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2화 (12/403)

12. 대회반 입부.-3-

"김인호, 김두섭, 류찬혁, 백예은, 신민지, 안창민, 정효석, 홍다연"

박예휘 선생님이 대회부 지원자들의 이름을 주르륵 나열한다.

이름을 불리고 흠칫흠칫 반응하는 몇 명의 아이들.

"지금 호명한 여덟 명은 앞쪽부터 순서대로 자리를 채우세요."

부름에 호명 받은 인원들이 차례차례 앞으로 나와서 선다. 백예은, 안창민 외에 다섯 명의 인원들과 마지막으로 나까지. 번호순대로 조리대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가 전부 채워진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에 남은 학생들을 부른다.

"다른 여러분도 조를 다 짜셨으면 자리를 잡아도 좋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로 들어왔다.

박예휘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 웃는다.

"좋습니다. 여러분은 행동이 빨라서 좋군요."

저 말은 만약 움직이는 게 늦었다면 호통이 날아들 수도 있었음을 돌려 말하는 것이다.

"오늘 수업에서 뭘 배울지는 미리 들어서 알고 있겠죠?"

"예."

"좋아요."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아이들을 보며 다시 한번 끄덕인다.

"그럼 오늘의 주제인, 양식에서 식재료를 써는 법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도록 할게요."

그 말과 함께 선생님이 칼 가방을 꺼내 든다.

조리대 위에 올린 가방을 열어젖히자 등장하는 열 자루 남짓한 날붙이들.

박예휘 선생님은 그 모든 칼의 칼집을 벗겨 도마 위에 늘어놓았다.

"칼을 다루는 법에 앞서, 칼의 종류를 소개하는 시간을 먼저 갖도록 하죠."

중식도 하나만을 갖고 온갖 작업을 해내야 하는 중식이나 칼의 종류가 그렇게 세세하게 나눠지지 않은 한식과는 달리, 양식과 일식은 사용하는 칼의 종류가 굉장히 많다.

기본적인 식칼인 셰프 나이프부터, 재료를 얇게 저밀 때 쓰는 슬라이서. 고기를 큼지막하게 나눌 때 쓰는 클리버. 뼈에서 고기를 분리해내는 등의 세밀한 작업을 할 때 쓰는 보닝 나이프. 그 외에도 채소나 빵 전용, 어떤 경우에는 아예 특정한 한 가지 재료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간단하게 설명을 끝낸 선생님은 몇 가지 종류만을 빼놓고 나머지 칼들을 칼 가방에 도로 돌려놓았다.

"이제 여러분 칼도 꺼내보세요."

그 말을 듣고 여기저기서 칼 가방의 클립을 여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린다.

원래부터 본인의 칼을 갖고 있던 애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입학 전 단체주문으로 구매한 칼 세트를 꺼내든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사용할 것은 기본적인 셰프 나이프와 샤토 나이프. 두 종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나머지 것들은 다음 기회에 사용해 보도록 합시다."

평범한 식칼 모양을 한 셰프 나이프와 과일이나 채소를 다듬을 때 쓰는 맹금류의 발톱처럼 휘어져 있는 작은 칼날을 가진 샤토 나이프.

두 종류의 칼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자, 준비가 다 됐으면 시작해 볼까요?"

언제부터 있었을까. 조리대 옆에 놓인 커다란 박스에서 당근을 몇 개 집어오는 선생님.

그 당근을 보고 내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오늘은 이 당근으로 연습을 해봅시다."

설마설마했건만, 당근을 가져오다니. 성격 나쁜 아저씨 같으니……!

***

보통 당근을 썰면서 어렵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적당한 단단함. 적당한 크기, 적당한 두께.

'……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상한데.'

아무튼. 힘을 주고 잡아도 쉽게 모양이 망가지지 않고, 썰기 힘들 정도로 단단하지도 않고, 칼이 헛들어갈 정도로 두껍지도 않다.

