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3화 (13/403)

13. 대회반 입부.-4-

연회주방에서 일하던 사람들끼리 농담으로 하던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일하면 네 가지의 덕목이 늘어난다고.

"빼이잔느Paysanne. 20g. 30초."

"Oui, Chef!"

그중 첫 번째는 속도였다.

하루에 수백인분의 정찬을 준비해야 하는 연회주방. 느린 자는 살아남지 못했다.

무자비하게 식재료를 찢고 죽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만이 언제고 앞서나갔다.

"라지 다이스Large dice. 60g. 20초."

"Oui, Chef!"

그 두 번째는 욕하는 솜씨였다.

손님부터 시작해서 선배로부터 내리갈굼 하듯 내려오는 욕 섞인 재촉을 듣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욕설의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나도 주방에선 욕과 고함을 입에 달고 살았더랬지.

누군가 말했던가. 외국어를 공부할 때 계속 청해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귀가 뚫린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온다고. 내가 그랬다. 그 청해를 욕으로 했다는 것만 빼면.

"올리베트Olivette. 4개. 1분."

"Oui, Chef!"

세 번째는 기계에 대한 신앙이다.

사람이 수십 분은 걸릴 야채 껍질 깎기를 단 몇 분 만에 해치워 버리는 등. 그런 최신 기계들의 위용을 보고 있으면 없던 신앙심도 생긴다.

가끔은 저 기계에 머신 스피릿이 깃들어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기계교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뤼스Russe. 30g. 30초."

"Oui, Chef!"

마지막으로 늘어나는 것.

그건 바로 악바리 근성이다.

단 두 시간의 연회를 위해 10시간 동안 재료를 다듬는 생활을 하면 근성이 생기지 않으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생기지 않은 녀석들은 진즉에 나가떨어져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쁘랭따니에Printanier. 20g. 30초."

"Oui, Chef!"

요컨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하면은.

"좋습니다. 이제 전부 칼을 내려놓으세요."

"오."

아직 감각이 채 다 돌아오지 않은 이 몸으로도, 이 정도는 아직 할만하다는 것이다.

"전부 자리에 명찰을 두고 뒤로 물러나세요.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제지에 우르르 걸어나가는 학생들.

손목을 부여잡은 몇몇 아이들은 벌써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먼저 뒤로 빠져 있던 학생들과 섞여서 자리를 잡자.

박예휘 선생님이 우리의 조리대로 걸어 내려왔다.

***

"김인호. 앞으로 나와라."

박예휘의 부름에 학생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잔뜩 경직된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잠시 뒤, 자신의 조리대를 사이에 두고 박예휘와 김인호가 마주섰다.

박예휘는 당근을 써느라 잔뜩 어질러진 조리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인호야.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알겠니?"

"아, 예?"

그 말에 허둥지둥 조리대를 살피는 김인호.

하지만 그의 눈으로는 특별히 눈에 띄는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조리대와 싱크대가 조금 더럽긴 하지만, 한 시간 반을 내리 칼만 다루다 보면 저럴 수도 있는 법 아닌가?

하지만 박예휘는 그런 김인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잘 모르겠어?"

"…… 네."

"좋아. 그럼 내가 말해 주마."

박예휘는 가장 먼저 김인호의 칼에 손을 뻗었다.

"이 칼. 이렇게 조리대 바깥으로 일부분이 튀어나가게 두면 어떡하자는 거지? 칼을 그 자리에 놔두고 갈 때엔 칼은 항상 조리대 안쪽. 남이 쉽게 건들 수 없는 장소에 둬야 한다. 감점 1점."

"윽……!"

이번엔 쥐고 있던 칼의 면을 내보이면서 말을 잇는다.

"칼에 이제까지 썬 당근이 뒤죽박죽 붙어 있지? 써는 방법을 바꿀 때마다 도마나 칼을 확실히 닦지 않았다는 뜻이다. 도마와 칼 관리 미숙. 감점 2점."

이번에는 각각 써는 방법별로 나누어 담은 당근이 담긴 접시로 눈을 돌린다.

접시들은 순서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이리저리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인호야. 혹시 방금 시험 때, 내가 썰라고 했던 방법이 총 몇 가지인지 기억하니?"

"그, 그게……."

