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시 한 발짝.-3-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갑자기 간지러워진 귓등을 긁적이며 나는 교문을 나섰다.
날 욕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긴 하지만, 같은 생각을 하며 손을 다시 내리다 무심코 눈에 들어온 손.
'이때 내 손은 이랬구나.'
아직 성장기가 제대로 오지 않아 미래에 비하면 비교적 자그마한 손.
요리를 배우고, 익혀나가며 하나둘 쌓인 잔상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칼 갈다가 손바닥 베인 흉터도 없고, 프라이팬 옮기다 끓인 기름에 덴 화상 자국도 없어.'
180도 끓는 기름에 데고, 칼에 베이고……!
…… 그만하자.
아무튼, 그런 생고생을 겪은 흔적이 없는 두 팔을 보고 있자니 새삼 실감이 됐다.
'진짜로 돌아왔어.'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어떻게 돌아왔을까? 이유가 뭐지? 난 거기서 죽은 건가?
'전혀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왔다.
애당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니, 생각을 해봐야 답이 나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생각에 빠져 발을 옮기니, 어느새 기숙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
그리고 기숙사 정문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
더 잘랐다간 막 입대하는 이등병처럼 보일 것 같은 까까머리.
다름 아닌 내 룸메이트, 김철정이었다.
"야, 김철정."
팔을 흔들며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니 이쪽을 돌아본다.
김철정은 나를 보고는 문을 열어 보이는 자세로 내게 손짓했다.
느긋하게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말을 걸어온다.
"어, 다녀왔냐."
"응. 근데 넌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나? 밥 먹고 왔는데?"
"뭐? 벌써 점심시간이었어?"
깜짝 놀란 나는 기숙사 현관에 걸린 시계를 살폈다.
벌써 1시가 지난 시각.
폰은 방에 있을 테고, 시계도 따로 들고 다니지 않는 탓에 시간 확인을 못 하고 있었다.
괜히 날 붙잡은 박예휘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들끓었다.
"아 씨, 왜 갑자기 사람을 붙잡아선."
"무슨 얘기 했는데?"
"아니 뭐, 무슨 지병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말씀드렸지."
그 말을 들은 김철정의 표정이 께름칙해진다.
"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갑자기 새벽에 사람 잠 다 깨워놓고 쓰러져서?"
"미안하게 됐다."
"알면 됐어. 아무튼, 정말 문제없는 거지?"
괜히 나중 가서 또 사람 놀래키지 말고 지금 말하라며 다그치는 김철정에게 웃으며 답한다.
"진짜 문제없대도. 그나저나 지금 밥 먹으러 가봐야 늦었겠지?"
"어. 슬슬 치우는 분위기던데."
"그래? 여기 밥 맛있는데. 아쉽네."
빈말이 아니었다. 이 학교는 이름만 요리 특성화 고등학교가 아니라 이건지 급식이 정말 맛있는 편이었다.
듣기로는 과거 졸업생 중 한 명이 창업한 급식업체와 계약을 맺었다던가.
내 말을 들은 김철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맛있긴 하던데, 넌 그걸 어떻게 아냐? 너 여기 밥 먹어본 적 없잖아."
"응? 아."
그러고 보니 아직은 여기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지.
나는 말끝을 흐리며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들은 거야, 들은 거. 아까 선생님이 맛있으니까 꼭 먹어보라고 하셨거든."
"그래?"
뭔가 앞뒤가 안 맞는데…….라고 중얼거리는 김철정에게서 화제를 돌린다.
"어차피 늦은 거면 옷 갈아입고 기숙사 주방이나 가야겠다."
"주방? 거긴 왜?"
"아. 가끔 끼니 놓치면 거기서 해결하면 돼…… 엔다고 기숙사 쓰던 사람이 그러더라, 인터넷에서."
"아 진짜?"
놀랍다는 표정의 김철정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진짜로. 재료도 기본적인 건 얼추 있다던데?"
물론 정보 출처는 내 자신이다.
기숙사에 살며 방과 후에 요리 연습하는 학생들이 나름 있는 편인데, 그런 학생들은 보통 저녁을 자기가 만든 걸로 때워 버리고 급식을 거른다.