'그냥 평범하게 썰어야 한다면 말이지…….'

양식에서 채소를 손질할 때의 기초적인 방법은 크게 나누어 약 십 수 가지.

좀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간다면 그보다도 더 많겠지만, 기초적인 손질법만 그 정도 가짓수를 자랑한다.

그중에서는 모양을 잡거나, 기교를 부려 예쁜 모양으로 재료를 잘라내야 할 때도 있는데, 당근은 그 연습에 굉장히 알맞은 식재료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칼질을 간단하면서도 어렵게 만드는 당근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당근은 내부의 섬유소가 일정한 형태의 결을 따라 나뉘는 구조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잘못 힘을 가하면 그 결을 타고 조리하는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형태로 잘려 버리거나, 아니면 부러져 버리기 일쑤. 기껏 잡으려던 모양이 단숨에 망가져 버리는 것이다.

'어려운 모양으로 세공하다가 그래 버리면 멘탈이 보통 흔들리는 게 아니지.'

그래서 보통 처음 채소를 손질하는 것을 연습할 때엔 보다 무른 무 같은 채소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근데 그걸 첫 시간부터 당근을 가져올 줄이야.

'박스가 한 둘이 아닌데, 설마 다 손질하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조리대 뒤편에 가득 쌓인 상자로 곁눈질을 하는 동안, 박예휘 선생님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학생들에게 채소 손질법을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줄리앙을 하는 법에 대해서 알아보죠. 줄리앙은 간단히 말하자면 채를 써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굵기에 따라 부르는 방법이 각양각색이죠."

도마가 통통통 하고 몇 차례 울리는 소리가, 마치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먹는 소리마냥 연달아 귀를 강타한다.

─타다다다당!

"이렇게 굵게 자른 줄리앙은 바또넷Batonnet."

다시 한번 똑같은 소리.

"그 절반 굵기로 조금 더 얇게 자른 중간 크기의 줄리앙은 알류메뜨Allumette."

다시 한번.

"그리고 거기서 한 번 더 절반 굵기로 자른 이 줄리앙을 파인 줄리앙Fine julienne이라고 합니다."

0.6cm*0.6cm*6cm부터 시작하여 0.3cm. 종국에는 0.15cm까지.

콤마 단위의 굵기를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로 재단해내는 모습에 학생들에게서 경악이 흐른다.

'누가 보면 자로 잰 줄 알겠네.'

군단장 취임식에 사열한 병사들이 떠오를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도마 위에 늘어진 당근들을 보며 나 또한 감탄사를 흘렸다.

과연 파리의 0티어 레스토랑인 데 로얄 출신이란 게 허명이 아니다. 저 정도는 해야 그런 곳의 부주방장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일까.

이후로도 거의 20가지에 달하는 채소 손질법을 알려준 박예휘 선생님이 드디어 칼을 내려놨다.

쉴 새 없이 그 모든 가르침을 노트에 적어 나르던 학생들의 손도 드디어 쉴 시간을 얻는 듯했다.

"그럼 지금부터 직접 해봅시다."

해맑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잠깐이나마 밝아졌던 학생들의 표정이 암울해졌지만, 박예휘 선생님은 아랑곳없이 각자 당근을 가져가라며 학생들을 재촉했다.

이윽고, 모든 학생이 인당 약 열 개에 달하는 당근을 챙긴 것을 확인하자, 박예휘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시간은…… 음, 그래요. 정리할 시간도 필요할 테니까 쉬는 시간 5분 전까지. 쉬는 시간 끝난 다음에는 기다리지 말고 그대로 계속 이어하면 됩니다. 다들 시작하세요."

동시다발적인 한숨소리를 벗으로, 학생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만."

수업이 끝나기 약 20분 전. 박예휘 선생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멎는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동시에 시작된 학생들의 앓는 소리가 적막한 교실을 스멀스멀 채워나간다.