고개를 깊숙이 내리까는 김인호.

그런 그를 보며 박예휘가 뒤에 있던 학생들에게 고개를 돌린다.

"몇 개인지 기억하는 사람?"

그 말에 번쩍 손을 드는 백예은. 박예휘가 그녀에게 묻는다.

"그래, 백예은 학생. 말해 보렴."

"35가지입니다."

"정답이야."

다시 김인호에게 묻는다.

"그런데 여기 있는 접시는 총 몇 개지?"

"어, 그러니까……."

곁눈질로 하나하나 확인하려던 김인호의 말을 끊고, 박예휘가 대신 말한다.

"총 27개. 8가지나 빼먹었구나. 감점 8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기에는 늦었단다. 총 감점 10점 초과. 아쉽게도 대회반에 널 추천할 순 없겠구나. 뒤로 돌아가렴."

"예……."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돌아가는 김인호.

창피함과 통증에 덜덜 떨리는 몸이 애처로웠으나, 그런 걸 신경 쓸 박예휘가 아니었다.

그가 무심하게 다음 사람의 이름을 호명한다.

"김두섭 학생. 앞으로."

***

"총 감점 10점 초과. 들어가렴."

"감사합니다……."

그다음 차례였던 김두섭이 박예휘 선생님의 입 앞에 격추되는 것을 보며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악마 같으니…….'

내 앞 순번이었던 김두섭은 썰어둔 당근의 가짓수는 맞았지만, 자신이 말한 써는 법을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던 박예휘 선생님의 지적에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세 번째 써는 법의 굵기가 틀렸느니, 열한 번째는 모양이 틀렸느니. 저걸 일일이 잘못 됐다고 때려 박는데, 솔직히 섬찟하다. 저게 사람이냐.

결국 울상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김두섭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꼈으나, 어쩌겠는가, 저 선생님이 원래 저런 사람인걸. 그리고 가끔은 충격 요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 학교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로 지금의 아이들에겐 한창 자신감이 충만해져 있다. 특히 대회반에 지원하려는 학생들한테는.

아이들 안에 들어찬 그 과도한 자신감을, 반죽에 가스를 빼듯 이렇게 살살 눌러 빼내 주면, 오만이 빠진 그 자리를 더 많은 지식이 대신하게 될 터. 아주 못 할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좀 살살 하지.'

자신감이 빠지다 못해 나락으로 박힌 표정이지 않은가.

사실 이 나이에 저만큼만 해도 그게 어딘데.

"다음. 류찬혁. 앞으로."

"예."

아, 그다음 순서가 나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나는 조리대로 발을 옮겼다.

***

박예휘는 한껏 가늘어진 눈으로 찬혁의 조리대를 흘겨봤다.

'칼, 도마. 둘 다 깨끗해.'

딱 봐도 칼과 도마는 행주로 깨끗하게 닦여 있는 것이 보였다.

칼날의 방향이나 둔 자리만 보아도 딱히 딴지를 걸 곳은 없었다.

'접시는…….'

접시의 개수 또한 딱 35개. 5열로 반듯하게 줄지어 놓인 작은 접시들을 보고 박예휘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정리는 깔끔하구나."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찬혁. 박예휘가 찬혁에게 물었다.

"순서가 어떻게 되니?"

"제 기준 왼쪽 위부터 오른쪽으로 보시면 돼요."

"그래, 알겠다."

그 말을 들은 박예휘가 더 면밀하게 접시 안에 담긴 내용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첫 번째, 부르노와즈. 30g. 모양, 무게 둘 다 정확하구나."

첫 번째 접시부터,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검사를 이어나가던 박예휘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이게 한 달 전의 그 류찬혁과 같은 사람이라고?'

박예휘만 한 경력을 쌓은 사람이라면, 자주 사용되는 식재료에 한정하여 굳이 무게를 재지 않고도 어떤 재료가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눈으로 살핀 당근들의 손질 상태는 완벽했다.

그가 말한 순서대로 하나의 틀림도 없이 썰린 당근의 상태.

굵기도, 길이도, 모양도, 무게마저 그의 지시를 완벽하게 따르고 있었다.

"찬혁아."

"예?"

"혹시 입학시험 뒤로 요리 공부를 따로 학원 같은 곳에서 배우고 온 거니?"

