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브레이크 타임.-1-
이 시절로 돌아온 후 처음 맞이하는 주말.
원래는 당장이라도 친가로 내려가 가족과 사장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대회반 시험 준비를 해야 하기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안 그래도 어려운 시험과제 탓에 골치가 아픈데, 일정까지 그렇게 틀어져 버리니 더더욱 그랬다. 덕분에 이렇게 귀중한 주말을 아무도 없는 조리실에서 혼자 머리를 싸매며 허비하는 처지다.
"하아…… 계란으로 만든 메뉴가 과제란 말이지……."
박예휘 선생님이 알려준 이번 과제. 계란으로 만든 요리.
"계란…… 계란이라."
얼핏 보면 간단하게 보일 수도 있다.
계란은 우리가 일상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흔한 식재료.
요리방법도, 먹는 방법도 그야말로 무궁무진.
나라마다, 지역마다 계란의 먹는 방법이 차별화가 되어 있을 정도니까.
"바로 그게 문제야."
계란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먹는 방법이 너무 많다는 것.
이 식재료 하나만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의 스펙트럼이 과하게 넓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레시피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지만, 정작 이 중 확실하게 이거다 싶은 메뉴를 찾을 수가 없다.
"쯧."
대회반에서 내어주는 과제는 가면 갈수록 어려워질 텐데, 벌써 이러면 쓰나.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잔뜩 어질러놓은 요리책들과 레시피 노트를 정리했다. 덤으로 말하자면 요리책들은 내가 산 것이 아니다. 학교 도서실에 잔뜩 구비된 물건을 빌려왔을 뿐.
"잠깐 머리나 식혀야겠다."
계속 책에 적힌 글자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더니 머리가 꽉 막힌 느낌이다.
잠시 바람이나 쐬며 쉴 생각으로 노트를 한구석으로 치워둔 나는, 곧 주방을 나서 기숙사 바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짹, 짹짹.
"아, 좋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직 살짝 싸늘한 초봄의 바람.
기숙사 앞마당의 벤치에 앉아 그 두 가지를 마음껏 즐기고 있자니 심신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먹는 걸로는 해결이 안 되는 비타민D가 쭉쭉 들어차는 것 같은 이 기분.
"담배 말린다."
일하던 시절. 쉬는 시간 때는 연초 줄담배가 국룰이었는데……
그나마도 파리에 가서는 끊었지만, 10년도 더 된 마지막 담배가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얼까.
'고딩 몸으로 무슨 담배야, 담배는.'
괜한 헛소리가 필터링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걸 보니 지치긴 지친 것 같다.
노곤한 몸을 벤치에 푹 기대어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햇빛에 닿는 면적을 늘린다.
"철정이 놈까지 집에 가버리니까 진짜 할 게 없네."
주말을 맞아 나를 놔두고 훌쩍 집으로 떠나 버린 룸메를 괜히 타박하는 나.
사실 할 일이라면 잔뜩 쌓이고 쌓였지만, 이 넓은 기숙사에 아는 얼굴 하나 없다는 사실에서 묘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부우우우웅.
"엉?"
그때였다.
갑자기 정문 쪽에서 들린 웅장한 엔진음에 등받이 뒤쪽으로 넘어가 있던 고개를 바로 세웠다.
"탑차네."
기숙사 정문 앞에 떡하니 멈춰선 탑차.
보통 식재료가 들어오는 날은 평일이지 않나 싶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여자 기숙사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현주?"
이 거리에서 봐도 월등한 기럭지. 고등학교 1학년임에도 모델 수준의 비율을 자랑하는 저 모습을 잘못 볼 리가 없다.
집에 안 갔나?
나현주는 아무래도 탑차에 볼일이 있는 듯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탑차를 향했다.
이윽고 탑차의 시동이 꺼지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한 남자.
"…… 와."
무심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멀리서 봐도 엄청나게 커다랗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덩치. 넓은 어깨. 우람한 팔뚝. 무성한 수염과 짙은 눈썹까지.
