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집으로.-2-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소란을 겸한 식사를 끝마친 뒤. 어머니는 내가 가져온 과일들─재료실에서 가져온─을 깎아 후식으로 내놓으셨다.
"와, 뭐야 이거. 되게 맛있다."
"어머, 정말이네."
"그렇죠?"
처음 내가 아이스박스에서 과일을 꺼낼 때에는 뭘 이런 걸 가져왔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어머니였으나 실제로 드시고계신 지금은 잘 가져왔다며 날 칭찬했다. 입맛이 쓸데없이 까다로운 주아 녀석도 좋아하는 걸 보면, 확실히 물건은 물건이다.
"이렇게 맛있는 과일은 어디서 났어?"
"그거? 학교에서 가져온 거. 요리사 학교잖아."
"뭐야. 되게 비쌀 것 같은데. 이렇게 맘대로 가져와도 돼?"
"괜찮아. 다 써도 된다고 허락 맡고 가져온 거야."
주아는 학교에서 맘대로 가져다 먹어도 되는 거냐고 걱정했지만, 딱히 문제는 없다. 지난 금요일부터 정식적으로 대회반 소속이 된 나다.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학교에 비치된 재료를 쓸 권한이 있고, 실제로 몇몇 선배들은 그냥 자기 연습할 재료 챙길 겸 먹을 거라고 가져가도 선생님들은 그냥 넘어가신다.
대충 그런 논조로 설명하니, 눈이 휘둥그레진 주아가 정말이냐는 듯 되묻는다.
"진짜? 오빠네 학교에선 이렇게 좋은 과일을 음식 재료로 쓰는 거야?"
"그걸 놀라네."
얘는 지 오빠가 대회반으로 뽑힌 것보다 과일이 더 중요한가 보다. 하긴, 대회반이니 뭐니 해도 학교 바깥사람들한테는 딴 나라 이야기일 테니까.
"대회반이면 입학하기 전에 네가 꼭 들어가고 싶다고 한 거기니? 정말 들어갔어?"
"예. 어떻게 시험에 합격한 덕분에요."
"얘는 연락 한번 없더니 그걸 지금 말하니? 미리 알았으면 축하 선물이라도 준비하는 건데."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시는 어머니. 묘하게 삐진 말투라 속히 달래드린다.
"선물은 무슨 선물이에요. 뭐 대단한 거 했다고. 그리고 시험 합격 발표도 어제 학교 끝날 때나 안 거라 오늘 말씀드리려고 그냥 말 안 했던 거예요."
구라다. 대회반 합격한 건 월요일 시험 끝나자마자 알았다.
그런 내 거짓말 섞인 변명에 어머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까놓은 사과를 씹으신다. 평소엔 우리 먹으라고 과일을 깎아놔도 잘 안 드시는 분이 저렇게 드시는 걸 보면 학교에서 가져오길 잘했다 싶다.
"아무튼, 저는 괜찮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가고 싶은 데 있음 말씀해 보세요."
"으음…… 네가 괜찮다면야……."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시던 어머니는, 이윽고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아!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니?"
"뭐가요?"
"박 사장님 가게. 오늘 다 같이한 번 들려보자."
아.
깜짝 놀랐다. 솔직히 좀 당황스러운데.
"…… 사장님 가게요?"
사실, 생각을 안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전화한 날 이후로도 종종 전화는 했었고 오늘 내가 온 것도 알고 계신다.
'내가 말했으니까.'
누가 말을 안 해도 갈 생각이긴 했지만, 어머니 입에서 사장님 소리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또 날 신경 쓰느라 그러시는 줄 알고 만류했으나, 어머니는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거긴 제가 내일 가볼 거니까 오늘은 다른 데 가는 게 어때요?"
"얘는. 박 사장님한테 인사도 드릴 겸 다 같이 가보자는 거지."
"그렇다면야 뭐……."
딱히 말릴 명분도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의 인용인지, 어머니는 식사를 마친 접시들을 한 쪽에 치워두었던 쟁반에 담으며 말씀하셨다.
