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차 시험.-3-
"역시 뭔가 아는 게 있구나?"
매서운 눈으로 나를 추궁해오는 양희연의 모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 말을 잃은 이유는 방금 희연의 입에서 나온 이름 때문이지만.
'왠지 묘하게 눈에 익는다 했더니…….'
성미설 셰프. 내가 해외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일했던 업장의 오너 셰프다.
여러 해 일하며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나름 비전이라 불리던 레시피까지 전수 해주신 감사한 분인데, 설마 이렇게 연이 이어질 줄이야.
이상하게 저번부터 희연을 볼 때마다 누군가가 겹쳐 보인다 싶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길 가다가 뒤통수만 보고 "어, 친구네."하고 가서 보니 다른 사람인 경우.
'그거랑은 조금 다르지만.'
대충 그런 묘한 기시감을 전부터 느꼈는데, 설마 성 셰프의 딸일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나와 동갑인 딸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일할 시절에는 다른 지역에 있는 셰프의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수업을 받는 중이라며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지만.
과연, 이 거리에서 기억 속에 남은 성 셰프의 모습과 대조하며 보니 여기저기 닮은 구석이 많이 보인다.
다갈색 눈동자나, 갸름한 하관, 지금 다시 보니 오른쪽 눈가에 있는 점 위치마저 똑같다.
'와, 이걸 왜 몰랐지?'
의식하고 보니 거의 판박이었다.
당황스런 기색을 담아 희연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다시 한번 나를 재촉한다.
"맞지? 우리 엄마 알고 있는 거."
"그게 말이다……."
뭐라고 대답하지?
내가 사실 10년쯤 후에 너네 어머니 밑에서 일하다 배웠다? 정신병자 소리 듣기 딱 좋은 말이다.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이내 한숨으로 긴장을 털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어. 말해 줄게."
하는 수 없다는 듯 털어놓는 내 말투에 양희연의 귀가 쫑긋거렸다.
"사실, 내가 절대미각이라는 걸 갖고 있거든?"
"…… 뭐라꼬?"
구라다.
***
"그래서, 니가 절대미각인지 뭐시깽인지가 있고, 중딩 때 어쩌다 우리 엄마 가게에 와가 카레를 먹고 니 혼자 연구해가 맛을 똑같이 따라했다꼬?"
"잘 이해했네."
갑자기 사투리가 섞이기 시작한 말투에 놀랄 새도 없이, 희연은 나를 몰아붙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평소 말투에서부터 느낌이 왔다. 부산에서 일할 시절 봤던 서울말 쓴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지금 그걸 내보고 믿으라 카는 기가?"
"믿기 싫음 말고. 함부로 네 어머니 레시피를 흉내 낸 건 미안해. 누구한테 알려준 적도 없어."
의심이 전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양희연이었으나, 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내가 말한 대로,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되는 거다.
'어차피 사실대로 알려줄 수도 없는데 뭐.'
사실대로 말해 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내 배째라는 식의 행동에 저쪽도 당황했는지 무어라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이다.
─딩동댕동
서로 눈도 피하지 않고 계속 마주 보고 있자니, 1교시가 시작할 때가 되었는지 예비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스피커로 눈을 돌린 나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이러고 있게? 수업 안 들어?"
"…… 니 나중에 보자."
목소리만 들으면 무슨 사람을 씹어 먹을 것처럼 말한다.
휙 등을 돌려서 앞서 반으로 돌아가는 양희연.
괜히 같이 들어갔다 오해받기도 싫어 잠깐 시간차를 두고 돌아가자고 생각하다가, 자기가 화났음을 알리는 듯 성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희연의 등을 보고 떠오른 것이 있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야, 양희연."
대답도 않고 고개만 돌려 이쪽을 째려보는 녀석에게,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네듯 말한다.
"평소에도 그냥 그렇게 제대로 말하고 다녀. 그쪽이 보기 좋다."
"끄지라!"