그야말로 마초의 집대성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은 아저씨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면 최태호 선생님이랑 비등비등 하겠는데.'
최태호 선생님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근육이라면, 저 아저씨는 무슨 미래에서 온 살인 기계 같았다.
저도 모르게 눈길을 빼앗기고 있을 때쯤, 나현주와 운전석에서 내린 아저씨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 서서히 다가서는 두 사람.
둘 다 어찌나 표정이 없는지 싸움이라도 붙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심 팝콘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윽고, 두 사람이 서로 한 발짝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그리고 잠시 후─
─와락!
두 사람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나현주를 털보 아저씨가 꽉 끌어안았다.
"엉?"
***
아무래도 그 털보 아저씨는 나현주의 아버지인 듯했다.
한 차례 포옹한 뒤 서로 정답게─얼굴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지만─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몇 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사태에 깜짝 놀랐던 나였지만, 다시 보면 상당히 닮은 두 사람이었다. 커다란 키나 변화가 없는 무표정. 그 외에도 이것저것.
그렇게 잠시 동안 이어지던 대화는 나현주의 아버지(?)에게 걸려온 전화로 인해 끊긴 듯했다.
통화를 마친 뒤 탑차를 열고 뒤 칸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나온 아저씨의 손에는, 대략 10kg는 족히 넘을 것 같은 크기의 고기가 들려 있었다.
"오."
상당히 커다란 등심이다. 그것도 소의.
무슨 공이라도 잡은 것처럼 한 손에 고깃덩어리를 들고나온 아저씨가 가벼운 몸짓으로 나현주에게 그것을 건네준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두 손을 이용해 거뜬히 어깨에 들쳐 멘다. 하루 이틀 해서는 나오지 않을 익숙한 태도.
무겁지도 않은지 그 상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부녀는 이내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아저씨는 차로, 나현주는 다시 기숙사로.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무뚝뚝해 보였지만, 굉장히 화목해 보였다.
"…… 들어갈까."
이유도 모르게 울적해지기 시작한 기분을 도리질로 털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애도 아닌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이유는 없다.
***
잠시 동안의 휴식을 마친 뒤 주방으로 돌아왔다.
따로 방문객은 없었던 듯, 조리도구며 책가지 등을 누군가 건든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쉬러 나가기 전 책을 보던 자리로 다시 짐을 옮기려는 찰나, 누군가 주방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삑, 찰칵.
"응?"
리더기가 카드를 읽고 잠긴 문이 열리는 소리.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여자 기숙사 쪽으로 이어진 문이었다.
'이 시간에?'
현재 시간은 오후 3시. 점심 시간도, 저녁 시간도 아니기에 누가 오기엔 참 애매한 시간대였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점점 열리는 문.
예상하지 못했던 얼굴이, 열린 문 사이로 등장했다.
"아."
나현주. 방문객의 정체는 바로 그녀였다.
방금 정문에서 본 평상복이 아닌 조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
날 보고 자기도 놀랐다는 듯 약간이나마 커다래진 눈을 깜빡인다.
오른쪽 어깨에는 아까 현관에서 보았던 고깃덩어리. 반대쪽 손에는 이것저것 식재료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에코백.
요령 좋게 왼쪽 어깨로 문을 연 상태로 굳은 나현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짐들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 열리다 만 문으로 다가가 내 쪽으로 당겼다.
"…… 고마워."
"고마울 것까지야."
가벼운 묵례와 함께 감사를 전하는 나현주에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많은 짐이 무겁지도 않은지 가벼운 걸음으로 날 지나쳐 조리대에 들고 온 재료를 정리하기 시작하는 나현주.
하나둘 꺼내지는 식재료를 살피다가, 이내 대충 얘가 주방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기에 양파, 감자, 당근, 망고, 바나나, 토마토 페이스트…… 이거 혹시?'
"혹시 카레 만들러 온 거야?"
"응.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니. 그거야……."
