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집으로.-3-
가끔 사람 사는 데 귀찮은 맛도 있어야 한다는 사장님의 말. 개인적으로 공감은 잘 가지 않는 말이었다. 어차피 사는 거 귀찮은 일이 없는 게 장땡이지 싶었던 마음.
그런데 점점 커가며 어떨 때는 그게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예를 들어 사장님이 귀찮은 일을 싫어했다면, 그때 가게 뒷문에서 궁상을 떨던 나를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것도 비슷한 경우다.
"으흐흐……."
어디 가서 감히 주문하기도 꺼려지는 국내산 한우의 채끝살 2kg!
나현주가 카레 만드는 걸 도와주고 일당 대신 받은 물건을 고이 모셔놨다가 가족들과 같이 먹기 위해 챙겨온 것이다.
'다시 봐도 일당 치고는 너무 비싸지만.'
이번 주 같이 실습수업을 했을 때 현주가 내게 말하기를 1+급 고기라는 것 아닌가! 투쁠, 투쁠 하는 사람들이 많아 1+등급이 얕보일 수도 있겠지만, 1+ 채끝 정도면 적어도 1kg당 6~7만원을 호가한다. 2kg이면 12~14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약 4시간 정도의 시급으로!
"으흑, 감사합니다. 현주 선생님……!"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육즙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정말 위대하십니다. 선생님.
그렇게 얼마나 마음속 깊이 감사를 표하고 있었을까,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누군가의 손길. 어머니 아니면 주아겠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역시 주아가 나를 치고 있었다.
"우와, 뭐야. 얼굴 상태 실화냐. 뭐 하고 있어?"
내 감동에 젖은 얼굴을 보고 잠시 질색팔색한 표정을 지었던 주아가, 내 앞에 꺼내져 있는 물건을 보고는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야 그게?"
"보면 모르냐?"
"그게 뭔지 알고."
아, 하긴. 고기를 쓰기 전에 마리네이드를 좀 해둔다고 두꺼운 비닐을 써놨더랬지. 그냥 보고는 모를 법도 하다.
"이따 사장님 가게에 다시 들르기로 했잖아. 그 때 쓸 거야."
"식재료였어?"
놀랍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주아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아까와는 달리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호들갑을 떤다.
"뭔데뭔데? 무슨 재룐데?"
"안 알려줌."
"아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 봐."
어깨를 잡고 흔드는 녀석의 손을 격투기 선수가 탭으로 항복 선언을 하듯 툭툭 쳐냈다.
"고기야 고기. 이 오빠가 두툼한 고기 한 번 못 썰어본 네가 가여워 친히 챙겨오신 물건이다."
"꺄아아악! 오빠 사랑…… 아니, 좋아해! 오빠 최고!"
거기선 사랑한다고 한번 해주라. 왜 중간에 끊고 벌레 씹는 표정이 되는 거냐. 사실 나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단 말이다.
"근데 고기 살 돈은 어디서 났어? 그것도 학교에서 가져온 거야?"
"아니. 고기 구워 먹겠다고 이렇게 덩어리째 가져갈 수 있겠냐. 이건 친구한테서 받은 거. 집이 도축공장 한다더라."
"도축공장?"
"…… 정육점 비슷한 거야."
"그럼 그 사람은 맨날 고기 먹겠네. 부럽다."
그야 그럴 것 같기는 하다.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는 해도 단백질이 부족한 애한테서 나올 몸이 아니기는 하지, 현주 걔는.
고기 확인은 여기까지. 어제 저녁에 마리네이드를 해놨으니 이따 밥 먹으러 갈 때면 딱 시간 맞춰 숙성이 끝나 있을 것이다.
나는 바깥으로 꺼내서 잠시 상태를 보고 있던 고기를 냉장고로 되돌려놓고,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아니 이 녀석아. 이게 다 뭐냐?"
저녁 8시. 가게에 도착해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주방에 옮기는 것을 본 사장님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뭐긴 뭐예요. 먹을 거지."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해왔냐는 뜻이다."
사장님의 황당하다는 말에 나는 아이스박스에서 꺼내든 물건들을 살폈다.
마리네이드 중인 고기, 양송이, 새송이, 파프리카, 아스파라거스, 그 외 기타 등등.
'많이 가져오긴 했네…….'