"하하, 다들 아직은 조금 힘든가보군요."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의 눈에 불만이 들어찬다.

누가 뭐래도 10분의 쉬는 시간을 두고 전, 후 30분. 합쳐서 한 시간 동안 쉼 없이 칼을 놀렸으니, 손목이 아플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런 눈빛에 기죽을 박예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무슨 문제가 있냐는 태도로 학생들을 일갈했다.

"고작 이걸로 그렇게 힘들어하면 안 되죠. 여러분이 실제로 업장에 나가면 두 시간, 세 시간은 칼을 손에서 놓지도 못할 텐데, 그때도 이렇게 앓는 소리만 할 생각인가요?"

그 냉랭한 목소리에 술렁이던 분위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박예휘는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들 열심히 하셨어요."

그때까지 썰어놓은 당근을 한곳에 잘 모아서 정리하게끔 지시를 내린 박예휘가 그제야 학생들에게 칼질을 멈추라고 시킨 이유를 알렸다.

"대회반 참가 희망자들에 대한 간단한 테스트가 있을 예정입니다. 다른 여러분은 서둘러 정리를 마치도록 하세요."

그 말에 찬혁을 비롯한 앞줄에 모여 있던 학생들 사이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든 학생이 정리를 끝내고. 다른 학생들을 뒤로 물린 박예휘는 앞선 대회반 지망생들의 자리를 일일이 배정했다.

여기저기 갈라진 학생들에게 박예휘 선생이 다시 한번 당근을 분배한다.

"지원자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번 시간으로 이 모든 과정에 숙달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박예휘가 예리한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본다.

"다만, 여러분이 대회반에 지원한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죠."

"……."

"그렇지 않다면 1학기 때부터 대회반에 지원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한 명 한 명. 그때까지 학생들이 소모하고도 적잖이 남은 당근을 모조리 나눠준 박예휘가 조리대 앞에 섰다.

"시험을 시작하기 앞서,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학생들보다 한 계단 더 높은 조리대 위에서, 박예휘가 학생들을 내려다보며 묻는다.

"학교에서 대회반에 들어갈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그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다, 시선이 맞은 학생에게 묻는다.

"백예은 학생?"

"에? 예. 그러니까…… 어…… 재능이요?"

"재능! 좋은 대답입니다. 대회반은 말 그대로 본교의 얼굴. 재능 있는 학생은 언제든 원하는 인재죠. 하지만 살짝 부족한 게 있습니다."

이어서 또 다른 학생.

"안창민 학생?"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아, 지식. 물론입니다. 언제든 상급생, 혹은 교사의 지시에 허둥대지 않을 조리지식 또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완벽한 정답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한 명에게.

"류찬혁 학생?"

"근성 아닐까요? 당장 팔이 끊어질 것 같아도, 발목이 부러지기 직전이어도 내색하지 않고 접시를 내놓을 수 있는."

"…… 맞습니다."

박예휘가 깊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본교가 원하는 학생은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고객을 실망시키지 않는 요리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재능을 가진 재능인도 아니고, 천 가지의 요리법을 잊지 않을 지식인도 아닌, 고된 어제를 딛고 더욱 고된 오늘을 살아갈 힘을 가진 요리인을 저희는 원합니다."

훌륭한 대답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을 끝맺은 박예휘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스톱워치를 손에 쥐고 입을 연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기다리던 첫 번째 시험을 시작해 봅시다. 시험 내용은 아주 간단해요."

박예휘가,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는다.

"제가 끝이라고 말할 때까지, 제 지시에 따라 채소를 손질해서 분류하세요."

정말로 훌륭하게 사람을 조질 것 같은 미소라고, 찬혁은 생각했다.

"부르노와즈brunoise. 30g. 45초. 끝나면 보고. 대답은 예Oui, 셰프Chef로 통일. 시작하세요."

"Oui, Chef!"

한때 파리의 주방에서 정열을 불태우던 때를 되새기며, 찬혁은 칼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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