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5화 (25/403)

25. 2차 시험.-8-

"좋습니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예……."

기죽은 표정으로 등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는 이름 모를 다른 반 학생.

마지막 심사를 마친 선생님들의 표정이 어쩐지 후련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하긴, 여기 모인 사람들만 스무 명 좀 안 되는데.'

그 많은 사람들 요리를 한입씩이나마 먹으면 배가 안 부를 수가 없겠지.

여하튼, 방금 그 애를 끝으로 드디어 시험이 끝나게 되었다.

'다들 실력이 있어서 금방 끝나긴 했어도.'

기껏해야 한 시간? 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각자 다른 요리를 만들어 심사를 받는 데 이 정도면 상당히 진행이 빠른 편이다.

마지막 학생의 채점을 끝마친 선생님들이 서로 무어라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이야기가 끝난 듯 채점지를 놓고 우리를 바라보더니, 교장 선생님이 홀로 일어서 테이블 앞으로 나선다.

"시험 결과를 여러분들에게 발표하기 앞서, 먼저 말해 주고 싶군요. 모두 고생 많았어요."

교장 선생님이 우리의 수고를 치하하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1학기 때부터 대회반에 지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으리라 생각합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합격을 한 학생이든 하지 못한 학생이든 항상 그런 마음가짐을 잊지 않아줬으면 해요."

꼭 입학식이나 행사 때마다 하는 헌사처럼 잠시 교훈 담긴 말씀을 전해 주신 교장 선생님.

'돌아온 뒤에는 들어본 적 없지만.'

입학식도 기절한 탓에 빠졌으니까 말이지.

그런 생각에 혼자 속으로 헛웃음을 흘린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애들한테 눈도장이 안 박히는 게 이상하다 싶다.

잡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교감 선생님과 박예휘 선생님이 서로 교차검증을 끝낸 채점지를 전달받은 교장 선생님이 그것을 그대로 손에 쥐고 입을 열었다.

"점수는 총 30점. 선생님들 한 분 당 10점의 배점을 갖고 평가를 진행했어요. 공개는 이름순. 점수에 이의가 있다면 발표가 끝난 다음 받겠습니다."

말 없는 동의를 표하는 학생들을 둘러본 선생님은, 곧 손에 든 채점지에 적힌 점수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

교사들의 채점 과정은 그들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간편한 일이었다.

왜냐고?

적어도 대회반에 들어갈 상위 5명 중 3명은 고민할 필요가 없이 정할 수 있었으니까.

"류찬혁. 30점."

"백예은. 30점."

"안창민. 30점."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 반의 1차 시험 통과자가 2차 시험에서 전부 대회반 입부 커트라인 안에 들어간 것도.

그리고 한 해에 만점자가 세 명이나 나온 것까지도.

하지만 자신의 점수를 들은 세 명 중, 그 누구도 놀라거나 격하게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안창민은 스포일러를 당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고.

백예은은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기만 한다.

찬혁에 이르러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 저녁은 뭐 먹지?' 싶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과연, 보통 걸물들은 아니군.'

안영길은 그 대범함에 속으로 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합격만으로 저렇게나 기뻐하는 남은 두 명과 달리, 저 셋은 마치 이 학교의 대회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같은 태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기대도 앞섰다.

아직 채 성장을 다 하지 못한 천재들.

과연 저 학생들이 시간이 흐르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커다란 기대가.

마지막 순번까지 발표를 끝낸 뒤. 안영길은 들고 있던 채점지를 탁자 위에 올렸다. 기쁨과 실망감이 골고루 섞인─솔직히 말해 후자가 훨씬 많기는 했지만─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발표는 이상입니다. 혹시 궁금한 게 있다거나, 이의가 있는 학생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세요."

그 말에 머뭇거리는 아이들. 안영길도 안다. 1학기 때부터 대회반에 도전한 아이들이니, 그 향상심과 승부욕은 어른 못지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어린 만큼 순수한 욕구는 어른들도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 그러니 다들 무어라 하고 싶은 말 하나쯤은 있는 게 당연하다.

"…… 궁금한 게 있습니다."

모두가 머뭇거리던 사이, 가장 먼저 손을 든 학생이 나왔다.

안영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학생을 지목했다.

