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브레이크 타임.-2-
예전에는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양파는 오래 볶으면 볶을수록 진한 갈색으로 익으며 깊은 단맛을 뽑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요즘에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이 기법을 카라멜라이징이라고 하는데, 당분을 가열하여 카라멜 같은 갈색으로 만든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본래 이 요리법은 프렌치 어니언 스프라는 이름의 요리를 만들 때 쓰이던 방법이지만, 카레 등의 요리를 만들 때도 쓰이곤 한다.
'보통 이렇게 만드는 건 일본식 카레 기법이긴 하지만…….'
이때 들어가는 양파의 양은 약 리터당 반 개에서 한 개 정도. 즉 50리터 분량의 카레에 유의미한 맛의 변화를 줄 정도의 양파를 넣고 싶다면 최소 25개는 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괜히 도와준다고 했나.'
한 망 가득 들어차 있던 서른 개가량의 양파를 모조리 채 썰어서 볶기 시작한 다음 할 말로는 조금 늦지 않나 싶었다.
양파를 카라멜라이징 해서 사용하는 방법은 굉장히 많은 장점이 있다.
고급스러운 단맛, 대체재가 없는 감칠맛, 자연스러운 색 변화 등등.
하지만, 그 모든 장점을 씹어 먹는 압도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더럽게 힘들다는 거지…….'
양파를 두세 개만 볶으려고 해도 적당한 불에서 한 시간은 내리 쉬지 않고 주걱으로 저어줘야 타지 않고 예쁜 갈색이 나온다. 그런데 그걸 서른 개나 한꺼번에 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는가? 내가 괜히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한 게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든 방법을 찾아내는 생물이다.
양파를 많이 볶는 거? 하루 이틀 해본 게 아니다. 서른 개 정도면 아직 가소로운 수준. 방법은 언제나 있다.
…… 물론 더 힘들어지긴 하지만.
아주 간단하다. 한 번에 많이 볶아서 시간이 오래 걸리면, 한 번에 적게 볶으면 된다. 무슨 뜻이냐고?
프라이팬 개수를 늘리면 된다는 거지.
***
물량에 따른 과도한 시간 소비에 대한 찬혁의 선택은 심플했다.
자신의 손이 닿는 화구 전부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양파를 나눠 볶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불 위에 올라간 프라이팬의 숫자만 무려 여섯 개.
이론상으로는 그냥 한 냄비에 다 때려 붓고 볶는 것 보다야 훨씬 빨리 끝날 테지만, 손의 바쁨 또한 줄어드는 시간에 비례해서 늘어난다.
'이러면 대략 90분 정도면 끝나겠구만.'
그 정도 시간이면 나현주 또한 다른 재료준비를 끝낼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찬혁이 양파를 볶기 시작할 동안 고기를 깔끔하게 잘라 소금, 후추로 밑간까지 끝내놓은 현주는 다른 재료들 앞에서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찬혁이 그녀를 불렀다.
"야, 나현주. 뭐해?"
"레시피가 잘 기억이 안 나서."
'뭐?'
찬혁은 순간 깜짝 놀랐다. 자기가 재료를 다 사다 놓고 레시피를 모른다고?
혹시나 싶은 생각에 찬혁이 묻는다.
"그럼 재료는 어떻게 사 왔어? 레시피는 어떻게 알았고?"
"희연이가 알려줬어."
"양희연이?"
끄덕이는 현주를 보며 찬혁이 갸웃했다.
'이거 재료만 보면 꽤 전통적인 일식 카레 만드는 방법인데.'
실습 시간에서 볼 때마다 뭔가 배운 느낌이 나더라니, 일식을 배웠나 보다.
대충 그렇게 납득한 찬혁이 말을 이었다.
"레시피 북 같은 건 없고?"
"방에 놓고 왔나 봐."
"그래?"
현주의 눈에 잔뜩 어린 실망과 미안함을 느낀 찬혁이 머리를 굴렸다.
대용량 카레 레시피라면 마침 잘 알고 있는 게 있고, 재료도 잘 갖춰져 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쟤 실력인데.'
수업 시간 때 봤던 모습이나 방금 고기를 다루는 걸 보면 칼을 잡은 게 하루 이틀은 아니리라 찬혁은 판단했다.
