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9화 (19/403)

19. 2차 시험.-2-

"……."

"……."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빤히 바라보길 몇 초.

이내 저쪽에서 먼저 흥이 식었는지 눈을 돌렸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쟤가 나랑 엮일 일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나현주에게 마주 인사하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뭐야?"

"모르겠는데. 이따 시험 끝나고 얘기하면 되겠지."

당장은 눈앞에 온 시험이 더 중요하다. 내가 떨어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창민급은 아니더라도, 콩라인 쯤은 넘볼 수 있는 녀석들이 1차 시험을 뚫고 왔을 테니까.'

하지만 이쪽도 잠자코 있을 생각은 없다.

남자가 벙커를 꺼냈으면 세 번 정도는 지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고작 이 나잇대 애들한테 재능 차이 하나로 어떻게 될 만큼 녹록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고 머릿속으로 레시피를 간단하게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교실 앞문을 열며 박예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와 동시에 한창 어수선하던 학생들도 순식간에 자리로 돌아간다.

"좋은 아침이에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모든 학생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뒤, 선생님의 인사에 이어 우리도 인사로 답하자 선생님은 평소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출석부를 펼쳐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

……

"다들 늦지 않고 잘 출석했네요."

체크를 끝낸 선생님이 출석부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

주말은 잘 쉬었느냐며 잠시 잡담으로 너스레를 떨던 선생님이 박수를 몇 번 치고는 아이들을 주목을 모은다.

"자자, 이제부터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으니 잘 들어주길 바라요."

─네.

"좋습니다. 우선 전달할 건 저번 주 홈룸 시간에 나눠줬던 동아리 신청서에 대한 거예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동아리마다 정해진 자릿수가 있기 때문에 특히 사람이 몰리는 동아리는 적어 낸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확률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추첨으로 인원을 정하거든요. 라며 잠시 말을 끊은 선생님이 웃으며 아이들을 둘러본다.

"그러니 동아리에 신청서를 내실 때에는 최대 3지망까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꼭 기입해서 제출해 주시기 바랄게요."

─네.

"그럼 다음은 대회반 2차 입부 시험 참가자에게 알릴 사항이 있습니다. 주목하세요."

그 말을 듣고 대충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선생님을 바라본다.

선생님 또한 안창민과 백예은, 그리고 나까지 합친 세 명 모두에게 순서대로 다가가 각각 한 장씩 인쇄물을 건네주었다.

'이건…….'

몇 가지 항목과 함께 커다란 여백이 있는 용지.

그렇게 자주는 아니어도 나름 여러 번 본 기억이 익는 모양새다.

"지금 받은 건 레시피 기록서입니다. 시험에 앞서 여러분이 작성해야 하는 거죠."

선생님은 우리에게 나눠준 것과 똑같은 인쇄물을 들어 보이며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가리켜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가장 위에. 학년, 반, 이름, 날짜. 이런 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 아래부터 봅시다."

시선을 내린다.

빈칸. 그 옆에 정자체로 쓰인 <메뉴명>  이라는 이름.

"그곳에 여러분이 오늘 시험에서 만들 요리의 이름을 적으시면 됩니다."

자기가 만든 요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설마 없겠죠? 라며 농을 건네지만, 아무도 웃질 않아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는 선생님이다.

"흠흠, 그럼 다음은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를 기입하세요. 여러분이 직접 적은 재료만 여러분께 지급되니 하나도 빠짐없이 적도록 해요."

"선생님~."

선생님의 말을 따라 순순히 필요한 재료를 적고 있으려니 누군가 선생님을 부른다. 이 목소리, 백예은의 목소리다.

"왜 그러죠?"

"만약 필요한 재료를 기입했는데 재료가 구비 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어떡하나요?"

"아, 그게 걱정이었군요."

백예은의 질문에 손을 내저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선생님. 질문자인 백예은은 왜 저러나 싶겠지만, 나는 대충 이유를 알고 있다.

"괜한 걱정이라고 말해두고 싶네요. 본교에서는 여러분이 어떤 재료를 원하시든 못해도 3시간 이내에 구비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말로 구하기 어려운 재료라면 당사자에게도 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통보를 하겠지만, 글쎄요……."

잠시 말을 멈춘 선생님은 입꼬리를 매단 채 말을 이었다.

