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시 한 발짝.-2-
처음 주방에 데뷔했을 때가 떠오른다.
막연히 요리사가 되겠다는 마음만을 갖고 들어간 주방.
한자리에 모여 있던 선배들에게도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었다.
"류찬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들 앞에서 자기소개하는 것도 오랜만이기에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인사를 끝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말없이 박예휘 선생님을 다시 바라보니, 꼭 눈으로 "정말 할 말은 그게 전부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앞에 애들 하는 걸 봤으면 좀 나았을 텐데.'
보통 자기소개의 스펙트럼이라는 건 첫빠따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인데, 정작 그걸 못 봤으니 무어라 할 말을 고르기가 어렵다.
무슨 말이라도 좀 더 해볼까 싶다가, 이내 그만뒀다.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내가 "나는 요리왕이 되겠어!" 같은 말을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비슷한 게 되기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박예휘 선생님을 보고 말했다
"저기, 선생님. 이만 들어가도 될까요?"
"어? 어, 그러렴."
당황스런 기색을 보이는 선생님에게서 눈을 돌려 대충 자리를 살폈다.
'애들도 아무데나 앉은 것 같은데…….'
두리번거리던 도중,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나를 보는 김철정을 발견했다.
거부할 이유도 없었고, 나도 기왕 앉는다면 룸메이트 옆이 편했기에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쪽으로 이동했다.
"몸은 괜찮냐?"
"어.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 고맙다."
자리에 앉자마자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묻는 김철정.
얘도 내가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서 많이 놀랐을 텐데, 미안할 따름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박예휘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에 섰다.
"자, 성심조리고등학교에 입학한 여러분들. 환영합니다."
간단한 인사로 어수선하던 분위기를 환기한 선생님이 분필을 잡고 칠판에 이름을 써 내린다.
"아까도 말했지만, 못 들은 학생이 있으니 다시 소개하죠. 제 이름은 박예휘라고 해요. 담당하는 과목은 양식입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여러분의 담임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짝짝짝짝.
그렇게 말하며 작게 고개를 숙이는 박예휘 선생님.
짧은 박수 소리가 이어진 뒤. 고개를 든 선생님은 1년 동안의 학습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예를 들어 예정된 시간표 조율 상황이라든가, 실기와 이론의 비율, 수업 시간 같은 것들.
10분 정도 얘기하던 선생님은 잠시 말을 끊고는, 학생들을 쭉 둘러봤다.
"다른 평범한 학교가 아닌 이 학교에 지원한 이유가 여러분들에게는 있겠죠. 미래에 세계에도 이름이 통할 셰프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도 있을 테고, 또 다른 미래를 그리는 학생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박예휘 선생님의 눈이 번뜩인다.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굉장히 힘들 거예요."
한순간에 싸늘해진 목소리에, 아이들의 몸이 굳는다.
"본교에서는 1학년에서 2학년으로,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마다 타교의 몇 배가 넘는 학생들이 전학 절차를 밟고 떠납니다. 어째서일까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박예휘 선생님 스스로 그 질문에 답한다.
"간단합니다. 힘들기 때문이에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저희 학교는 그 어떤 학교보다 가장 현장에 가까운 환경에서의 학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직 신입생인 여러분에게는 좀 이른 이야기이겠지만, 2학기 중간고사 이후부터는 특히나 더 엄격해지겠죠."
'그건 맞는 말이지.'
실제로 과거…… 라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이 학교에서 배우던 시절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낡은 비디오를 재생하듯 되풀이됐다.
'배우는 과목도 너무 많고, 심사받을 때도 힘들고, 시험시간도 빡빡하고…….'
요리를 가르치는 학교 대부분은 보통 한 해에 보통 둘, 많아 봐야 세 개 정도의 과목을 가르친다.
왜? 한식, 양식, 중식, 일식, etc…… 해서 한 해에 많이 배우는 게 좋은 거 아니야?라고 물어볼 수는 있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 할 수 있으면.'
