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브레이크 타임.-4-
잠시 후.
기숙사에서 왕복 10분 거리에 있는 대형 마트에 다녀온 내 손에는 계란 한 팩과 기타 잡다한 물건들이 담긴 비닐이 들려 있었다.
"다녀왔어."
주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창 냄비를 젓고 있던 나현주가 나를 반겼다.
자연스럽게 내 손으로 향하는 눈길.
"계란? 그거 사러 다녀온 거야?"
"응."
계란은 기숙사 냉장고에도 비치된 게 있지 않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현주.
쓴웃음을 지으며 그 의문에 답한다.
"최대한 신선한 계란이 필요했거든. 냉장고에 비치된 건 마지막으로 들어온 지 사흘 정도 된 거잖아?"
반면 지금 사 온 계란은 판매일자가 오늘로 되어 있는 신선한 물건이다. 마지막 몇 개 안 남아 있던 걸 겨우 사 온 것이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현주가 뒤이어 물었다.
"근데 그걸로 어떻게 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아까 사고를 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 방법이 있지."
"?"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주를 보며 대충 화제를 돌린다.
"그건 그렇다 치고, 카레는 어때?"
"슬슬 된 것 같아."
국자로 카레를 조금 퍼 올리며 농도를 확인하는 모습에 나도 시계를 살폈다.
지금 시각은 오후 6시를 조금 넘긴 시점. 카레를 끓이기 시작하고 30분 정도가 지났다.
"그러네. 시간도 된 것 같으니 한 번 확인해보자."
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젓고 있던 국자를 내게 넘겼다.
국자를 받아 카레를 한 바퀴 저어보고, 살짝 떠서 흘려보는 등. 농도와 식재료들의 익은 상태를 얼추 확인해나간다.
"잘됐네."
딱 좋을 정도의 점성이 느껴지는 카레다. 잘 완성된 것을 확인하고 화구의 불을 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느껴지는 시선.
눈을 돌리자, 나를 꿰뚫을 듯 바라보는 호기심이 잔뜩 어린 나현주의 눈빛.
그 눈빛을 웃음으로 되돌려준다.
"한 번 먹어볼래?"
"응."
담백한 표정으로 끄덕이지만, 눈빛만큼은 초롱초롱하다.
슬슬 이 녀석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에도 요령이 생긴 듯 싶었다.
한 차례 가볍게 웃고는 미리 챙겨두었던 작은 종지에 카레를 소량 떠서 건넨다.
그것을 받아든 나현주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어린다.
"자, 여기."
"고마워."
"고마울 건 뭐야. 너도 같이 만든 걸 갖고."
"그런…… 가?"
"아무렴."
접시를 들고 머뭇거리는 나현주에게 씨익 웃어준 뒤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얼른 먹어봐. 죽여줄걸?"
"응. 잘 먹을게."
그리고 한 입.
조심스럽게 카레를 후후 불어 식히고는 천천히 종지를 기울여 입으로 넘긴다.
꿀꺽. 하고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우와……!"
보기 드문 커다란 목소리로 탄성을 내지르는 나현주.
그 반응에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나 또한 카레를 한 입 머금었다.
'오오!'
대성공!
그런 생각이 저절로 머리를 가득 채웠다.
볶은 양파와 구운 망고, 바나나에서 나오는 절묘한 단맛.
볶은 밀가루 덕에 카레 전체에 은은하게 배어 있는 고소함.
채소육수가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주고, 카레가 듬뿍 밴 채소는 씹을수록 감칠맛을 뽑아낸다.
'그리고 뭣보다 이 고기!'
대단한 고기다.
생고기일 때도 충분히 놀라운 품질을 자랑하는 고기였지만, 그 고기의 맛을 살리는 굽는 솜씨는 정말이지 놀랍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겉면만을 바삭하게 노릇노릇한 색으로 구워 고기 본연의 맛을 더할 나위 없이 끌어낸 솜씨.
