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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8화 (18/403)

18. 2차 시험.-1-

아직 누가 일어나기에는 이른 새벽 여섯 시.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기숙사 지하의 주방에 들어가는 이가 있었다.

혹여나 누가 들을까 문을 여닫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행동거지.

문을 닫고는 숨까지 참았는지 작게 숨을 내뱉고, 전등의 스위치를 찾아 킨다.

깜빡. 깜빡.

전등이 잠시 점등하고, 주방이 환하게 밝혀진다.

"거 참, 시험 한 번 하자고 무슨 고생이야 이게."

이렇게 일찍부터 주방의 불을 밝힌 그림자의 정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류찬혁이었다.

***

"월요일 아침부터 무슨 짓이냐……."

내가 하면서도 참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김철정이 자고 있을 방부터 시작해서 혹여나 내가 낸 소리에 누가 깰까 무슨 도둑놈처럼 움직여서 온 곳이 결국 주방이라니.

"이 시간에 출근은 종종 했었지만……."

취사병 생활 때나 주방에 막 들어간 막내이던 시절에 말이다.

파리에 갔을 때는 신입으로 입사한 게 아니라 이직을 해서 간 거라 아주 막내부터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도 그렇게 다를 건 없었다.

"……."

새벽 시간의 주방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향수를 뒤로하고,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목적이라고 해도 별 건 아니다. 그냥 시험에 앞서 이것저것 준비 좀 하려고 나온 것뿐.

시험에 가져갈 재료는 무슨 요리를 만들어두는 것만 아니라면 미리 만들어서 가져가도 별 지장이 없으니까.

방을 나오면서 가져온 조리복으로 갈아입으며 재료가 있는 곳을 살핀다.

"어디 보자……."

필요한 것은 밀가루와 계란. 딱 그것 두 개뿐.

재료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 내가 만들 것은 반죽이다. 다만, 물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반죽.

쉽게 말해서……

"파스타 용 반죽이지."

밀가루를 물로 반죽해서 만드는 우리나라의 면이나 일본의 우동 종류하고는 달리, 파스타면은 밀가루와 계란만을 이용해서 반죽한다.

굉장히 간단한 재료.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만큼 다른 측면에서 구애받는 것이 많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탈리아 쪽은 이해가 잘 안 된단 말이지.'

이탈리아. 양식에서도 이탈리안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종목을 구축한 파스타와 피자의 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얘네들은 피자와 파스타를 만드는 레시피가 법으로 지정되어 있다.

농담이냐고? 아니 진담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잔치국수와 빈대떡 만드는 레시피가 법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단지 그만큼 자신들의 요리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법대로 만들어서 심사를 받아 합격하면 특정 기관에서 KC마크 같은 인증마크를 업장에 붙이는 것이 허가되는 등, 뭐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또 다음에.

아무튼, 지금 해야 할 건 반죽이다.

깨끗하게 닦아 물기 하나 없는 평평한 조리대 위에 밀가루를 채에 쳐서 뿌린다. 이렇게 하면 밀가루 속 불순물이나 쓸데없이 뭉쳐 있는 밀가루가 없어져서 재료가 골고루 잘 섞이게 된다.

잘 펼쳐진 밀가루를 손으로 그러모아 모래성을 짓듯이 한 곳으로 쌓고, 봉우리를 눌러서 화산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준다.

"그다음은……."

움푹 파인 곳에 미리 골라두었던 계란 노른자를 투입. 흰자를 써도 되긴 하지만, 오늘은 노른자만을 사용해서 만든다. 이러면 계란 고유의 고소한 맛이 잘 살아난다.

'대신 그만큼 비린 맛이 나는 것도 주의해야 하지만…….'

그것도 방법이 다 있지.

소금과 함께 소량의 향신료를 넣어서 재료들이 서로 잘 섞이게끔 휘젓는다.

너무 힘을 주지 않고, 손안에서 살짝 모래를 모으는 느낌으로.

그것을 얼마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밀가루 전체가 노른자처럼 샛노랗게 물든다.

그럼 이제부터는 힘을 쓸 차례.

밀가루 반죽은 힘을 잘 들여 반죽할수록 찰기가 살아난다. 글루텐이라는 물질의 형성 때문. 요리라는 것도 잘 생각하면 화학 반응을 잘 이용해야 하는 과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 것도 잘 알고 있는 게 모르는 것 보단 백배 낫지.'