한바탕 시원하게 소리친 뒤 고개를 돌리는 그녀.
하지만, 살짝 빨개진 귀는 좀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성 셰프가 나 놀릴 때마다 재밌다고 했던 게 거짓말은 아니었네."
셰프의 짓궂은 미소가 머리를 스쳤다. 날 놀려먹은 걸 딸한테 복수하는 거니, 뭐라 말할 자격은 없는 겁니다.
복도 끝을 돌아 사라지는 희연의 모습. 자 그럼, 슬슬 나도 돌아가도록 하자.
***
한발 늦게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철정이 말을 걸어왔다.
"야, 뭐였냐?"
"좀 그런 게 있어."
뭔 대답이 그러냐며 마땅찮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철정에게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성 셰프라…….'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재판 패소로 물게 된 합의금 탓에 그나마 모은 돈까지 탕진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나는 누굴 만나러 다닐 여유가 없었다.
파리로 가서 아주 성 셰프와 연락을 끊어 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자주 연락하지도 않는, 딱 서로 명절날 안부만 묻고 사는 스타일이었다. 서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겼으니까.
'솔직히, 돌아와서 이렇게 빨리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성미설 셰프. 묘하게 발음이 힘들어서 직원들은 다들 성 셰프, 혹은 사장님 등으로 호칭했지만, 사실 성 셰프의 본명은 따로 있다.
카츠라기 미유키. 성 셰프의 본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셰프는 일본인이었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시집온 일본인이긴 하지만.
물꼬가 트이니 점점 셰프가 직접 말씀하시던 이야기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에 여행을 왔다가 부산의 토박이 어부였던 사장님과 만나 서로 첫눈에 반했단다.
처음엔 펜팔 친구부터 시작해서 끝에는 결혼 후 가정까지 이루었으나, 가업으로 내려오던 요리 수행이 끝나기 전에는 집을 나올 수 없어 아이가 중학생이 됐을 쯤에야 한국으로 건너오셨다 했던가.
'그럼 쟤가 말이 서툰 것도 그것 때문인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양희연은 일본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왔고, 고등학생 때 처음 수도권으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과연, 표준어가 서툴 만도 하다.
여태껏 언행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게 되자 좀 속이 시원했다. 이제까지 양희연이 보였던 과민반응을 다시 떠올리곤 쓰게 웃으며 녀석의 자리를 바라보자, 저쪽도 마침 날 보고 있었던 것인지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휙!
'저러다 목 부러지겠다.'
정말 그런 걱정이 절로 들 만큼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돌리는 양희연.
하하, 하고 헛웃음을 한 번 뱉은 나도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슬슬 선생님이 들어올 시간이다.
오늘도 또 하루가 시작된다.
***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정해 준 범위까지 한 번씩 읽어오는 것 잊지 말 것."
─수고하셨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4교시도 끝나갈 즈음.
아이들에게 과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수업을 마무리하는 선생님을 향해 학생들이 다 함께 인사를 드린다.
선생님은 "그래."라며 짧은 말로 인사를 받으며 발을 옮기다가, 깜빡한 것을 기억해낸 듯 "아."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교탁으로 돌아왔다.
"여기 오후에 대회반 동아리 시험 보러 가는 학생이 누구지?"
그 말에 나를 포함한 셋이 손을 든다.
"오, 셋이나 있어?"
이번 반은 수준이 높다며 깜짝 놀라는 선생님.
선생님은 본인의 수첩을 열어 메모를 확인한 뒤, 알림 사항을 전달했다.
"지금 손든 인원들은 오후 실습 시간 때 6층 실습실로 가면 된다."
그것으로 알릴 것은 끝이라는 듯 선생님은 나갔지만, 선생님이 남기고 간 6층이라는 단어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6층이라.'
─두근! 두근!
흥분감과 고양감에 심장이 세차게 방망이질 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 학교의 최상층인 6층에 있는 실습실은, 말하자면 오직 대회반을 위한 공간.