그에 더해 굽는 것으로 한 번 녹아내리기 시작한 소고기의 마블링이 뜨겁게 끓는 카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향신료들과 함께 악센트를 만들고 있었다.
"와, 이건……."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다.
이 정도로 맛있게 완성될 줄이야.
돌아오기 전을 포함해서 근래 먹었던 카레 중 당연 최고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맛이다.
'양파 품질이 이상하게 좋다 싶더니만…….'
고기만이 아니라 다른 채소나 과일들도 상당한 품질이었을 터. 직접 손질한 게 내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엄청 맛있다."
전보다 훨씬 활짝 핀 얼굴로 웃는 나현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안 되겠다. 전신을 내달리는 참을 수 없는 충동! 이건, 꺼낼 수밖에 없다.
나는 방금 다녀왔던 마트의 마크가 인쇄되어있는 비닐 봉투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야, 나현주."
"응?"
내 부름에 몸을 돌리는 현주에게 꺼내든 물건을 내밀었다.
"먹자."
내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레토르트 쌀밥.
이런 일도 있을까 해서. 사실은 카레로 저녁 때우려고 사온 거지만.
"준비성 좋지?"
"인정해 줄게."
농담을 농담으로 되받아치며 손바닥 크기의 팩을 붙잡아오는 나현주를 보며 생각한다.
농이 아주 통하지 않는 것 같지는 않다고.
***
"그나저나, 이 카레는 어떻게 할 거야?"
4팩이나 사온 레토르트 쌀밥을 밥풀 한 톨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 뒤, 나는 자신이 먹은 접시를 내려다보며 "탄수화물…… 안 되는데……."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나현주에게 물었다.
"응?"
"이거, 이렇게 많이 남았잖아."
나와 현주가 큼직큼직하게 몇 국자씩 퍼먹었지만 티도 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카레. 내가 카레가 든 냄비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말하자 자연스레 눈이 따라온다.
"아, 그거."
현주는 잠깐 말을 끊고 시계를 보고는 대답했다.
"아빠네 도축공장 분들 야식으로 드리려고. 좀 이따가 출장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들린다고 하셨으니까 아마 곧 오실 거야."
"도축공장? 몇 분이나 일하시는데?"
"도축 맡으시는 분이랑 유통하시는 분들 합하면…… 한 서른 분 정도?
와, 엄청 크네.
얘도 금수저였구나. 왠지 사 온 식재료가 고급이더라니.
'그러니까 한 끼에 등심 10kg을 태울 생각을 하지.'
사실 이 정도 양이면 그 사람들이 먹어도 세 끼는 먹겠지만, 과장을 좀 섞어봤다.
아무튼.
"그분들 드리면 남길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다들 식성이 대단하시거든."
그렇게 말하며 웃는 현주를 보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구나."
"뭐?"
"아, 미안."
말이 조금 필터링 없이 나왔다.
솔직히 혼자 그 많은 카레를 만들겠다고 주방에 들고 오는 애를 보고 '와 얘는 계획이 다 있는 애구나.' 같은 생각을 하진 않을 것 아닌가.
"……."
날카롭게 이쪽을 째려보는 눈빛을 식은땀과 함께 외면했다.
아무튼, 해결 방법이 있으면 다행이다. 기왕 만든 걸 버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카레는 전부 아버지 드리게?"
"아니, 희연이 몫만 따로 챙긴 다음에 드리려고."
그러고는 쓴웃음을 짓는 현주.
"내 바보짓 탓에 레시피 가르쳐준 건 무색해졌지만, 그래도 재료를 어떻게 살지 고민 안 한 건 희연이 덕분이니까."
"잘 생각했네."
내가 그렇게 대꾸하니 현주가 내게 묻는다.
"너는 좀 안 챙겨가도 괜찮아?"
"나?"
"만드느라 고생했잖아."