"그래요. 조진형 학생. 궁금한 게 뭔가요?"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학생은, 바로 찬혁과 같은 메뉴를 선보였던 조진형이었다.

안영길의 지목에 들고 있던 손을 내린 진형이 입을 열었다.

"제 점수가 이렇게 나온 이유가 듣고 싶습니다."

"진형 학생의 점수요?"

잠시 입을 다물고 기억을 되새기던 안영길이, 이내 다시 말을 잇는다.

"분명 조진형 학생의 점수는 17점으로 압니다."

"예."

"그런데 뭔가 문제라도?"

"…… 이런 점수를 주신 이유가 뭔가요?"

얼마나 억울하면, 어금니를 꽉 깨문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분에 찬 목소리였다.

조진형의 질문에 안영길 또한 웃음기를 지우고 답했다.

"왜 그런 점수를 받았나. 그게 궁금한 것이로군요. 흠……."

"……."

안영길은 잠시 말을 골랐다.

"일단 말해두죠. 진형 학생에게 제가 준 점수는 5점입니다. 교감 선생님과 박 선생님은 각각 6점을 주었죠."

"…… 이해가 안 돼요. 저는 선생님들이 제게 그런 점수를 준 근거가 듣고 싶습니다."

"근거…… 근거라. 참, 쉽게 말하긴 힘들지만, 그래요. 정리하자면 이런 겁니다."

진형의 목소리에 점점 분이 쌓여가는 것에 반해, 안영길의 목소리는 점점 측은함이 더해져간다.

"그 점수를 줄 만했으니까요. 5점. 이런 말을 하기는 미안합니다만, 진형 학생이 만든 까르보나라. 말린 토마토로 악센트를 준 점이 좋았다고 봅니다. 분명 맛은 좋았어요. 학생 수준은 단연코 뛰어넘어 있었죠. 다만…… 그게 전부였어요. 그런 까르보나라를 만드는 레스토랑은 이 나라에만 셀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

"저희는 그냥 요리를 잘하는 학생을 뽑고 싶은 게 아니에요. 대회에 나가 남들과는 다른 창의력과 실력을 겸비하고 본교의 얼굴을 빛내줄 학생을 선발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거죠."

"……."

"그나마도 다른 선생님들은 진형 학생의 나이를 생각해서 가산점을 준 겁니다. 하지만 교장의 입장에 있는 저로서는 원래 생각한 점수 이상의 점수를 줄 수가 없었어요. 그 점,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가엾다는 듯 말하는 것과는 달리 칼날을 내리치듯 단호한 교장의 냉정한 평가에 조진형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퍼뜩 제정신을 차린 그가 이제는 거의 소리치는 것처럼 성을 내며 질문을 이어간다.

"그럼 더더욱 이해가 안 갑니다! 만점을 받은 애들, 쟤네는 뭐가 대단한데요!?"

"…… 그건 내가 설명하마."

가만히 있던 세 사람, 특히 같은 요리를 준비해온 찬혁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조진형.

이번에는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의 문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박예휘가 나서서 그 외침에 답했다.

"우선 너와 같은 까르보나라를 준비한 류찬혁의 경우, 면, 소스, 가니쉬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감성에 따른 맛의 연출과 퍼포먼스가 겸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점수를 준 것은 맛뿐만이 아니라 먹기 전부터 시각적인 만족감을 충족시키려 노력한 그 자세에도 있다. 그런데 너는 어땠지?"

"…… 그건……!"

"평범한 플레이팅에 평범한 조리법. 교장 선생님의 말씀대로 맛은 괜찮았다만, 그것뿐이다."

"……."

그 잔혹하리만치 정곡을 찌르는 문장 구사에 진형은 목소리를 내는 방법조차 잊은 듯, 목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박예휘는 아직 다 안 끝났다는 듯 진형에게 추가타를 가한다.

"그 외에도 백예은은 한식과 일식을 조합하여 기본적으로는 퍽퍽한 김계란말이를 육수와 섞은 뒤, 그걸 청양고추 씨앗이 잔뜩 든 뜰채로 여러 차례 걸러내어 매운맛과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조리했고, 소금에 절여 씨와 껍질을 제거한 오이를 아보카도 페이스트로 감싸 식감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으윽……."