알고 있다면 최소한 후배나 부하 직원한테 설명할 때 몰라서 쪽팔릴 경우는 없으니까.

그렇게 아무 생각이나 하며 반죽을 잘 치대고 있자니 슬슬 반죽이 완성될 기미가 보였다.

손에서 느껴지는 찰기가 딱 좋은 수준까지 올라왔음이 느껴진다. 굳이 일부를 늘여서 확인해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것 또한 어느 의미 경험의 산물이다.

"흠."

눈으로 보아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다.

마지막으로 반죽을 둥글게 뭉친 다음 공기와 닿지 않도록 랩으로 꼭꼭 싸서 밀봉.

이 상태로 5시간 정도 냉장고에서 숙성을 시켜주면 파스타로 만들었을 때 더욱 쫄깃한 맛을 낼 수 있다.

랩으로 잘 밀봉한 반죽을 냉장고 한편에 넣었다.

'이제 점심시간에 가지러 오면 되겠고…….'

내 시선이 냉장고 속 다른 곳으로 향한다.

"……."

굳게 닫힌 투명한 통.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잘 섞인 소금과 설탕의 색이 살짝 투명하게 변한 것을 확인하고,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바로 저거다. 내 요리의 열쇠가 될 녀석은.

***

아침.

주방을 청소하고 방으로 돌아가니 대충 7시가량이 되어 있었다. 등교는 8시 30분까지니 여유는 충분했다.

적당히 샤워를 하고 나와 교복으로 갈아입을 때까지도 세상모르게 잠에 빠져 있는 철정이 녀석을 보고 깨우려다가, 이내 알아서 일어나겠지 싶어 그냥 혼자 등교하기로 했다.

'다시 자기도 뭐하고…….'

가방에 짐을 챙겨 방을 나선다.

나가면서 일단 먼저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잠에 푹 빠진 녀석은 대꾸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휘이잉

정문 바깥으로 나서니 역시 아직 초봄이라는 것일까.

조금은 쌀쌀한 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해가 뜨면 조금 낫겠거니 싶지만, 아무래도 아직 해가 완전히 뜰 시간은 아닌지 아직 하늘의 색은 새벽 특유의 시퍼런 색채를 띄고 있다.

"으, 좀 춥네."

오늘은 바람이 좀 강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두 손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잔뜩 목을 움츠리고 걷는다.

잠시 뒤, 교문을 지나 현관을 넘어 들어오니, 그제야 살짝 찾아오는 온기에 몸이 풀렸다.

신발을 갈아 신고 교실로 향한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7시 반을 좀 넘긴 시각.

'어차피 들어가 봤자 아무도 없겠지?'

아까 교문을 지나올 때부터 마주친 사람이 수위 아저씨밖에 없었다.

'아직 애들이 오기엔 너무 시간이 이르기는 하지.'

나도 학교에 이렇게 일찍 등교해 본 적은 없었지 않나 싶다.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느긋하게 불 꺼진 교실들을 지나쳐, 5반과 6반을 가르는 중앙복도에서 가장 끝에 있는 우리 반으로 다다라간다.

"응?"

우리 반에 불이 켜져 있다.

내가 첫 번째로 왔을 줄 알았는데, 누가 이렇게 일찍 등교한 걸까.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열어젖히고 안을 살피니,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남학생이 한 명.

─드르륵.

문에 달린 바퀴가 레일을 구르는 소리에 그쪽도 나를 바라본다.

"안녕."

"어, 좋은 아침."

손을 살짝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인물을 본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안창민?'

쟤가 왜 벌써 와 있는 거지. 내가 알기로 기숙사에 살지도 않을 텐데.

그런 내 생각에도 아랑곳없이 안창민은 열심히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궁금함이 돋아 내 자리에 가방을 걸어두고 살짝 다가가 보았다. 세계적으로 천재라고 불리던 녀석이 읽는 책은 무엇일지가 궁금했으니까.

"…… 더 셰프─프로 라이센스? 원어판?"

와. 깜짝 놀랐네. 왜 고등학생이 이런 걸 읽고 있어?

더 셰프─프로 라이센스.

