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쇠로 시작하여 불로 끝나는 것.-1-
─띠리리링. 띠리리링.
몇 차례 울리는 벨소리.
한 번의 신호가 갈 때마다, 마치 자동차의 기어를 하나씩 올리듯 긴장감이 더해간다.
─띠리리링. 딸깍.
"!!"
말이 되지 못한 외침이 입안을 맴돈다.
소리가 되지 못한 외침이 자신을 풀어달라며 아우성치지만, 고요를 깨트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목젖은 감히 떨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1초. 2초.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만히 핸드폰을 붙들고만 있던 손에서 식은땀이 날 것 같을 무렵, 수화기 저편에서 세상의 정적을 깨트리러 찾아왔다.
─여보세요.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벌써 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수십 년 만에 듣는 목소리는 여전히, 마치 어제도 대화를 나눈 것 마냥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 여보세요?"
─찬혁이냐? 밥 먹으러 갔다더만 밥은 잘 먹었고?
"그럼요. 제가 먹는 거 거르는 거 보셨어요?"
─하하하. 그래, 잘 먹었으면 됐다.
자기 멋대로 쉼표를 찍으며 나오는 말.
하지만 벅찬 기쁨에 메는 목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장님."
─음?
내 입이 저도 모르게 열렸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그래라. 뭔데?
언젠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요리사요. 되려 할 때도 힘들고, 되고 나서도 힘들겠죠?"
미래에서 그 꼴을 보고 또 똑같은 짓을 하려 하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겠지.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분명 힘들 거야.
한 번 숨을 고른 사장님이 웃는다.
─그래서, 그만둘 거냐? 거기까지 가놓고?
마치 놀리는 것 같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
내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그 대답에 나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절대 못 그만두죠."
─그렇지?
실실 웃는 목소리에 내가 말을 이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무슨 몇 년 동안 얼굴도 안 본 사람처럼 말하네.
정곡을 찔린 기분에 잠깐 말이 멎었다.
─그래, 나도 입학식 잘 했나 물어보려 전화해 본 거니까.
"벼, 별문제 없었어요. 예."
괜히 쓰러졌다고 말하면 걱정을 끼칠까 말을 얼버무렸다.
"잘 할 테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그래. 너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신뢰가 섞인 목소리에 괜히 한 번 더 울컥했다.
더 이상 전화를 이어나갔다간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서둘러 작별인사를 건넨다.
"저, 그럼 이만 끊을게요."
─오냐. 잘 있고. 종종 전화해라.
"예. 다음에는 제가 먼저 할게요."
─띡.
"…… 후우……."
검게 변한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길게 숨을 내뱉는다.
이제, 정말로 마음에는 한 점의 흐림조차 남지 않았다.
돌아보는 일 없이 나아갈 수 있다. 해낼 수 있다.
그런 믿음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는 기분이었다.
***
결과적으로 말하면, 기분에 불과했다. 당장은 말이다.
"이걸 예상 못 하다니……."
돌아온 이튿날. 오전 교과 수업을 끝낸 내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었다.
내가 이렇게 책상에 축 늘어져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수업을, 못 따라가겠어……!'
그렇다. 나는 너무 오랜만에 본 교과 과목의 진도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공부를 잘했다고는 빈말로라도 말하기 힘든 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업 첫날부터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버벅대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 영어는 평소에 하던 게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 외 나머지 교과가 문제였다.
수학은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외워야 할 판이고, 과학도 주기율표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국어나 사회는 다른 교과보다 상태가 좀 나은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
'손 감각도 아직 안 돌아왔는데. 쯧.'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에서 교과 과목을 반드시 잘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비해 내신 관리를 최대한 해두는 편이 유리하게 작용한다.
'3학년 때 있을 면접 심사도 생각해야 해.'
그 외에도 담임교사의 추천을 받아 출전할 수 있는 대회라든가.
이력서에 써넣을 것이 한 줄이라도 더 있는 편이 졸업 후에 무엇을 하든 더 낫다.
'예전에는 무너진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해서 결국 전학을 선택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다르게 만들 것이다.
실습과목이나 그 과정에 있을 조리과학 같은 과목에선 당장 크게 위태로울 것이 없다.
그러니 선택과 집중으로 일반 교과목들을 철저히 복습하는 게 당장 필요한 일이겠지.
'쓰읍…….'
앞으로 칼을 잠시 멀리해야 할 것 같단 생각에 속이 쓰려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남자가 한 번 칼을 뽑으면 무라도 베어야 한다지 않던가.
이쪽은 고작 무로 끝날 수는 없다. 베야 한다면 적어도 소 한 마리쯤은 도축할 걸 각오해야지.
"후우, 이쯤 하자."
더 이상 머리로만 생각해 봐야 당장은 의미가 없는 일.
나는 눈을 돌려 오후에 있을 수업을 확인했다.
오늘의 실습과목은 중식이었다.
***
입학식 날 학교에서 나눠주었던 조리복을 입은 학생들이 실습실 한구석에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조를 짜기 위해서 잠시 조리대를 비워둔 것이다.
실습 시간에는 4인으로 한 조를 꾸려 실습을 진행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같이 힘을 합쳐 만들라는 건 아니지만…….'
딱히 큰 이유는 없다. 그저 실습실의 구조가 4인 1조에 맞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조를 짠다고 그 조원으로 고정되는 것도 아니기에, 예전 조를 짤 때에는 룸메이트인 김철정을 베이스로 두고 두 명을 더 구하는 식으로 짜곤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도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조원이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을 뿐.