아무리 그래도 이걸 다 재료실에서 삥땅친 건 아니다. 학교 앞 마트에서 사온 것일 뿐. 집 근처에서 사지 왜 무겁게 거기서 샀느냐 묻는다면, 그 마트가 학교와 제휴된 곳이라 그렇다. 재학생한테는 할인율이 높으니까. 특이한 재료도 많고.
'무슨 수험표 든 학생 같네.'
속으로 큭큭 웃으며 놀란 얼굴로 아이스박스의 내용물을 살피는 사장님에게 말한다.
"사장님도 가서 쉬고 계세요. 제가 알아서 준비해서 갈게요."
"됐다 인마. 널 축하하려고 하는 파틴데 제일 고생하는 게 너면 어쩌자는 거냐."
"저만 고생해서 합격했나요. 다 어머니나 사장님이 힘껏 뒷바라지해 주시고 가르쳐 주셔서 그런 거지."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이상함을 느껴 그쪽을 돌아보니, 되게 이상한 걸 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계신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 뭐 힘든 일 있니? 학교가 그렇게 힘들어?"
"……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긴 한데, 막 사람이 이상해질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 대체 다들 왜 그래요?"
내가 뭐 철 좀 들면 안 돼?
뾰로통한 눈길로 사장님을 쏘아보니, 사장님은 뒤통수를 긁적이실 뿐이다.
"됐으니까 얼른 가서 쉬고 계세요. 한 30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으니까요."
"그래, 알겠다."
내 거듭된 재촉에 결국 마지못해 주방을 나서는 사장님을 배웅한 나는 다시 조리대로 돌아와 섰다.
"…… 오랜만이네."
고등학교 3년. 여러 업장을 떠돌며 5년. 해외요리학교 3년. 해외 스타지에 생활 2년. 부산에서 5년. 마지막 호텔에서 약 10년. 약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될 줄이야.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하지만 설사 이 고사성어의 주인인 할아버지였다 한들 사람이 과거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셨을 거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이제 슬슬 요리를 시작할 시간이다.
재료는 방금 아이스박스에서 꺼내면서 전부 확인도 끝냈고, 지퍼백에 담기 전에 다 깨끗이 씻고 다듬어 놨으니 이대로 요리에 쓰면 된다. 그럼 다음은 고기 확인이다.
─주르륵.
"으쌰."
고기를 마리네이드하던 용액을 비닐에 구멍을 낸 뒤 기울여서 빼내준다.
"이걸 버리기는 아깝지."
커다란 냄비에 담기는 붉은빛을 띈 액체. 이것이 바로 마리네이드 용액이다.
비닐에 난 구멍을 조금 더 크게 벌리자,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선홍빛 고기. 와인의 색채를 잘 머금은 것이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인다.
바깥으로 꺼낸 고기의 겉면을 키친타월을 이용해 잘 닦아 물기를 최대한 없애준다. 지금부터 내가 할 요리는 고기 겉에 수분이 너무 많이 묻어 있으면 하기 힘든 요리니까.
"자, 그럼. 오랜만에 만들어볼까."
지금부터 내가 만들 요리의 이름.
그것은 다름 아닌 고기요리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요리.
"조리 시작이다."
스테이크다.
***
스테이크라는 요리는 언뜻 보면 굉장히 단순한 요리다.
그냥 두툼하게 썬 고기를 구워서 먹는 것. 그것뿐이니까.
'근데 만드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지.'
그래. 문제는 그거다.
이 음식을 만들 때 정해진 요리법이 그냥 굽는 게 전부라는 것.
재료도, 간도, 굽는 방법도,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정해진 것이 없다.
안심, 등심, 부채살, 채끝살, T본, 그 외 다수의 주재료.
소금, 후추, 허브, 오일, 그 외 다수의 조미료.
프라이팬, 플랫 그릴, 그릴, 석쇠, 숯불, 직화, 수비드, 그 외 다수의 조리도구.
재료와 조리법, 조리도구의 조합만을 따져도 수백 종류 이상의 스테이크가 나온다.
심지어는 육고기만이 아니라 해산물, 연어나 참치 뱃살 등으로 만드는 스테이크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행이지."
적어도 주재료 하나는 확실하게 잡혔으니까.
채끝 정도면 소의 여러 부위 중에서도 끗발이 서는 부위다.
