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브레이크 타임.-3-
나현주의 눈물겨운 고백 아닌 고백 이후, 우리는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양이 많아서 너무 많이 어지른 것 같다."
"그러게."
주재료였던 양파, 당근, 감자와 고기의 양만 다 합쳐도 너끈하게 수십kg은 됐을 것이다.
그나마 양파를 볶아서 부피와 무게를 팍 줄였으니까 한 냄비에 다 넣은 거지, 그렇지 않으면 냄비가 넘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많던 고기를 써보겠다고 나선 건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이 양은 좀…….'
싱크대에 들어간 냄비와 프라이팬의 개수만 대략 열 개가 조금 안 된다.
그 참상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나는 고개를 돌려 나현주에게 말했다.
"조금 다른 방법을 연구해 보는 건 어땠을까. 아버지한테 고기 좀 그만 가져오시라고 말씀드린다거나."
"그것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아닌데?
부끄럽다는 듯 말꼬리를 늘린 그녀가 속삭이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싫다고 하면 우리 아빠, 울지도 몰라……."
"……."
…… 울어? 그 상남자가? 생긴 건 미래에서 온 살인기계 뺨치는 그 아저씨가?
요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장면을 상상하려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확실히, 감히 시도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그, 원래 남자가 좀 커도 애 같고 그렇거든? 그러니까 그…… 아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응…… 고마워."
말을 쏟아내듯 횡설수설 나온 위로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내가 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같은 어른 남성이었던 사람으로서 미안할 따름이다.
잠시 낙담해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 청소나 마저 할까?'
'…… 그래.'
눈빛으로 조용히 의견을 교환한 우리는 얌전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설거지. 나현주는 조리대.
서로 어지른 곳을 자연스럽게 알아서 맡아 정리해나간다.
한마디 말도 없는 어색한 분위기 속, 서로 담담히 자기 할 일만 해나가던 중.
이 묘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셔?"
"어, 응?"
갑자기 말을 걸려 놀란 것일까.
내 옆에서 행주를 빨다가 작게 어깨를 흠칫거린 나현주가 나를 돌아본다.
"우리 아빠?"
"어. 대충 축산물 쪽 일하시는 건 알겠던데. 아마 도축 쪽?"
"응? 어떻게 알았어?"
그러고 보니 방금 기숙사 정문에서 만나는 걸 봤단 말을 안 했었구나.
"아까 공부하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갔었거든. 그때 너랑 네 아버지 만나는 걸 어쩌다 봤어."
"그래? 그렇구나……."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가 쑥스럽다고 대신 투덜대는 것 같았다.
나현주는 행주를 비비던 손을 잠깐 멈추고는 말했다.
"그런데 우리 아빠 일이 뭔지는 어떻게 안 거야?"
"팔을 보면 대충 느낌이 와."
"팔?"
"어."
잘 이해가 안 되는 듯, 궁금함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현주의 모습에 나는 설거지 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내 팔을 들어 한 부분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보통 그쪽 일하시는 분들 보면 여기 근육이 다른 곳보다 많이 발달 된 분들이 많거든. 그러니까 여기 이름이……."
"전완근?"
"어, 전완근."
나도 잠깐 잊어먹은 걸 바로 말하는 나현주를 살짝 신기하게 생각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바깥쪽 근육이 더 그래."
"왜 그런 거야?"
"봐봐. 도축할 때 보면 칼을 역수로 잡는 일이 많잖아? 그 상태로 힘을 쓰면 자연스럽게 그 부분이 자극되거든. 그런 생활을 하루도 빠짐없이 몇 년 동안 하게 되니까 근육이 안 자랄 수가 없지."
내 설명에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놀랍다는 표정을 지은 나현주는, 자신의 팔을 들더니 내가 가리켰던 부분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우와. 정말이네."
얘 치고는 신박할 정도로 큰 표정 변화였다. 애초에 만난 지도 얼마 안 됐지만.
'그나저나, 저기서 자기 팔을 확인해 볼 정도면…….'