"찬혁이 너도 얼른 씻고 준비하렴. 곧 있으면 쉬는 시간이실 텐데 시간 맞춰서 들리게."
"아, 예."
우리 어머니지만 대단한 행동력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
벌써 3월도 중순에 다다라가는 시점.
저 아래에 따뜻한 쪽에서는 벌써부터 개화 전선이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하니, 새삼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돌아오기 전에는 한겨울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먹었던 뜨끈한 어묵탕 한 그릇이 생각났다. 우스운 건, 그때보다 지금 내 주머니 사정이 낫다는 것이다. 적금 같은 걸 제외 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러고 보면 지금 내가 주식을 할 수가…….'
"뭘 그렇게 멍하게 있어? 얼른 들어가자. 아직 춥단 말야."
"어, 그래."
씁. 오빠가 사색을 좀 하려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뭐가 그리 추운지 중학교 올라간 기념으로 선물해 줬던 외투를 여미며 나를 재촉하는 주아 녀석. 그런 참을성 없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서 들어가시는 어머니의 뒤를 따른다.
가게 문 앞에 달린 휴식시간이라는 문구. 시간 맞춰 잘 온 듯 싶다.
─딸랑.
"안녕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지금은…… 어? 찬혁이 어머님 아니십니까?"
"안녕하세요, 사장님."
우리가 손님인 줄 알았는지 문 열리는 소리에 급하게 나오다가, 일행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는 사장님의 목소리. 이내 그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린다.
"아이고,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연락이라도 먼저 해주셨음 식사라도 준비했을 텐데!"
"일도 힘드실 텐데 저희가 폐를 끼칠 수가 있나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폐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서로 고개를 거듭 숙이며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한두 번 만난 것도 아니면서 매번 저러는 걸 보면 두 분 다 정성이 지극하다. 그렇게 어머니를 안으로 모시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사장님. 그가 나를 보며 말한다.
"어, 왔냐. 들어와. 아, 주아도 어서 들어오렴."
"아니 잠깐 기다려 봐요."
뭐야 방금 그 온도차.
"왜 그래?"
"거의 3주 만에 보는 사람한테 지금 좀 반응이 섭섭한 것 같지 않아요?"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그럼 무슨 레드카펫을 깔아주리?"
그럼 자긴 들어가겠다며 휙 등을 돌리는 아저씨의 모습에 굳게 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쪽은 귀한 시간을 빼서 쉬는 것도 마다하고 만나러 왔건만.
나는 분한 감정을 끝내 삼키고 가게로 들어서는 사장님의 등을 쫓았다.
***
"아, 어머님. 마실 건 어떤 걸로 준비해드릴까요? 커피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주스로 하시겠어요?"
"무슨 그런 걸 또,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얼른 앉으세요."
"아저씨~! 저는 주스로요. 오렌지!"
"아하하하, 그래, 주아야."
"얘는, 사장님 귀찮게 왜 그러니? 안 주셔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귀한 아드님을 반년이나 빌렸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커피 어떠십니까?"
"…… 그럼,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음료를 대접하려는 사장님을 만류하는 어머니였으나, 결국 뜻을 꺾지 못하고 자리에 앉으셨다. 그 와중에 끼어들어 당당하게 자기 마실 걸 요구하는 주아를 보면 쟤도 참 얼굴 가죽이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 사장님. 저한테는 안 물어봐요?"
"너? 야 너는 가게 어디에 뭐 있는지 다 알고 있잖아. 알아서 찾아 마셔. 아무거나 마셔도 되니까. 아, 술 빼고."
"제가 술을 왜 마셔요!?"
아무튼, 짜증 나는 아저씨다.
하지만, 이걸로 비로소 정말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실 웃는 아저씨와,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부쩍 미소가 늘어나신 어머니. 그리고 사사건건 내 신경을 긁는 이 시절의 여동생까지.