"키키킥…… 무슨 소린지."
오랜만에 사장님 얼굴을 봐서 감화라도 됐나보다. 설마 내가 이런 아재개그를 하고 스스로 웃는 날이 올 줄이야.
아무튼, 내가 준비한 고기부터 보고 가자.
1+등급 한우 채끝 2kg. 마리네이드하여 재운 것을 사용한다.
스테이크를 굽기 전에는 확실한 밑간이 들어가야 한다. 밑간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지만, 크게 두 종류로 나누자면 시즈닝과 마리네이드. 두 분류가 있다.
시즈닝은 이른바 말하자면 건조하게 양념하는 것이다. 소금이나 후추, 허브 등을 그냥 생으로 뿌려서 골고루 묻혀주면 그게 시즈닝이다.
마리네이드는 습식이다. 오일이나 와인 같은 액체에 조미료 등을 첨가하여 그 속에 고기를 푹 재우는 것.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돼지갈비도 마리네이드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각 양념법마다 각각의 장단점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대용량 조리를 할 때의 난 마리네이드를 더 애용했다. 풍미도 잘 살고, 솔직히 편했으니까.
"킁킁. 음, 향도 잘 배였네."
겉에 묻은 수분기를 확실하게 닦아낸 고기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와인과 허브의 향.
올리브 오일, 레드 와인, 로즈마리, 타임, 마늘, 소금, 후추를 섞어 만든 마리네이드 용액이 잘 스며든 것이 느껴진다.
─서걱, 서걱.
"오우야. 고기 때깔 봐라."
고기를 크게 숭덩숭덩 썰어 단면을 벌려 확인하니, 한우 특유의 마블링과 선홍색 살코기의 대비가 선명하다. 이런 게 바로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광경이라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배가 고파지는 느낌인데.'
큼직하게 4등분을 낸 채끝살.
그것을 오븐 팬 위에 올린 그릴에 깔아 고기 사방으로 열기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들고, 그대로 100도로 예열한 오븐에 넣는다.
여기서 이상함을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팬으로 겉을 굽지도 않고 바로 오븐에 넣는다고?
'리버스 시어링이라는 거지.'
리버스 시어링. 이 조리법은 말 그대로 거꾸로 시어링을 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시어링이란 고기의 겉면을 바삭하게 익히는 조리법을 뜻한다.
원래 스테이크의 조리법은 겉을 먼저 익힌 뒤, 나중에 속을 익히는 것이 주된 방식이었으나, 2010년대 후반에 와서 새로운 조리법이 등장한다. 그게 바로 리버스 시어링. 겉과 속을 오븐 등의 기구로 동시에 익힌 뒤에 마지막으로 겉을 시어링 해주는 역순 조리법의 등장이었다.
이 방식에는 기존의 방식에 비해 월등한 장점이 존재한다. 바로 고기 내부의 육즙 손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장비만 확실하면 익히는 정도를 실수할 일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것 등등.
'단점이라면 뭐, 시간이 좀 더 걸린다는 거지.'
반대로 말하면 그 외의 단점이 없었다.
고기 속에 꽂아 넣어 고기 심부의 온도를 재는 탐침探針형 온도계로 내부 온도가 58도가량이 될 때까지 온도를 확인하며 시간을 들여 익히는 동안, 미리 준비했던 야채를 다듬어 팬에 넣고 볶아 스테이크에 곁들일 가니쉬를 만든다.
─삑. 삑. 삑.
"오."
시간이 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온도가 됐다.
설정된 온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온도계의 알람소리에 오븐에서 고기를 꺼낸다.
꼭 물에 삶은 것처럼 옅은 갈색빛이 도는 고기.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치이이이익!
식용유에서 살살 연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예열한 프라이팬에 고기를 얹자마자,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빠르게 익어간다. 이렇게 확실하게 예열이 된 프라이팬으로 굽지 않으면, 기껏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며 지켜낸 육즙이 손실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높은 온도에서 익혀줘야만 고기 겉면에 크러스트라 불리는 잘 구워진 흔적이 생긴다. 고기의 식감에 변화를 주는 중요한 작업이다.
이렇게 고기의 모든 면에 바삭한 크러스트를 입혀준 뒤, 잠시 시간을 들여 레스팅을 해주면……
"좋아. 잘 됐다."
스테이크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