"어?"
"아."
***
중식 담당 교사인 최태호 선생님의 말에 따라 조를 짜던 나와 김철정은 좀처럼 조원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자리 차지하기 게임처럼, 하나둘 4명씩 짝지어지는 반 아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던 우리.
딱히 서로를 빼면 아는 얼굴도 없었기에 누구한테 말도 못 붙이고 가만히 손가락이나 빠는 신세였다.
얼마 뒤, 거의 다 짝이 지어진 듯 4명 씩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각각 자리를 잡아간다.
하나둘 채워지는 자리에 누군가 남은 사람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낯익은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옅은 구릿빛으로 탄 피부. 까만 단발.
어제 낯. 기숙사 주방에서 봤던 애였다.
분명 이름이……
"양희연?"
"응?"
무심코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들은 것일까.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양희연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
나를 보자마자 다시 한번 눈에 띄게 몸이 굳는 양희연.
그런 반응에 내 인상이 작게 찌푸려진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왜 나를 볼 때마다 저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자니, 옆에서 김철중이 물어왔다.
"뭐야, 아는 애야?"
"어. 어제 주방에서 잠깐 봤어."
대답하며 주변을 살피니, 아무래도 우리 말고는 조가 다 짜인 것 같았다.
최태호 선생님도 우리를 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야. 우리 쟤네랑 조 짜야 될 것 같다."
"그러게. 다른 애들은 벌써 다 붙었나 보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에, 나와 김철중은 양희연과 그 일행에게 다가섰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나였다.
"아무래도 남은 게 우리밖에 없는 것 같은데?"
"……."
묘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양희연.
그 침묵에 머쓱해진 나는 옆에 있던 김철중을 앞으로 내세워 나와 함께 소개했다.
"내 이름은 류찬혁이고, 얘는 김철정. 너는 양희연…… 맞지?"
─끄덕.
이번에도 말은 안 하고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무슨 꿀이라도 먹었나.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속으로 한 차례 불평을 내뱉고는, 그 옆에 있던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키였다.
아무리 내가 아직 키가 덜 자랐다지만,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170은 되어 보이는데.'
여자치고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신. 길쭉길쭉한 팔다리 덕에 하얀 조리복의 맵시가 잘 어울렸다.
일행 쪽에 시선을 돌리고 말을 잇는다.
"미안한데 내가 자기소개 때 없었거든. 혹시 이름이 뭐야?"
"나현주."
"난 류찬혁. 잘 부탁해."
"응."
이쪽도 또 훌륭한 단답형.
다른 게 있다면 이쪽은 좀 더 냉랭하다고 할까. 담백한 태도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대충 서로 통성명만을 마친 뒤, 우리는 남아 있던 자리로 이동했다.
그제야 최태호 선생님도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조리대 앞에 섰다.
주름은 많지만, 몸 자체가 두껍다. 적어도 평범한 20대보다는 훨씬 건장한 모습 탓에 50세에 가까운 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헬스 중독자니까…….'
요리사에게 있어서 피지컬 또한 자질의 일부분.
그런 의미에서 최태호 선생님은 요리사의 자질이 흘러넘치시는 분이었다.
이윽고 학생들 사이의 소란이 줄어들자, 최태호 선생님이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1년 동안 너희들에게 중식을 가르치게 된 최태호다."
보통 다른 선생들 같았다면 짧은 자기소개나 학습계획 등을 말했을 타이밍이었으나, 최태호 선생님은 그런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 그럼, 수업을 시작한다."
'역시나.'
앞으로 배울 것에 대한 설명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묵묵히 조리도구를 준비하기 시작한 최태호 선생님.
중식도와 국자, 그릇 등의 도구를 순식간에 준비한 선생님이 말을 잇는다.
"오늘 할 수업은 간단하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면 따라서 만들기만 하면 된다."
"이번 수업은 평가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너희 반 전체의 수준을 가늠하는 시간이 될 거다. 그러니 대충할 생각은 마라."
엄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선생님은, '재료를 갖고 올 테니 조용히 있도록.'이란 말을 남기고 실습실에서 나갔다.
물론, 그 말을 순순히 들을 학생들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문을 나서자마자, 실습실이 울리도록 떠들기 시작하는 아이들.
그것은 김철정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갑자기?"
"그러게 말이다."
사실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선생님이었다. 기초를 확인할 시간도 없이 바로 시작이라니.
'하긴, 이 학교에 들어왔을 정도면 기초 정도는 떼고 온 애들이니까.'
적어도 칼 쥐는 법은 알겠지.
그런 마음으로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는데, 철정이 녀석은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왜 그래?"
"아니, 뭘 만들게 할까 싶어서."
그러고 보니 메뉴를 안 알려주고 갔구나.
"수준을 본다고 했으니까, 대충 뭔지는 알 것 같은데."
"응?"
"중식에서 수준을 알아볼 때 쓸 요리는 보통 하나밖에 없지."
그런 내 발언에 김철정이 내게 묻는다.
"그게 뭔데?"
"……."
아닌 척 귀를 기울이는 양희연과, 그냥 대놓고 나를 쳐다보는 나현주.
기대가 서린 눈빛에 나는 뜸 들이지 않고 답을 말했다.
"뻔해. 마파두부야."
마파두부. 내 예상이지만, 오늘 실습 메뉴는 그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