'딱히 커서는 내 신경을 안 긁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시절만큼은 아니었다. 주아 녀석도 은근히 중2병이 세게 걸렸던 케이스인지라.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영문 모를 느낌이 간질간질 어딘가를 간지럽히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속내를 멋쩍은 웃음으로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농담이야 농담. 앉아 있으면 갖다 줄 테니까. 너도 주스 맞지?"
"됐어요. 저도 준비하는 거 도울게요. 아, 그리고 전 커피요."
"커피? 언제부터 네가 커피를 마셨다고?"
"얼마 안 됐어요."
"그래? 뭐 네가 마신다는 거 말릴 생각은 없다만, 너무 어린 애가 커피 마시면 잠 못 잔다."
말은 짐짓 걱정된다는 투로 말하면서, 표정은 어린애 놀릴 생각이 가득한 저 웃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부아가 치민다는 말이 절절히 이해가 갔더랬지.
'그래도, 머리가 좀 굵어지니 예전만큼은 아니네.'
그냥 술술 넘어가지지는 않아도, 예전처럼 격하게 반발하고 싶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제 나이면 잠 좀 안 자도 괜찮아요. 잠 잘 시간에 공부나 더 해야죠."
"뭐?"
무슨 꼰대 같은 말을 하고 있냐는 표정을 지은 사장님. 솔직히 좀 웃기다.
"농담이에요, 농담. 엄마 기다리시니까 얼른 준비해서 가요."
"그, 그래. 그러자."
이 아저씨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알 수 없는 승리감을 느끼며, 우리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
"대회반에 들어갔다니, 누가? 네가?"
"네."
오늘만 두 번째로 보는 사장님의 당황.
사장님도 요리인 인만큼 저 유명한 성심고 대회반의 이름은 종종 들어보셨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내가 대회반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자 저렇게 당황하신다.
'근데 뭔가 좀 화나는데.'
놀란다는 건 내가 대회반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단 것 아닌가. 아니, 사실 원래대로라면 절대 못 들어가긴 했을 테지만.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거리는 사장님. 어머니는 그런 사장님의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그 대회반이라는 곳."
"물론이죠!"
"어머!"
어머니의 질문에 무심코 큰 소리로 대답한 사장님이, 놀라시는 어머니를 보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곤 말을 이었다.
"성심고에 합격한 것도 솔직히 놀라웠는데, 그 요리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15명 안에 들어간 거 아니겠습니까. 찬혁이 얘가 저한테 요리 배운 게 고작 반년 밖에 안 됐는데 말이죠."
"어머머……."
찬혁아 그게 그렇게나 대단한 거였구나? 라며 시선을 던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나도 모르게 피했다. 이러면 별 대단한 거 아니라고 안 알려드렸던 게 무안 하지 않은가.
그렇게 시선을 피하는 내게 사장님이 묻는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냐? 거기 들어가는 게 보통 힘든 일은 아닐 텐데."
"그냥 뭐, 잘 해서 들어갔죠. 운이 좋았어요."
"운만 좋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사장님.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흔을 넘긴 놈이 어느 날 눈을 뜨니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으면 먼저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축하파티라도 해야지!"
"엄마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축하파티, 축하파티. 무슨 클리셰도 아니고.
'아, 그러고 보니…….'
파티라고 해서 생각났다. 마침 다 같이 먹으려고 가져온 식재료가 더 있다는 것을.
"사장님. 오늘 영업은 좀 일찍 끝나죠?"
"응? 그렇지. 오늘은 한 여덟 시쯤에 닫을 생각인데."
사장님네 가게는 백반 정식집. 회사원들을 상대로 영업하기 때문에 개장 시간과 닫는 시간이 빠른 편이다. 특히 주말에는. 그럼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며 나는 사장님에게 제안했다.
"그럼 이따가 영업 끝나고 다시 올게요. 주방 좀 쓰게 해주실래요?"
맛있는 걸 먹여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생전에도 못 해봤던 사장님께 대접하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