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집으로.-4-
잠시 뒤, 여차저차 다른 준비를 하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이쯤 되면 슬슬 알맞게 레스팅 됐으리라는 생각에 두꺼운 호일로 간이 뚜껑을 만들어 덮어놨던 고기를 살핀다.
아직 후끈한 잔열이 남은 고기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냄새에 벌써 입에 침이 고였다.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다. 이건 성공이다.
"흐흐."
가게 안에 포크는 있어도 나이프는 없기에 주방에서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내야 한다는 게 조금 아쉽다. 스테이크라는 건 직접 칼을 대서 써는 맛이 최고인 법인데.
'하는 수 없지.'
그렇다고 고기를 통으로 집어서 뜯어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아쉬운 마음을 집어넣고 두툼한 고기들을 도마 위로 올린다.
"그나마 이런 건 또 있어서 다행이라니까."
가게에서 종종 생선구이 등을 올릴 때 쓰던 철판 접시가 있는 건 다행이었다. 오븐에 넣어 미리 데워둔 철판 접시 위에 고기의 결과 반대 방향으로 썰어낸 스테이크를 얹는다.
"와오."
내 생각은 정답이었다. 리버스 시어링 기법으로 조리한 스테이크 특유의 색감. 마치 미세한 그라데이션을 넣은 것 마냥 일체화된 고기 내부의 옅은 분홍빛 색채가 마음을 뒤흔든다. 살짝 모자란 미디움 레어로 익었음 증명하는 빛깔이다. 완벽하게 계산대로다.
흡족해진 마음으로 고기 주변을 볶은 야채로 장식한다.
갈색, 노란색, 초록색, 하얀색, 검은색이 골고루 뒤 섞인 한 접시.
내가 보아도 훌륭한 색의 조화라고 자화자찬하며 쟁반에 담는다.
이제 내 음식을 기다리는 고객 분들에게 음식을 내가는 것만 남았다.
"그럼 슬슬…… 아차, 저걸 깜빡할 뻔 했네."
정신을 아주 딴 곳에 두고 다닌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자신을 타박하며 조리대 위에 올라가 있던 카레와 오므라이스용 소스 그릇을 각 쟁반 위로 담는다.
소스 그릇 안에 든 옅은 붉은빛을 띤 소스가, 반짝이며 빛을 흩뿌렸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홀에 앉아 담화를 나누고 있던─주아는 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일행의 앞에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버터 향이 물씬 풍기는 스테이크를 한 접시씩 분배한다.
"와아!"
"어머나."
고기가 나오자마자 화들짝 뛰어오르며 "고기 빳다죠!" 같은 표정을 짓는 주아와 작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어머니, 그리고 이걸 정말 네가 만들었다고? 싶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장님의 모습이 볼만하다.
"어때요. 이 정도면 저도 제법 하죠?"
"어, 어어."
과연 사장님도 짬이 있는 요리사답게 내가 내온 접시가 마냥 쉽게 만든 요리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신 모양인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 파인다이닝에서도 일하셨다고 했던가.'
사장님의 과거사는 자세히 들은 적이 없지만, 사장님도 꽤 경력이 깊은 분이시다.
'뭐, 그건 둘째 치고.'
사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고, 손님들은 그 음식을 앞에 두고 있다. 요리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나와 음식, 음식과 고객. 고객과 나.
'다만, 지금은 그 고객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거지.'
내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해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환한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자, 그럼 간단하게 설명할게요."
핸드폰으로 자기 앞에 놓인 접시를 찰칵찰칵 찍어대던 주아의 손이 멈칫한다. 아직 뭐가 남았냐는 눈치다.
"스테이크를 일부러 두 줄로 썰어왔잖아요?"
그 말을 들은 일행이 스테이크를 살핀다. 그것을 확인한 내가 말을 이었다.
"한 줄은 옆에 소금 접시에 준비한 소금에 찍어 드시거나, 아니면 소금을 그냥 고기 위에 뿌려 드시면 돼요. 그리고 나머지 한 줄은……."
그 말과 함께 내 몫의 쟁반에 올라가 있던 타원형 모양의 소스 접시를 들어보인다.
"이 소스를 쭉 뿌려서 드시면 되고요."
이렇게요.