"어…… 아닐…… 걸요? 예. 없어요. 독학이라면 좀 했지만요."

그런 찬혁에 대답에 박예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독학? 이게 독학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실력인가?'

박예휘 또한 오랫동안 성심고에서 근무한 교사. 매년 천재라 불리는 학생은 있어왔고, 그들 중 박예휘의 가르침을 거치지 않은 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이 류찬혁이라는 학생은 그들과는 묘하게 달랐다.

천재적인 영감의 기운보다는, 닳고 닳은 것 같은 경험의 잔재를 느낀다.

칼질을 마친 뒤 칼로 도마를 살짝 쳐서 여분의 잔여물을 털어내는 동작.

칼날에 붙은 찌꺼기를 조리대 모서리에 긁어 마찰을 이용해 제거하는 방법.

다른 이가 가져가기 쉽도록 질서정연하게 놓인 접시들.

그 많은 당근의 껍질을 잘라냈음에도 한 곳으로 잘 그러모아 더러워지지 않은 싱크대.

이 모든 것들은 천재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쌓이고 쌓인 경력에서 나와야 정상인 행동들이다.

'대체…….'

찬혁을 유심히 지켜볼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가 찬혁에게 원래 기대하고 있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1학기 때부터 대회반에 참가하겠다는 포부는 훌륭했지만, 그저 그뿐. 아직 대회반에 도전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실력을 갈고닦았을 줄이야…….'

이 정도면 그냥 갈고닦은 수준이 아니라 숫제 그라인더로 갈아 버리고 새 사람을 데려온 것 같았다.

천천히 모든 접시의 확인을 끝낸 박예휘가 찬혁에게 말했다.

"…… 감점할 부분이 없구나. 합격이다."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로 돌아가는 찬혁.

박예휘는 그 뒷모습을 의문에 잠긴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다음 인원을 호명했다.

***

내 심사가 끝난 뒤, 역시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안창민은 당연하다는 듯 합격했다.

다만 의외인 것이 있었다면……

"봐봐! 내가 같이 대회반 들어갈 거라고 했지?"

"……."

백예은. 이 녀석이 진짜로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내 요리 할 때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말자는 신조를 갖고 있어서 딱히 얘가 어떻게 하는지는 못 봤지만, 박예휘 선생님의 시험을 통과한 걸 보면 알아서 잘 했겠지.

'생각보다 솜씨가 좋은 건가.'

하긴, 그 수라상 만들던 솜씨를 생각하면 별것 아니긴 하지.

"그럼 합격한 학생은 류찬혁 학생, 백예은 학생, 안창민 학생 뿐이군요."

수고했다며 고생한 학생들에게 웃음 짓는 선생님이었지만, 방금 전 그 신랄한 비판을 생각하면 저 웃음을 좋게만 받을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는지 어두워진 표정이 좀처럼 밝아지질 않는다.

그런 학생들을 향해 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선생님이 말했다.

"오늘 합격한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대회반에 참가할 최소한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짝짝짝짝.

그 말과 함께 홀로 박수를 치며 학생들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해보았으나, 기운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 덕에 쓸쓸한 박수 소리만 메아리쳤다.

"흠흠. 치사는 이쯤 하고. 합격자 여러분들에게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시험 과제를 알려드려야 하겠네요."

두 번째?

그 말에 학생들이 잠시 웅성거렸으나 금세 조용해졌다.

만족스럽게 끄덕인 선생님이 말을 잇는다.

"두 번째 시험은 달걀을 사용한 요리입니다. 방식은 채점식. 각 반에서 여러분처럼 1차 시험을 합격한 학생들이 만든 요리를 저를 포함한 교사 셋이 각각 채점해서, 가장 고득점을 획득한 학생 5명이 순서대로 대회반에 뽑히게 될 거예요."

'달걀?'

세상에 맙소사. 산 넘어 산이라더니.

또다시 찾아온 어려운 과제에, 내 머리가 지끈지끈 아려오기 시작한다.

"시험은 다음 주 월요일 실습 시간에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 모두 최선을 다해 준비하길 바랄게요. 모두 수고 많았어요."

자기 할 말을 끝내고는 퇴장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젠장. 이 학교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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