'만든 걸 버릴 수는 없으니까.'
만든 건 일단 자기가 먹고, 그런데도 남으면 가끔 기숙사 이웃들을 불러서 먹이기도 하고.
급식이 남는 거 아니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1학년 2학기 때부터 그런 학생들은 대부분 아예 석식을 신청하지 않는다.
'나도 그랬고.'
가끔 만들어 먹기 귀찮은 날에는 다른 애가 만든 음식으로 저녁을 때운 석식 신청자한테 학생증을 빌려서 먹었던 적도 있었더랬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3층 방에 도착한 우리.
"다녀와."
"엉."
김철정이 자긴 씻고 방에서 쉬겠다며 씻으러 간 사이, 나는 옷을 갈아입고 학생증만을 챙겨 다시 방을 나섰다.
***
기숙사의 주방을 학생이 사용할 때의 방법은 굉장히 간단하다.
1. 학생증을 리더기에 찍고 들어간다.
2. 주방을 사용하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3. 들어올 때처럼 학생증을 리더기에 찍고 나온다.
청소는 일요일 제외 오후 8시.
학생증을 통한 입, 퇴실 시간 기록과 CCTV가 있기에 청소를 제대로 해놓지 않는 등, 규칙을 어기면 벌점을 받는다.
그 외에도 학기 말 주방 대청소 같은 사소한 이벤트도 몇몇 있지만, 일단 기본적인 것만 지키면 학교에서는 주방을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 하지 않는다.
'대신 기숙사비가 좀 비싸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예전에도 사용했던 해결방안이 있다.
─삑.
교통카드를 찍듯 리더기에 학생증을 찍고 잠금장치가 해제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환한 주방. 왜 불이 켜져 있나 싶어서 주변을 살피니, 식기 선반에 가려진 주방 반대편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선객이 있나보다.
'저 사람도 점심을 못 먹었나.'
아니면 연습을 하러 온 것일 수도 있겠지.
이내 신경을 거두며 적당한 화구 옆으로 자리를 잡는다.
'뭐 먹지…….'
일단 배가 고프니 오기는 왔는데, 당장 뭘 만들자고 마음먹고 온 것은 아니었다.
잠깐 생각을 하다가, 고민을 접고 냉장고를 먼저 살피기로 했다.
'재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만드니까.'
한쪽 구석에 있는 냉장고로 가서 내용물을 살핀다.
마늘, 파 등을 비롯한 기본적인 향신채가 몇 종류.
이것도 분기마다 채워놓는 재료이기 때문에 그냥 써도 상관없다.
대충 내용물을 확인하고, 이번에는 냉장고 옆에 있는 선반으로 시선을 옮긴다.
소금, 설탕, 식초, 간장 등 기본적인 조미료부터 시작해서 말린 허브나 쿠민, 스타아니스(팔각) 등등. 다양한 나라의 향신료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다시 보니 종류의 방대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예전에는 다른 곳도 이만큼은 아니어도 비슷하긴 할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학교는 뭔가 씌었는지 그냥 기숙사에 주방을 따로 만들지를 않나, 수업에나 쓸 조미료를 그대로 옮겨놓질 않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참 많이도 한다 싶다.
'그래도 덕분에 잘 쓰니까 감사할 따름이지.'
냉장고 속 재료와 선반에 있는 재료.
그 둘을 머릿속으로 조합하여 대충 간단히 먹을 수 있을 만한 레시피를 짜본다.
'보자…… 마늘, 레몬, 이태리 파슬리…….오.'
마침 딱 좋은 레시피가 머리를 스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재료가 눈에 띄질 않는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도통 보이질 않는 것이 설마 없는 건가 싶었다.
'아니 그게 없다고? 말도 안 되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잡아놓은 자리를 바라봤다.
그 순간, 선객이라고 생각했던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히잇!?"
"엉?"
갑자기 시선이 마주친 탓인지 소스라치게 놀라는 선객.
왜 저렇게 놀라는 건가 싶어 그쪽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탄성을 내뱉는다.
"아, 찾았다."
나는 성큼성큼 선객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
성심조리고등학교 1학년 1반. 양희연.