동아리 부실 중, 아니. 이 학교에 있는 그 어떤 곳보다 가장 뛰어난 설비로 무장한 곳이다.
말하자면 성심고의 메이저 리그. 한 번 6층의 설비를 맛본 학생은 다시는 아래에서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된다는 말까지 나오는 장소니까.
"다시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는 한 학기 빠르게.
아직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건 아니지만, 실패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번에는 여기까지가 이 학교에서의 내 한계였지만…….'
이제 내려갈 일은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위.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감히 참견할 수 없는, 오롯하게 요리만이 선 자리.
돌아오기 전 같은 일은 그 누가 됐던 꿈조차 꿀 수 없는 곳까지, 악착같이 올라갈 뿐이다.
***
5교시 실습시간.
조리복으로 환복을 끝마친 나는 가져왔던 재료들을 챙겼다.
"주방에 아이스 박스가 있어서 다행이었네."
반합이 서너 개 정도 들어갈 크기의 아이스박스.
없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겠지만, 반죽의 발효는 온도 상태로 크게 좌우되기에 있는 게 없는 것보다야 백배는 낫다.
"다른 애들은 먼저 간 것 같고……."
내가 잠깐 지하에 다녀왔을 때 교실은 이미 비어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새 다들 실습실로 이동한 모양이다.
텅 빈 교실을 뒤로하고 중앙계단을 통해 6층을 향한다.
"엘리베이터 쓰고 싶다."
중앙복도에 있는 키 카드로 출입이 가능한 엘리베이터는 학생용이 아니다.
다만, 이것도 대회반에 소속된 학생의 학생증으로 출입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져 있다.
과연 실력주의를 표방하는 학교답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편애다.
'하긴, 학생 몇 명 편애하는 걸로 들어오겠다고 난리 치는 신입생이 몇 명인데.'
그 정도 광고 효과면 편애하지 않는 게 더 멍청한 짓이리라.
각 층의 중앙복도마다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5분 정도가 남은 상황.
종은 아직 울리지 않았지만, 조금 더 발걸음을 서두른다.
첫 시험 때부터 늦어서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한층 한층 올라가다 보니, 눈앞에 6층을 가리키는 표시가 보였다.
6층. 한 번은 올라섰던 장소. 하지만……
'아마, 얼마 못 갔겠지.'
대회반은 들어갔다고 끝이 아니다.
분기마다 치러지는 간이 시험에서 수준에 미달하다 여겨지면 강제 탈퇴.
대회에 출전하여 단체, 개인. 둘 다 수상에 실패하면 강제 탈퇴.
학교 내, 외에서 품행이 바르지 못한 것이 적발되었을 경우 강제 탈퇴.
2학기 때는 정말 운이 좋아서 말석으로나마 들어갔지만, 기다리는 고비들을 그때의 내 실력으로 헤쳐 나갈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어떻게 말석으로 들어갔더라…….'
─툭.
"아."
"엉?"
앞을 제대로 주의하지 않고 과거를 회상하며 걷다가, 실수로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살짝 밀려난 몸을 바로 잡으며 상대를 살폈다. '조진형'이라 적인 하얀색 명찰. 나와 같은 색. 동급생이다.
"미안."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한다. 앞을 제대로 안 본 건 내 쪽이었으니까.
그런데, 상대에게서 무어라 답변이 들려오질 않는다.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드니, 상대는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 쯧."
─탁. 탁.
굉장히 언짢은 얼굴로 나와 부딪힌 어깨를 털어내던 동급생이, 이내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내게 말했다.
"눈 똑바로 뜨고 다녀라, 새끼야. 눈깔 확 뽑아 버리기 전에."
그러고는 쌩하니 나를 지나친다.
잘못한 건 나지만 저건 도대체 뭐 하는 놈인가 싶어서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뇌리를 스치는 또 다른 기억.
"…… 아."
생각났다. 내가 2학기 때 대회반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
조진형. 저 녀석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