? 아, 그거."
선생님이 대회반을 따로 불러내 배부했던 프린트물이 있었더랬지.
"아, 그거? 뭐야. 하나도 안 봤어?"
"딱히? 애당초 그걸 굳이 봐야 돼?"
무슨 군대 선임들 관등성명 외우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흐응. 난 좀 걱정인데."
"왜 또. 뭐가?"
"내 친구 중에 언니가 여기 다닌다는 애가 있거든? 걔네 언니 말로는 대회반 2학년 중에 되게 무서운 사람이 있대서."
"2학년?"
묘하게 겁주는 것 같은 어조로 말하는 백예은의 말에 곰곰이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2학년…… 2학년……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알기로 2학년 멤버는 1학기 때부터 내가 전학 가기 전까지 바뀐 적이 없을 터.
존재감이 폭발하는 선배야 한 명 있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좀 다른 의미에서 존재감이 터지던 양반이고.
"뭐, 무서워 봤자 고등학생이지. 뭐가 그리 걱정이야."
"오오, 자신감! 근데 혁이 너랑 나도 고등학생이잖아."
"반대로 말하면 그 사람도 고등학생일 거 아냐. 고작 한 살 차인데 뭐 그리 대단하다고. 요리사면 요리 잘하는 걸로 따져야 하지 않겠냐. 한 살 차이든, 열 살 차이든."
호들갑을 떠는 백예은에게 대충 대꾸하며 손에서 놓았던 포크를 다시 쥐고 카프레제 샐러드를 찍어 입으로 가져갈 찰나, 내 정면에 있던 김철정의 시선이 내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뒤편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포크를 든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맺힌 모습.
어딘가, 되게 싸구려 B급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연출이었다.
"철정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지금 내 뒤에 누구 있냐?"
"……."
아주 작게. 그조차도 기름칠 안 한 지 수십 년은 된 것처럼 삐걱대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설마 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명찰이 2학년 분이시니?"
─끄덕.
"그런데 너도 알 만큼 유명한 분이야?"
─끄덕.
점점 좋지 않은 상황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살짝 옆으로 곁눈질을 해보니, 아이구야. 설마 했던 백예은까지 내 뒤를 보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얘가 이럴 정도라고?'
평소에도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하던 녀석이 이렇게까지 굳을 상대가 대체 누구일까.
"…… 하아, 마지막 질문을 해도 될까."
"그건 내가 대답해 줄게. 후배."
철정이 대신 내 뒤에서 들려오는 대답.
살짝 허스키하고 나른한 느낌의 목소리가 내 귀에 울렸다.
솔직히 말하자.
대회반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던 김철정.
은근 안하무인적인 성격을 가진 백예은.
그런 두 사람이 같이 알고 있고, 이렇게 굳을 정도의 인물은 2학년 중 한 명뿐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는 뜨다 만 샐러드를 다시 식판에 내려놓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질문했다.
"안효민 선배님, 맞으신가요?"
안효민. 대회반 소속 2학년들의 실질적 우두머리이자, 아마 현시점에서는 이 학교 인물 중 일반 대중들에 대한 지명도만 따지면 한 손에 꼽을 사람.
"응? 날 알아?"
그런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듯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배짱이 있는 후배님을 만난 것 같아서 반갑네. 잘 부탁해, 류찬혁 후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