"그럴 경우는, 일단 당장의 여러분에 한해서는 없을 것 같군요."

어찌 보면 오만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말. 하지만 이 학교의 저력을 편린이나마 알고 있는 내게 있어선 아주 못 미더운 소리는 아니었다.

'아마 국내에 한해서는 계절만 맞다면 정말 못 구하는 재료가 없을 테지.'

이 학교와 연계하고 있는 호텔만 국내에 수십. 그 호텔과 연계된 식재료 수급처는 다시 또 그 수십 배다. 만약 정말로 학생에게 그 재료가 필요하다는 합당한 이유만 있다면, 이 학교는 제주도에서 낚은 지 채 다섯 시간도 되지 않는 싱싱한 은갈치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 그럼 자기가 준비한 재료는 따로 기입 하지 않아도 되나요?"

이번에는 안창민의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요. 자기가 지급받고 싶은 재료만 적으면 됩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나는 아까 전까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레시피를 다시금 쭉 훑었다. 일단은 기본적인 조미료들, 계란, 치즈. 나머지는 파슬리 정도.

대충 적는 것을 끝내고 선생님을 보자,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래 있는 여백이 보일 겁니다."

다른 칸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여백이 주어진 칸.

나는 선생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펜을 놀렸다.

'뭘 적어야 할지는 알고 있으니까.'

"그 칸에는 여러분이 만들 메뉴의 조리법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적어주세요. 자세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저희가 이 재료를 지급하기에 합당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니까요."

조리법이라면 이미 아까 전부터 되새기고 있었다. 더 이상 우물쭈물할 이유도 없으니, 순번을 간략하게 나눈 조리법을 여백에 꼼꼼히 적은 후, 선생님에게 제출하기 위해 일어선다.

"여기요, 선생님."

"그래."

선생님은 내 레시피를 쓱 훑어보시고는,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은 선택이야. 잘 할 거라 믿는다."

이 선생님답지 않게 상냥한 응원이었다. 내 표정이 그렇게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선생님은 쓰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라고 항상 너희를 엄하게 대하진 않는단다."

다만, 그럴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할 뿐이라며 말하는 선생님의 얼굴은, 나로서도 꽤 새삼스러운 모습이었다.

***

"안녕, 혁아!"

"어, 그래."

오늘도 활기차다 못해 정수리에서 넘쳐흐르고 있는 것 같은 텐션을 자랑하는 백예은이었다.

내가 설렁설렁 돌려준 인사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긋방긋 웃는 것이 딱 얘랑 어울린다 싶다가도, 저번 주에 보았던 그 무표정이 떠올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묘한 꺼림칙함을 애써 지워내며 오늘도 한껏 조잘거릴 준비를 끝마친 듯 보이는 백예은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온 거야?"

"그야 대회반 시험 때문에 왔지."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냐며 장난스레 날 타박하는 백예은.

솔직히, 뭐가 당연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물어는 보았다.

"대회반 시험이 왜?"

"혁이 넌 어떤 메뉴로 했는지 궁금해서!"

"내 메뉴?"

"응. 참고로 내 메뉴는 김계란말이야! 조금 어레인지가 들어가긴 했지만."

호오, 김계란말이. 말 그대로 계란말이 겉을 김으로 감싼 요리인데, 꽤나 대중적인 요리를 어떻게 살릴지 흥미로웠다.

자기는 먼저 말했으니 당연히 나도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에게 하는 수 없이 내 메뉴를 말해 줬다. 말해 봤자 닳는 것도 아니고.

"…… 나는 까르보나라 만들기로 했어."

"까르보나라? 아, 하긴 본토 레시피대로 하면 계란요리기는 하구나."

그러면서 헤헤 웃는 녀석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잇는다.

"아, 창민이는 에그 베네딕트 만든다더라."

"에그 베네딕트?"

에그 베네딕트는 미국식 샌드위치의 일종이다.

사실, 샌드위치란 이름과는 달리 빵 사이에 무언가를 끼워서 먹는 게 아니라 잉글리시 머핀이라는 빵을 구워 그 위에 수란과 베이컨, 소스를 얹어 먹는 것이지만.

확실히, 계란 하면 생각나는 요리 중 대표격으로 나올 수 있는 요리이기는 하다. 그래서 오히려 좀 뻔하지 않나 싶긴 하지만 뭐, 누가 누굴 걱정하겠는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래 뭐, 열심히 해."