'저 정도 솜씨면 경력직에 가깝지.'
그렇다면 준비는 충분하다. 나머지는 자신이 그녀의 속도에 맞춰 오더를 조절하면 될 일이다.
대충 머릿속으로 레시피 정리를 마친 찬혁이 현주에게 일렀다.
"야,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응?"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보는 현주에게, 찬혁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답했다.
"끝내주는 카레 한번 만들어보자고."
***
"먼저 오븐 켜서 90도로 예열."
"응? 아, 알겠어."
장난스럽게 웃고는 갑자기 분위기가 뒤바뀐 찬혁의 모습에 흠칫하기도 잠시. 현주는 그가 말한 대로 오븐의 전원을 켜고 90도로 온도를 맞췄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곁눈질로 파악한 찬혁이 이어서 지시를 내린다.
"다음 망고. 껍질 벗겨서 한입 크기로 네모나게 자른 다음 오븐에 넣고 타이머 15분 세팅해."
"응."
"살짝 저온에서 수분을 날려서 당도를 응축시키는 거야. 이러면 고급스러운 단맛을 연출할 수 있어."
"그런 거야?"
"어."
자연스럽게 조리에 대한 지식을 귀띔해 주면서 자신 또한 두 손을 쉬지 않고 흔들어 여섯 개의 프라이팬 위에 들어찬 양파가 타지 않도록 열심히 볶는다.
"오븐에 망고 넣었으면 그다음은 감자 껍질 벗긴 다음 한입 크기로 썰어서 물에 담가놔. 전분기를 빼야 하거든."
"응."
"감자 끝났으면 그다음은 당근도 감자랑 비슷한 크기로 썰어서 그냥 접시에 놔두고."
"알겠어."
"시간 다 된 것 같으니까 망고 꺼내서 식힌 다음 큰 볼에 담아서 뭉개 놔."
"응."
잠깐잠깐 짧은 설명을 깃들여가며 일이 끊이지 않게끔 지시를 내리는 찬혁.
현주는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말에 따라 움직이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아챘다.
'…… 내가 작업을 끝내는 타이밍에 정확히 다음 작업을 알려주고 있어.'
심지어 찬혁은 그녀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현주가 한 가지 작업을 끝마치면 기다렸다는 듯 다음 지시를 내린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걸까?
그녀가 그런 심정으로 가만히 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찬혁이 그녀를 부른다.
"나현주, 칼 멈췄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솔직히 깜짝 놀랐다. 정말로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하지만 찬혁은 아랑곳없이 양파를 볶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쓰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고 현주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
'음, 칼 소리가 멈췄네. 당근도 다 끝낸 건가.'
나름 괜찮은 속도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주걱으로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양파를 긁어냈다.
사실, 내가 현주의 행동을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쌓인 재료와 그녀 본인의 속도, 그리고 칼 소리가 멈추는 타이밍을 대충 계산하면 그녀가 작업을 끝냈는지 아닌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밑에 애들 딴짓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알아보다 생긴 잔재주지.'
온갖 소음으로 시끄러운 주방에서는 꽤 응용하기 힘든 재주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요리를 하고 있을 때에는 나름 간단하다.
예전 생각을 하며 실실 웃다 보니, 어느새 볶던 양파도 숨이 많이 죽어 마치 잼처럼 농축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슬슬 되었다 싶어 여섯 개로 나뉘어 있던 양파를 전부 하나의 프라이팬에 옮겨 담았다.
얼마나 양이 줄어들었는지 그 많던 양파가 프라이팬 하나에 족히 들어올 정도였다.
'이건 이제 가끔 보면서 색만 확인해 주면 되고…….'
슬슬 됐다 싶을 만큼 진한 갈색으로 변한 양파에서 눈을 돌려 현주가 준비한 재료들로 시선을 향했다.
오븐에서 한 차례 구운 뒤 뭉갠 망고와 마찬가지로 칼 옆면으로 뭉갠 바나나를 잘 섞은 임시 처트니chutney.
벗긴 야채들의 껍질을 잘 세척한 뒤에 한곳에 모아 끓인 채소 육수.
알맞은 크기로 썰린 야채와 고기들.
잘 볶아서 특유의 신맛을 확실하게 날리고 단맛만을 살린 토마토 페이스트.
자신이 지시한 대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준비된 재료들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짓는다.