그녀는 부산에서 올라와 어제부로 기숙사에서 살게 된 학생이었다.
기숙사 지하에 커다란 주방이 있단 말에 한 번 구경하러 왔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 갖춰진 설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그러다가 기왕 온 김에 뭐라도 해볼까 싶어 이것저것 식재료를 챙겼지만,
아는 거라곤 어부를 평생토록 해온 아빠한테 배운 낚시와 생선 다루는 것이 전부라 뭘 만들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새 들어온 건지 모를 남자애 하나가 선반을 뒤지고 있기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가버렸다.
'류찬혁?'
빤히 바라보다,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입학식도 아파서 빠졌다는 애.
'자기소개 하던 걸 보면 그렇게 나약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는데…….'
나름 모난 데 없는, 다른 애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류찬혁은 좀처럼 무언가를 찾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로 찾는 게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류찬혁이 고개를 돌렸다.
"히잇!?"
그리고, 양희연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이 마주친 류찬혁의 얼굴이, 무슨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부인 아버지의 친구분들을 자주 뵈며 나름 험상궂은 얼굴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희연이었지만, 찬혁의 얼굴은 무언가 달랐다.
이마에서 꿈틀거리는 힘줄.
올라가다 못해 예리하게 갈린 칼처럼 날 선 눈초리.
짜증에 물들어 번들거리는 눈빛.
마치, 당장이라도 손에 집히는 게 있으면 집어 던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느 의미 탈 인간적인 표정을 지은 찬혁이, 갑자기 희연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무, 뭐야!?'
한 발짝, 한 발짝. 양희연에게 다가오는 류찬혁.
얼굴은 처음 봤을 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그런 표정을 보고 나니 오히려 지금이 더 무서웠다.
"……."
류찬혁이, 그녀 앞에 섰다.
이미 돌처럼 굳은 희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릴 뿐이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찬혁이 입을 열었다.
"이거, 저도 좀 써도 돼요?"
희연이 챙겨왔던 파스타 면을 든 찬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지도 못한 존댓말이었다.
***
옅은 구릿빛으로 탄 피부와 검은 단발. 키는 나보다 조금 작다. 150을 좀 넘을까.
"?"
자기 혼자 벌벌 떨다가, 미어캣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참 바쁜 사람이다 싶었다.
"웬 존댓말……?"
뭔가 특이한 억양이 담긴 목소리였다.
"어, 선배 아니셨어요?"
입학식 첫날부터 되게 자연스럽게 주방을 쓰고 있기에 선배인 줄 알았는데.
"나, 너랑 같은 반. 양희연."
같은 반이었나. 전혀 몰랐다.
…… 근데 왜 단답형이냐.
"같은 반이었구나. …… 이거, 써도 돼?"
─끄덕
내 질문에 고갯짓으로 대답하는 양희연.
"그럼 좀 가져간다."
포장이 뜯어진 파스타 면을 대충 내 기준 1인분 분량에 맞춰 챙겨든다.
'500원 크기니 뭐니 하는데 솔직히 그걸로는 배가 안 찬단 말이지…….'
아무튼, 이걸로 재료준비는 끝.
파스타면, 마늘, 페페론치노, 이태리 파슬리, 레몬, 올리브유, 버터. 거기에 기본적인 소금과 후추.
'대충 만들어 먹을 때는 이게 최고지.'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작해도 길어봐야 10분 내외로 만들 수 있는 요리.
알리오 에 올리오aglio e olio.
괜히 이탈리아어로 써서 뭔가 있어 보이는데, 알리오는 마늘. 올리오는 올리브유.
쉽게 말하자면 마늘 기름에 볶은 국수 요리다.
지금부터 내가 만들 것은 조금 레시피가 다르기는 하지만.
"오, 이건 상태 좀 괜찮네."
조리도구 보관함에 있던 식칼을 꺼내 살핀다.
나름 무게감도 괜찮고, 날도 죽지는 않았다.
보통 이렇게 방치된 칼들은 관리가 안 돼서 칼 모양 철판이나 다름없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운이 좋군.
여기다가 적당한 깊이를 가진 냄비와 프라이팬까지 가져오면, 이제 준비는 끝.
자, 그럼 지금부터 조리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