"뭐야, 그게 다야?"

백예은이 좀 더 성의 있게 응원을 하라며 성을 내지만, 어차피 요리라는 건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 한번 요리를 잘하자고 누굴 응원한다거나, 응원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솔직히 성미에 맞지 않는다.

한창 씩씩거리던 백예은은 이내 화가 풀렸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장난이었는지 다시 실실 웃어 보이며 말했다.

"혁이 너도 잘 해야 해. 같이 대회반 들어가기로 약속했으니까, 알겠지?"

"언제 했냐, 그런 약속."

"지금!"

미안하지만 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하지만 백예은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이미 교실 반대편에 있는 자기 자리로 가버리고 말았다. 끼리끼리 모여 있던 여자애들 사이에 순식간에 섞여 들어가는 모습을 넋 나간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양희연?"

"잠깐 나 좀 봐."

"……."

얘들이 왜 단체로 나한테 이 난리일까.

옆에서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킥킥대는 김철정의 대가리를 참으로 후리고 싶었다.

***

"그래, 무슨 일인데?"

"……."

양희연은 몸을 돌려 자신의 부름에 복도 구석까지 따라 나온 찬혁을 마주 봤다.

처음 봤을 때 보다 좀 더 말끔하게 차림새를 고치고 있기는 했지만, 그 특유의 눈매는 여전했다. 그냥 볼 때는 나름 괜찮다 싶으면서도, 표정이 변하니 세상에 둘도 없이 사나울 것 같은 인상.

찬혁 본인은 그저 조금 언짢은 기분이 있을 뿐이었지만, 희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한창 말을 꺼내기 망설이는 희연의 모습에 찬혁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뭐야.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

그렇게 닦달할수록 희연은 좀처럼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물어볼 게 있으니까…….'

한 차례의 심호흡으로 긴장을 쓸어낸 뒤, 희연이 입을 열었다.

"류찬혁. 너, 그 카레 어떻게 만든 거야?"

"카레?"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기 때문일까, 잠깐 생각에 빠졌던 찬혁이 이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 혹시 얼마 전에 만든 그거? 왜, 맛없었냐?"

"아, 아니! 그럴 리가! 되게 맛있었어."

"어, 어어……."

갑작스레 올라가는 희연의 목소리에 당황한 찬혁.

얼떨떨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이내 말을 잇는다.

"그런데. 왜, 레시피가 궁금해?"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못 알려줄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며 헛웃음을 한 번 뱉은 찬혁이 옆머리를 검지로 긁적였다.

"근데 나도 다른 사람한테 배운 거라, 함부로 가르쳐주진 못해."

"다른 사람? 다른 사람 누구?"

카레를 다른 사람이 가르쳐주었다는 말에, 희연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찬혁은 그런 희연의 태도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레시피가 궁금해서 이러는 것 같진 않은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유라도 좀 알자. 그게 왜 궁금한데?"

찬혁의 입장에서는 힘들게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갖다 이상한 점으로 트집을 잡히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좋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희연은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한 차례 말 사이에 텀을 두고, 말을 잇는 희연.

"우리 엄마가 한 거랑 맛이 너무 똑같아서."

그 말을 들은 찬혁은 어이가 가출하는 기분이었다. 고작 그거 때문에 사람을 불렀다고?

"아니, 카레 맛이 비슷할 수도 있지 왜 그걸 갖고……."

하지만 희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똑같거든, 나한테도 안 알려줬던 엄마가 만든 거랑."

그녀의 모친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코스의 식사로 제공되는 카레이자, 가게의 가장 큰 인기 메뉴. 희연은 어머니가 꽁꽁 숨기며 자신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그 레시피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몇 번이고 먹으며 분석해왔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에서 막혀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얘가 만든 카레에서, 완벽히 똑같은 맛이 났어.'

사실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조금 더 맛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며 그 생각을 도리질로 떨쳐냈다.

희연은 아직까지도 언짢은 표정을 지은 찬혁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건넸다.

"너 혹시, 성미설이라는 이름 알아?"

"그게 누구…… 잠깐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낸 모친의 성함. 그것을 듣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던 찬혁의 안색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 반응을 보고, 희연은 자신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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