─치이이이이익!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스를 그대로 스테이크 위에 주르륵 끼얹는다. 뜨겁게 달궈진 철판에 닿은 소스가 한순간 끓어오르자, 사방으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풍미!
솟아오르는 김마저 혀에 닿은 순간 맛이 느껴진다고 착각할 정도로 농후한 향. 자화자찬이지만, 완벽한 연출이었다.
"이걸로 완성입니다."
─짝짝짝!
내 설명이 끝나자 힘껏 박수를 쳐주는 일행들. 자신감이 과하게 차올라 어깨가 빵빵하게 뽕이 들어차는 기분이다.
"자, 그럼 맛있게 드세요."
깊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박수에 대한 답례를 대신했다. 이제 우리 앞엔 맛있게 이 스테이크를 먹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오빠오빠! 이리 와서 소스 좀 다시 부어주라! 동영상으로 찍어서 아웃스타 올릴래!"
근데 이 녀석한테는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다. 좀 그냥 먹어줬으면 좋겠는데.
"하아…… 그래, 알겠다."
그러면서도 거절을 못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천성인가보다.
좋아 죽으려는 주아의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나였다.
***
"으음!"
"어머!"
"우와!"
처음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박춘배는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탄성을 간신히 삼켰다. 찬혁의 어머니나 류주아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그가 느낀 충격은 가히 그들이 받은 충격을 합친 것의 배는 되었다.
'이게 찬혁이가 만든 거라고?'
고기를 입안에 넣고 씹자마자 폭발하듯 터지는 감칠맛의 파도!
레드 와인과 마늘을 비롯한 신선한 생 허브들의 풍미가 고기라는 이름의 벽이 허물어짐과 동시에 일제히 쏟아져 나온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뜨겁게 데운 철판의 잔열에 익을 것까지 계산하여 완벽한 미디움 레어로 구워진 고기. 그 겉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톡톡히 발휘하는 바삭한 크러스트가 부드러운 육질과 대조되어 터무니없는 일체감을 낳는다.
'허…… 대조에서 일체감을 낸다니.'
스스로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었지만, 물극필반.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처럼 극도의 바삭함과 극한의 부드러움이 서로를 상호보완한 것이다.
'소금도 보통 소금이 아니구만.'
솔직히 말해서, 그의 가게에 있는 싸구려 쌈장용 종지에 담겨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평범한 소금보다 훨씬 진한 맛. 살짝 핑크빛이 도는 색채. 이것은…….
"히말라야 암염을 갖다 쓴 거냐?"
놀랍다는 투로 찬혁에게 묻자, 찬혁도 마찬가지로 놀랍다는 듯 그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와,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맛으로 구분이 돼요?"
히말라야 암염. 특유의 분홍색 때문에 핑크 솔트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소금은 바다가 아닌 땅에서 나는 소금 광석을 정제한 것이다.
그렇기에 평범한 소금보다 훨씬 수분기가 적고 단단하여 통후추처럼 갈아서 사용해야 하는 것인데, 이걸 어디서 났나 싶었다.
"학교에서 빌렸어요."
"뭐?"
굉장히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대회반에게 주어지는 특혜라는 말에는 박춘배도 어쩔 수 없이 수긍했지만 말이다.
뭐, 정당하게 가져왔다는데 할 말이 따로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럼 소스는…… 오오!"
이번에는 박춘배도 감히 탄성을 감출 수 없었다.
뜨겁게 끓인 소스를 끼얹은 스테이크의 맛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흐흐흐. 맛있죠?"
"제, 제법이구나."
목소리가 절로 떨릴 만큼의 충격.
와인을 베이스로 삼아 어색한 곳 하나 없이 녹아든 향신료의 맛이 고기 전체를 포근히 감싸는 듯하다.
포크로 살짝 소스를 떠보니, 약한 점성을 띄고 흘러내리는 것이 평범한 시판용 소스의 품질이 아니었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거냐?"
"그거요? 고기 구울 때 나온 기름에다 버터를 녹인 다음, 그걸로 밀가루를 볶아서 루Roux를 만들어요. 그리고 고기를 재울 때 쓴 마리네이드 용액이랑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간을 맞추고 한 번 끓여준 거죠."
"아!"
과연, 단번에 이해가 갔다.