얘도 고기를 만진 게 하루 이틀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까 등심 만질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동안, 실컷 자기 팔을 만지작대던 나현주가 대뜸 내 눈앞으로 자기 팔을 들이밀었다.
"너도 한 번 만져 봐봐. 되게 신기하다."
"…… 뭐?"
갑작스러운 터치 권유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평범한 여자애들보다는 좀 더 커다란 손과 근육이 도드라진 팔뚝. 하얀색 조리복에 밀리지 않는 새하얀 피부가 조명의 빛을 반사한다.
"…… 아."
내가 자기 팔을 보고 멍을 때리고 있으니 그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이해한 것일까.
순식간에 팔을 회수해가는 나현주. 깊게 숙인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
"……."
다시금 입을 다문 우리. 갑자기 싸해진 이 분위기.
아무래도, 어색함을 타파해 보려는 내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어 버린 듯했다.
***
잠시 후. 어느 정도 정리가 마무리된 뒤.
나현주는 오늘 사용했던 조미료를 다시 채워 넣는 작업 중이었다.
혹시라도 흘리지 않게끔 조심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그녀의 손은 꼭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의 다리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꾸욱……!
단지, 그 손에 잡힌 조미료 봉지가 손에 들어간 힘 탓에 터질 것처럼 잔뜩 부풀어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고작해야 만난 지 일주일 된, 서로 얘기를 나눈 적이라고는 실습 시간 때와 지금 몇 시간 밖에 안 된 남자애한테 자기 팔을 만져보라며 들이밀다니. 평소의 그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아, 이제 어쩌지……?'
애당초 그녀는 남을 대하는 게 서투른 사람이었다.
아빠를 닮은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동갑내기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남자애들보다도 컸던 키. 아직까지도 성장기가 멈추지 않아 지금도 점점 커지고 있는 이 몸이 그녀에게 있어선 골칫거리였다.
초등학생 때는 키가 너무 크다고 이래저래 놀림을 받으며 살았고, 그 탓에 중학교로 올라갈 즈음에는 표정이 굳어졌고, 그것이 타고난 생김새와 합쳐져 쌀쌀맞은 인상이 되었다.
주변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신장. 차갑게 굳은 무표정 일색인 얼굴. 아직 철이 덜 든 아이들 사이에서 그녀는 좀처럼 누군가와 친해지기 쉬운 인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아버지에게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도축을 배웠을 정도의 감성과, 아빠를 따라서 처음 갔던 헬스장에 푹 빠져 쇠질이라는 취미를 가진, 평범한 또래 아이들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녀는 친구가 없다. 말 그대로 아웃사이더. 아싸인 것이다.
그나마도 요즘에는 그녀의 룸메이트인 양희연을 통해 조금씩 그런 모습을 극복해나가는 그녀였지만, 아직도 사람과의 관계는 서툴기만 했다.
찬혁이나 철정을 볼 때 종종 건네던 손 인사만 하더라도, 현주에게 있어선 대단한 용기를 끌어낸 행동이었다.
'요즘은 좀 나아진 것 같았는데…….'
타인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데에 번번이 실패를 겪어왔던 그녀였지만, 그런 현주에게도 방금 그 상황은 대단히 큰 실수에 들어갔다.
잊고 싶은 과거가 많은 현주에게 생긴 또 하나의 흑역사.
방금 그 상황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과하게 힘을 들어간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애꿎은 소금 봉지만이 그 손아귀에 눌려 콰득콰득 비명을 내지른다.
현주는 힐끔힐끔 눈을 돌려 찬혁을 살폈다.
팬에 이어 접시와 도마, 칼까지 설거지를 마치고 행주로 물기를 닦아내는 중인 찬혁.
찬혁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요리실력이나, 자신에게 지시를 내릴 때 보인 익숙한 태도, 신기한 재주 등을 빼놓고서라도 그는 자신을 그렇게 크게 어려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오로지 요리로만 그녀를 판단한다고 할까.