재료가 딱 카레 만들 재료니까. 양이 터무니없다는 걸 빼면.
심지어 어디 있었는지 모를 50리터들이 육수용 냄비를 당당하게 꺼내오는 모습에 절로 골이 아파왔다.
"…… 혼자 하려고?"
"응."
"……."
시간 꽤 걸릴 텐데.
잘 보니 등심도 지방 제거가 아직 조금 덜 되어 보였고, 양파나 당근 껍질 까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 많은 양을 전부 혼자 처리하려면 재료 손질에만 적어도 두 시간은 잡아먹을 것이다.
하는 수 없지.
나는 혹시나 직접 요리를 만들어야 할지도 몰라 챙겨왔던 앞치마와 칼을 챙겨 들고, 아직 까지도 끊이지 않고 재료가 올라오는 조리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다가서서 놀란 것일까, 나현주가 살짝 놀란 얼굴로 묻는다.
"왜 그래?"
"이거, 혼자 하기에는 너무 많잖아. 좀 도와줄게."
"…… 안 그래도 돼."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걸까. 나현주는 굳은 얼굴로 내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나도 물러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혼자 생각 좀 하려고 온 건데, 몇 시간 동안이나 카레 끓이는 얘 옆에서 책만 읽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럴 거면 방으로 가라고? 아쉽게도 난 방보다 주방에서 정신집중이 잘 되는 스타일이다.
거부하는 말을 대충 흘려듣고 가장 작업량이 많을 양파를 뺏어오듯 내 조리대로 가져온다.
"양파는 볶아서 쓸 거 맞지?"
"…… 류찬혁. 안 그래도 된다니까."
"놔둬.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한 차례 더 거부하는 나현주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여느 때의 냉랭함보다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두 차례의 거부를 거부로 되돌려준 나는, 손에 쥔 양파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곁눈질로 살짝 눈치를 살피니, 평소보다 좀 더 눈꼬리가 내려간 표정을 짓고 있는 나현주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잠시 날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재료를 정리해나간다.
말 없는 허락을 받은 나는 놀던 손을 조금 더 재촉하여 작업에 속도를 붙였다.
"…… 고마워."
"별말씀을."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자그마한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전해오는 나현주.
얘도 생각보다 그렇게 첫인상이랑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탑차 아저씨도 그렇고, 생긴 거랑 다르게 노네.'
겉보기에만 고등학생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속으로 헛웃음을 짓고는 농담조로 나현주에게 말을 건넨다.
"대신 인건비로 등심 조금만 잘라주라. 50리터 만드는데 고기가 그만큼이나 들어가면 너무 과하잖아."
게다가 그렇게 질 좋은 등심을 전부 카레 만드는 데에만 쓰면 아깝다고. 스테이크 정도는 구워 먹어 줘야지.
그리 말하며 실실 웃으니, 나현주가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도마 위로 커다란 칼을 꺼내 들었다. 시미터처럼 휘어진 기다란 칼날이 인상적인 칼. 부처나이프다.
'장비가 꽤 본격적인걸.'
정육점에서나 사용하는 그 칼을 보고 대충 나현주의 가업이 뭔지 짐작이 가기 시작한 그때, 나현주가 재빠르게 칼을 휘둘러 익숙한 손놀림으로 등심 아래쪽에 붙은 채끝살 부위를 큼지막하게 떼어내더니 나를 향해 내밀었다.
"자, 여기."
"…… 농담이었는데……."
"난 아니야. 농담."
"안 줘도 된다니까?"
"안 받을 거면 말고. 그 대신 너도 그거 놓고 가."
"…… 그래 그럼. 받지 뭐."
"잘 생각했어."
내 항복 선언에 알아보기 힘든 작은 미소를 짓는 나현주.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손에 들린 고기를 바라봤다.
'이 크기면 2kg은 되겠다. 인건비치고는 좀 과한데…….'
첫인상하고는 딴판이라는 말을 정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과연, 보이는 대로 영 농담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