"야 너 잘한다. 이 정도면 그냥 나가서 바로 일해도 되겠는데?"
"그 정도는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묶은 머리를 배배 꼬는 나현주.
조금 과장이 섞이긴 했어도, 찬혁이 보기에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꿇릴 실력은 아니었다.
"그렇게 겸손 안 떨어도 돼. 너 진짜 잘한다니까."
"…… 고마워."
고개가 얼마나 기울어졌는지 이제 앞머리가 눈을 가릴 기세다.
현주 특유의 외모와 그런 행동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묘한 갭에 웃음이 나왔다.
"그럼 이제 진짜로 시작해 보자."
"응."
"혹시 고기 잘 구워?"
"웬만큼은?"
"그럼 고기 좀 부탁할게. 겉면만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줘."
"알겠어."
그 말과 함께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최대 화력으로 불을 올리는 나현주.
기름에 연기가 나기 시작하는 온도, 발연점에 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기를 넣는다.
─치이이이이익!
'과연, 웬만큼 굽는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네.'
네모난 고기들의 겉을 한 면, 한 면 빠짐없이 진한 갈색빛이 돌게끔 구워내는 현주.
훌륭한 온도 조절과 테크닉이었다. 단백질이 열과 반응해서 생기는 마이야르 반응을 교과서처럼 끌어내고 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커다란 웍에 기름을 두른 뒤 카라멜라이징 한 양파를 비롯한 채소들을 볶는다.
볶는 도중 밀가루와 카레 가루를 넣어주고 타지 않도록 약불로 익히면 밀가루 특유의 텁텁한 맛이 날아가고 고소함만이 남아 카레 자체의 농도를 잡아주게 된다.
"어디 보자……."
젓가락으로 당근을 살짝 찔러 익은 상태를 확인한다.
이때 너무 부드럽지 않게, 조금은 빡빡하다 싶을 정도로 젓가락이 들어간다면 충분하다. 어차피 끓이는 과정 중에 전부 익게 될 테니, 지금 너무 익혀봤자 으스러질 뿐이다.
"이 정도면 됐다."
볶은 채소들을 방금 나현주가 챙겨온 50리터짜리 냄비에 투하.
그리고 채소 육수를 잔뜩 부어준 뒤 으깬 망고와 바나나 섞은 것, 그리고 볶은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어 잘 풀어준다.
이다음은 고형 카레와 소금 등으로 카레가 졸아들 것까지 예상하여 간을 맞춰준 다음, 마지막으로 고기를 넣어 잘 끓이기만 하면 완성이다.
"고기 준비 다 됐어."
"오."
마침 나현주가 고기를 들고 찾아왔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이 호강하는 광경.
만족스럽게 끄덕인 나는 끓는 냄비 속에 고기를 전부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걸 넣어야지.'
예전에 이 카레 레시피를 가르쳐주셨던 셰프가 알려준 향신료 배합을 카레의 양에 맞춰 넣는다. 인도 요리의 생명은 향신료의 배합. 전통비법이나 다름없는 기술을 가르쳐준 셰프에게 감사를 표한다.
'주방에 향신료가 전부 구비 되어 있던 건 운이 좋았어.'
이제 남은 건 적당한 불로 한 시간 정도만 푹 끓여내면 끝. 잘 마무리하면 어지간한 전문점에서도 먹기 힘든 카레가 완성될 것이다.
"하아, 끝났다."
아직 설거지나 쓰레기 정리 같은 할 일이 잔뜩 남긴 했지만, 가장 큰일은 끝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두 시간이 넘게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체 왜 이렇게 카레를 많이 만든 걸까?
'지금 와서 물어보기도 좀…….'
이미 할 거 다 했는데 물어서 뭐하겠냐는 심정이었지만, 일단 듣기는 해봐야 할 것 같아서 나현주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나저나, 카레는 왜 이렇게 많이 만든 거야?"
"아."
나현주는 한 번 한숨을 내뱉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내게 답했다.
"…… 아빠가……."
"?"
"아빠가 고기를 너무 많이 줘서……."
…… 뭐?
"방 냉장고에 넣어둘 곳이 없는 탓에 어떻게든 쓰려고 하다 보니까……."
아.
그건 좀.
참 부러우면서도 부럽지 않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