자신을 보고 "너 키가 참 크다." 거나 "인상이 어떻다." 같은 말들 대신 "너 요리 잘한다."라는 말을 먼저 해준 사람은 찬혁이 유일했다.
'그런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람…….'
─꽈득. 꽈득.
굳게 쥐어진 나현주의 손안에서 고통의 비명을 지르던 소금 봉지가, 이제는 아예 죽음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깊은 고민에 빠진 현주로서는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이윽고, 어느 의미 탈 인간적인 악력을 버티지 못한 봉지는, 결국 자신의 최후를 성대하게 고하고 말았다.
─퍼엉!
"꺅!"
***
─퍼엉!
"꺅!"
"!?"
갑자기 들려온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엉망이 된 조리대가 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물기를 닦던 접시와 행주를 내팽개치고 그쪽으로 서둘러 다가가니, 터진 소금 봉지를 들고 황망한 눈으로 조리대를 내려다보는 나현주가 있었다.
'방금 그거, 소금 봉지가 터지는 소리였나?'
말도 안 돼. 저 비닐이 얼마나 질긴 놈인데.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었다.
조리대 위와 바닥에 골고루 흩뿌려진 소금들. 심지어 조미료를 모아두는 쟁반에까지 소금으로 가득했다.
"야, 괜찮아?"
"어, 어? 응. 괜찮아."
우선 넋이 나간 나현주의 어깨를 툭툭 쳐서 정신을 차리게 한 뒤 자초지종을 물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그게 왜 터져?"
"나, 나도 모르겠어."
당황스런 표정으로 손에 들린 소금 봉지를 내려다보는 현주.
'하긴, 저 단단한 걸 사람이 어떻게 터트렸을 리도 없고…….'
비닐에 하자가 있어서 어쩌다 저렇게 된 거겠지.
대충 납득한 나는 주방 구석에 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왔다. 이런 과립 쓰레기들은 어디로 흘러가기 전에 재빨리 청소해야 하니까.
"일단 청소부터 하자. 내가 바닥 쓸 테니까 조리대 위에 좀 부탁할게."
내 제안에 끄덕이는 나현주를 보며, 나는 소금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
"일단 정리는 끝났는데……."
뿌려진 범위만 넓었지, 생각보다 쏟아진 양 자체는 많지 않았던 덕분에 청소는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조리대와 조미료들 또한 깔끔하게 정리한 상태다. 하지만……
"하필 그게 열려 있어서."
"미안……."
"네가 미안할 건 뭐야. 문제는 하자가 있던 그 소금 봉투지."
"……."
입을 열지 못하는 나현주에게서 시선을 돌려 조미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본다.
다른 것들은 전부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하지만, 딱 하나. 처리가 곤란한 것이 생겼다.
"이거 완전히 섞여 버렸네……."
소금이 쏟아질 때 마침 열려 있던 설탕이 들어 있는 통에 소금이 왕창 쏟아져 버린 것이다.
땅에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이렇게 섞여 버린 소금과 설탕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에는 양이 좀…….'
적어도 너끈히 600g은 나올 것 같은 양. 종이컵으로 치면 세 컵 정도의 분량이다.
그걸 섞였다는 이유로 그냥 버려 버리는 건 좀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금이랑 설탕……."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시험에 대한 아이디어가.
"몇 시지?"
나는 황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 반이 조금 더 지난 시각.
'이 정도면 아직 안 늦겠다.'
나는 황급히 메고 있던 앞치마와 조리복을 벗고 한쪽 구석에 벗어두었던 외투를 챙긴 뒤, 설탕과 소금 섞인 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던 현주에게 말했다.
"나현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카레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보고 있어 줘."
"갑자기? 어디 다녀오게?"
"요 앞에 마트. 그 설탕 소금 섞인 것도 그대로 놔둬도 돼."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현주를 보며 말을 잇는다.
"좋은 생각이 났어."
여러 가지 고민거리의 해결방안이 동시에 떠오른 덕분일까.
내 입가에 저도 모르게 상쾌한 웃음이 지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