"안창민은 언뜻 보기엔 평범한 에그 베네딕트를 계란이 아닌 메추리알로 조리하여 마치 카나페처럼 만들어냈지. 계란으로 하는 수란도 나름 난이도가 있지만, 메추리알 수란은 그 크기 탓에 비교도 못 할 난이도를 갖고 있다. 각자 나름의 고충이 있었던 거다. 이쯤 되면 네게 부족했던 게 뭔지 알겠니?"

"…… 예."

마치 칼을 쑤셔 넣듯 심부에 박히는 박예휘의 말.

팩트의 폭격에 분함과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얼굴이 빨갛게 물든 조진형의 고개가 하는 수 없다는 듯 힘없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본 학생들은 더 질문할 게 있냐는 박예휘의 물음에 감히 손을 들지 못했다.

"이의 제기 신청자가 없다면, 시험은 이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고생 많았어요."

순식간에 침울해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마무리하는 차운배.

하지만 이미 잔뜩 가라앉은 텐션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잔뜩 풀죽은 분위기 속에서, 시험은 한 학생의 자폭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어때. 내 말대로 됐지?"

"그래 너 잘났다."

"뭐야, 성의 없긴."

시험이 끝난 후, 정리를 끝낸 사람부터 먼저 교실로 돌아가도 좋다는 선생님들의 말씀에 잽싸게 교실을 빠져나온 나였지만,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즐길 새도 없이 백예은에게 꽁무니를 잡히고 말았다. 덕분에 또 하릴없이 이 녀석의 쫑알거림을 들어야 하는 처지다.

"그래그래. 말하기 싫다 이거지? 됐어."

뾰루통하게 뺨을 부풀리고 툴툴대는 백예은.

그 모습에서 묘하게 겹치는 여동생의 그림자에, 나도 모르게 쓰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까 네가 만든 거 맛있어 보이던데. 김계란말이."

"진짜?…… 흥, 이제 와서 칭찬해 봤자다 뭐."

그런 말과는 반대로 얼굴은 헤실헤실 거리고 있다.

퍽 우스운 모습이다.

"미안하대도.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어 보였다고. 선생님들도 한 접시 다 드셨잖아."

"…… 진짜?"

"그렇다니까."

그런 내 아부에 그제야 '그럼 용서해 줄게.'라며 그녀가 웃는다.

괜히 삐져서 또 귀찮게 하진 않겠다 싶어 나도 좀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 나, 아까 혁이가 만든 까르보나라 똑같이 만들어줘! 이따 저녁에 기숙사 주방으로 갈 테니까. 알겠지?"

착각이었다.

충격적인 발언에 살짝 당황 섞인 눈으로 녀석을 쏘아보지만, 백예은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싶은 어벙한 미소만 지어 보인다.

"…… 그래."

"아싸!"

'가끔씩 사람 사는 데 귀찮은 맛도 있어야 한다.'

40대를 위한 명언 모음집을 본 후 사장님이 종종 내뱉던 충고를 떠올리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

"이번 결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흐음……."

학생들이 물러간 실습실 안.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교사들은 방금 있던 시험을 되새겼다.

"확실히, 이번 신입생들의 수준이 높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예. 만점자 세 명도 그렇지만, 그 아래 학생들도 작년에 비해 결코 수준이 낮지 않았어요."

"역시, 두 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는 두 교사를 보며, 안영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 이번 학기에는 그 일을 진행 시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아니 교장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둘째 주를 시작한 학생들인데……."

"저는 찬성합니다."

"아니, 박 선생까지!"

안영길의 의견에 반대 의사를 피력한 차운배였으나, 박예휘까지 그 의견에 동참하자, 망설이던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도 반대하진 않겠습니다만…… 괜찮을까요?"

"아니었다면 생각도 하지 않았겠죠."

"하아……."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짓는 차운배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지은 안영길이 서류가방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들었다.

A4용지보다 조금 더 사이즈가 작은, 얇은 두께의 책자가 테이블로 올라오자 교사들의 이목이 쏠렸다.

책자의 표지에 적힌 <2020년 서울시 배 전국 U-20 요리경연대회 모집 요강>  이라는 문구를 눈에 담은 교사들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이번 대회는, 2학년 만이 아니라 1학년 단독 팀을 꾸려보도록 합시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안영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그것은, 대회반에 합격한 찬혁 일행에게 다시 한번 손수 고생길을 열어주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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