지금 먹는 고기에서 나온 기름과 버터, 그리고 고기를 재울 때 쓴 용액을 섞어 만든 소스라니. 이 고기와 소스를 하나로 묶고 있는 정체 모를 일체감은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었다.
'이 녀석, 어떻게 고작 이주일 만에……?'
박춘배는 눈앞에서 실실 웃고 있는 찬혁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찬혁이 나름 재능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자신이 주방 알바를 시키며 가르칠 때도 평범한 애들 보다 배우는 속도가 빠르긴 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였다고……?'
아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류찬혁이라는 아이의 실력은 결코 이 정도가 아니었다.
성심고의 선생이 그렇게나 가르치는 솜씨가 대단한 건가 싶다가도, 뜬금없이 대회반에 들어갔다는 찬혁의 말을 떠올리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뭔가…… 뭔가 이상해.'
그렇게 의문스런 눈길을 찬혁에게 향할 때였다.
"와, 오빠 요리 무지 잘한다! 되게 맛있어!"
"어쩜. 엄마가 만든 것보다 훨씬 낫네. 박 사장님은 어떠세요? 입에 좀 맞으셔요?"
"예? 아, 아. 예. 물론이죠."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모녀의 감탄에 박춘배의 신경이 잠시 돌아가고, 그 사이를 미식에 대한 욕구가 들어찬다.
─우물우물……
'뭐, 어때. 일단 먹고 생각하자.'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의심마저, 폭력적인 맛의 해일 앞에 굴복하는 순간이었다.
***
"덕분에 호강했구나. 고마워, 아들."
"아, 배부르다. 잘 먹었다, 찬혁아."
"어떡해…… 너무 많이 먹었어. 살찌겠다…… 히잉……!"
잠시 후, 식사가 끝나고 만족하신 얼굴로 커피를 홀짝이는 어머니와, 배를 두드리는 사장님. 그리고 빈 철판 접시를 포크로 긁어대며 칭얼대는 주아와 마지막으로 나까지.
네 사람의 앞에는 오로지 텅 빈 접시만이 남아 고기와 야채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내보이고 있었다. 인당 500g에 달하는 고기면 결코 적지 않은 양인데, 다들 대단한 식성이다.
"너는 소스까지 긁어먹고 그런 소리를 해봤자……."
"아 맛있는데 어떡해! 그럼 남길까?"
"남기는 것보다야 깔끔하게 먹는 게 백배는 낫지. 잘 했어."
핀잔을 주자 접시를 긁던 포크로 나를 가리키며 성을 내는 주아의 손을 어머니가 톡 치시며 말씀하신다.
"식기를 사람한테 그렇게 들이대면 안 되지. 오빠가 열심히 만들어준 걸 고맙다고 하진 못할망정. 자, 얼른 오빠한테 인사해."
"힝…… 네에. 잘 먹었어, 오빠."
"오냐. 알면 됐다."
좀 배를 채워주니 호칭이 얘나 너에서 오빠로 바뀌었다. 괄목할 만한 성과다.
적당히 접시를 한 곳으로 쌓아 치운다. 중간에 어머니가 나서셔 도우려 하셨지만, 이번에는 사장님이 나서서 어머니를 앉힌다.
"이렇게 맛있는 걸 대접받았는데 치우는 것까지 맡기고만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저랑 찬혁이랑 같이 얼른 치우고 오겠습니다. 편히 쉬고 계세요."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방문한 입장인데……."
"에이, 괜찮다니까요. 자, 찬혁아 얼른 가자."
"옙. 엄마는 쉬고 계세요. 10분도 안 걸려요."
어머니가 일어나실세라 손에 잡히는 접시들 위주로 재빨리 쓸어 담고 자리를 떴다. 사장님도 마찬가지다.
"저이들은 이럴 때는 꼭 손이 잘 맞아."
어머니의 불평이 내 등을 따라 달려왔다.
어쩌겠는가, 서로 생각이 닮은 탓에 이러는걸.
사장님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손에 들린 접시 더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그나저나 류주아. 너도 좀 움직여봐라. 어떻게 애가 이럴 때만 벙어리가 되냐.
모두가 만족한 저녁 만찬 뒤, 내게만 남은 작은 불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