외국의 유명 요리학교에서 수십, 수백 명의 셰프들이 쓴 이론을 하나로 모아 정리하여 발간한 더 셰프라는 책의 프로 버전이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요리판 수학의 정석이라고 불리는 책.

프로 셰프를 꿈꾼다면 한 번쯤은 정독 해야 된다는 평이 자자한 책이니만큼 나도 한 두 번 읽은 게 아니다. 몇몇 구간은 아예 외우고 있을 정도,

'그런데 얘는 왜 좋은 한글판을 놔두고 원어판으로 보는 거야?'

분량이 분량인지라 아주 완벽한 번역은 아니어도 원어판 보다야 훨씬 편할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이때는 아직 발간이 안 됐었지.'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된 것이 아마 25년도 전후. 즉 내가 졸업하고도 몇 년이 지난 뒤였다.

그런 걸 벌써 원어로 읽고 있다니, 요리만이 아니라 영어도 잘한다는 걸까.

"…… 너도 이 책 알아?"

내가 놀랍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고개를 돌려 똑같이 나를 바라보던 안창민이 내게 물었다.

'아, 실수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 대단하다는 애가 이걸 읽고 있어도 신기할 판인데, 나처럼 뭣도 없는 녀석이 갑자기 안다고 하면 이상해 보이는 게 당연한데.

하지만 일단 말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질문에 수긍했다.

"어…… 대충은? 나도 읽어본 적은 없어."

"그래? …… 그런데 어떻게 보자마자 책 이름을 안 거야?"

미심쩍은 시선이 나를 쏘아본다.

아니, 어쩔 수 없잖아. 하필 네가 보던 부분이 내가 달달 외우고 있던 닭 손질 방법에 대한 부분이니까.

어찌나 많이 읽었는지 이제는 삽화 위치만 봐도 몇 페이지인지도 알 수 있는 나다.

무어라 둘러댈지 당황하다가, 안창민의 가방 사이로 튀어나온 커버를 발견했다.

나는 서둘러 그것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 그 커버. 그거 보고 알았지."

"응?"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그제야 "아."하는 소리를 내는 안창민.

굳이 얘한테 이상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나는 대화를 얼버무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럼 잘 읽고. 이야, 영어책은 진짜 봐도 모르겠네."

"…… 어, 그래."

안창민도 한 차례 더 미심쩍은 눈길을 내게 주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저 책이랑 노트…….'

책 모서리가 닳아 있는 것이 한두 번 보고 쓴 게 아니었다.

'마냥 천재인 줄만 알았는데…….'

하긴, 천재라는 것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없다.

미래에 내가 봤던 저 녀석의 성공에는 그만한 밑받침이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굳이 놀랄 필요는 없었다.

잠시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에게 마저 읽으라며 손짓하고는,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대충 뭐라도 하는 시늉이나 하고 있으면 신경 안 쓰겠지.'

이 핸드폰은 구형에 중고라 고사양 게임 같은 건 안 돌아가도 서핑 정도는 문제없이 할 수 있는 녀석이다. 대충 인터넷에서 흥미가 이는 뉴스 몇 개를 골라서 보다 보니 금방금방 시간이 가는 것을 느낀다.

"야, 너는 뭐 말도 없이 먼저 가냐."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어수선해진 교실에서 나를 향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철정이 녀석이다.

"시험 준비 좀 한다고 일찍 일어나서 그래. 그리고 간다고 말했잖아."

"구라치지 마. 못 들었음."

"아 네가 자고 있던 걸 뭐 어쩌라고."

옆자리에 앉는 철정과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며 실실 웃는다.

가방을 걸고 의자에 걸터앉은 철정이, "아, 맞다."하고 운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아까 양희연이 너 찾던데?"

"날? 왜?"

"몰라."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갑자기 날 찾아다니지.

의아함을 담아 김철정을 보니, 녀석은 엄지로 옆을 가리키며 말한다.

"어차피 저기 같이 왔으니까, 이따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한 번 이야기해 보든가."

그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 보면, 아까부터 이상하게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했는데……

"오……."

뭔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나현주 옆에서, 나를 매서운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는 양희연의 모습이 보였다.

…… 쟤는 또 왜 저러냐……

가면 갈수록 알기 힘들어지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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