하긴, 서로 휴식을 마음껏 즐겨도 모자랄 주말에 괜한 고생을 한 느낌이긴 하지만, 얘 도와준 인건비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받았다.
"난 됐어. 너한테 받은 고기도 있고, 덕분에 고민이 해결된 것도 있으니까."
"고민?"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주를 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대충 그런 게 있어."
그 말에 의문의 빛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였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현주는 아버지가 다시 찾아오셨다는 전화에 카레를 전해 주고 온다며 나갔다.
옮기는 걸 도와준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면서 혼자 번쩍 들고 카트에 올려 가져가는 모습이 정말로 인상 깊었다.
"힘 되게 세네……."
고기랑 식재료를 들고 올 때부터 범상치 않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저 정도 양이면 어지간한 남자한테도 무거울 텐데.
상당한 피지컬에 감탄을 감출 수 없었다. 누누이 말했지만, 피지컬이 뛰어난 것은 요리사에게 있어 바꿀 수 없는 자질 중 하나니까.
"그럼……."
그 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밥을 먹는다고 깜빡했던 설탕과 소금이 섞여 있는 통을 챙겨 들었다.
"비율은 대충 8:2…… 에서 9:1 정도인가?"
위에 쏟아지기만 했을 뿐 아직 완전히 섞여 버리지는 않았기에 눈대중으로 비율을 대충 가늠해 본다.
"좀 더 필요하겠네."
보자, 방금 터졌던 소금 봉지 묶어뒀던 게…… 아, 찾았다.
더 쏟아지지 않도록 겉에 비닐을 한 겹 더 둘러놓은 소금을 가져온다. 그리고─
─쏴아아
망설임 없이, 이미 설탕과 소금이 섞여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통에 더욱 소금을 붓기 시작했다.
"흐흐……."
완성될 요리에 대한 기대감에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
"이게 류찬혁이랑, 같이 만든 거?"
"응."
같은 날 저녁.
주방에서 마무리 정리를 하는 것을 끝으로 찬혁과 헤어진 나현주는 냄비에 덜어온 카레를 양희연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네가 모처럼 레시피까지 가르쳐줬는데. 적어놓은 걸 하필 깜박하고 두고 가서……."
"잘 만들었으면, 됐지."
그렇게 말하며 희연은 냄비 뚜껑을 살짝 열었다.
기분 좋게 코로 스며드는 달큰하고 매콤한 카레의 향기. 절로 군침이 돌게 만드는 냄새였다.
"냄새, 맛있을 것 같아."
"그렇지? 한 번 먹어봐."
여전히 뭔가 어색한 말투로 말하는 희연.
사실, 나현주는 양희연의 말투가 이런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되도록 본인을 위해 별달리 말은 하지 않고 있다.
'편한 대로 말하면 될 텐데.'
본인은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나현주가 그런 생각을 하는 아는지 모르는지, 양희연은 태연히 종이컵에 카레를 뜨고 있었다.
"따뜻하네."
"방금 끓인 거니까."
그만한 양이 식으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덕분에 아직 따뜻한 카레의 온기를 느낀 양희연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오른다.
"잘 먹을게."
카레를 입에 머금고 우물우물 씹는 양희연.
처음 카레가 입에 닿자마자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진다.
그 모습을 보고 현주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작게 지어졌다.
그런데, 점점 희연의 표정이 변해간다.
"어라……?"
환희에서 의아함으로, 의아함에서 놀라움으로.
점점 경악 섞인 표정이 되어간다.
순식간에 표정이 돌변한 희연을 보고 현주는 당황에 빠졌다.
"왜 그래?"
"아니, 이거……."
나현주의 물음에도 카레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희연.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어조로 말이 이어졌다.
"뭐꼬 이거? 금마가 만든 거가 와 우리 엄마가 한 기랑 맛이 똑같은데?"
다른 사람이 만든 카레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엄마의 맛이, 그녀의 입에 채워진 자물쇠를 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