말 그대로다. 보통 요리 한 과목이 그날 시간표에 들어 있다 한다면 2교시를 그 수업에 배정한다. 이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교사가 시범으로 요리를 하고, 학생이 따라 한 뒤 심사를 받는다.
얼핏 보면 간단하지만, 교사는 일부러 평소 조리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학생들에게 자세히 가르치고, 학생들도 처음 해보는 생소한 요리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다 끝나고도 설거지니 남은 짬 청소니…….'
안 그래도 요리는 체력을 소모하는 작업인데, 그걸 매주 매일 하면 사람이 금방 뻗고 만다.
그래서 보통 실습 교과는 격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근데 여기는 그게 아니지.'
그렇다. 이 학교는 그런 거 좆도 신경 안 쓴다.
[수업은 현장처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구지만, 이 학교의 학생으로서는 웃을 수 없다.
이 학교의 시간표는 대충 이러하다.
4~5교시까지는 교과 과목. 그 뒤는 실습 과목.
예외로 들어가는 수요일이 다른 날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지만, 이날에는 오전에 실습을 한다.
이 일과가 3년 내내 오전, 오후 시간대로 바뀌는 것을 제외하면 변함없이 이어진다. 솔직히, 미치지 않는 게 용하다.
언제였더라. 선배들에게 들었던 말이 있다.
예전에 이 학교에 후원을 하는 대기업의 자녀가 입학했는데, 너무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한 탓에 그 기업에서 정식적으로 항의가 들어왔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무슨 커리큘럼이 이렇게 무식하냐. 좀 수정이 필요하지 않겠냐." 였다.
'정말 맞는 말이지…….'
학생 전원이 그 말에 마음속으로 동의했으나, 그 항의에 대한 이사장의 대응은 간단했다.
"실제로 일선에 있는 요리사들은 하루 16시간을 주방에서 일한다. 일주일을 다 합쳐 10시간의 수업조차 견디지 못하는 학생을 우리는 가르치지 않는다."
라며 후원을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우스운 건 그 일화를 듣고 이름 있는 호텔을 보유했다 하는 기업들에서 열렬한 러브콜이 왔다는 거지.
'덕분에 조리 환경은 더 좋아지고, 들어오는 식자재의 질도 나아졌다던가.'
황당함에 무심코 머리를 부여잡고 싶어질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조리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학생들을 굴리는 만큼 복지가 뛰어나니까.
대회 참가비 지원, 재료비 지원, 수상 시 장학금 지원, 기타 등등.
'심지어 기숙사에 있는 대 주방은 365일 24시간 언제나 개방되어 있지.'
정말 요리에 대한 복지만큼은 그 어느 곳도 따라올 수 없는 학교다.
그런 후광에 가린 그림자를 미처 깨닫지 못한 불쌍한 중생들이 가득하다는 걸 뺀다면.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박예휘 선생님의 말도 슬슬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지금의 공부가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여러분들이 흘리는 땀이 미래에 꿈을 향한 발판이 되리라 믿고 배움에 전념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럼 앞으로 1년. 잘 지내봅시다."
─짝짝짝짝.
다시 한번 짧은 박수.
학생들의 박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선생님은 박수가 끝나자 이내 말을 이었다.
"오늘 예정된 시간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만 수업을 마치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선생님이 "아." 하고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찬혁이는 잠시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할까?"
"예?"
갑작스런 호명에 깜짝 놀랐다. 저 양반이 갑자기 왜……
'아니, 그래도 입학 첫날부터 학생한테 뭐라고 하겠어?'
혹시나 싶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네."
"그래, 고맙다. 그럼 이만 마무리 합시다. 다들 수고했어요. 잘 들어가 봐요."
─고생하셨습니다.
힘찬 인사와 함께 아이들이 짐을 챙겨 일어선다.
김철정도 "먼저 가볼게. 이따 보자."라며 쌩하니 나가 버렸다.
'거, 자기도 아는 사람 없으면서 잠깐만 기다려주지.'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교실에 혼자 덜렁 남아 있으려니 뭔지 모를 어색함이 덮친다.
잠시 뒤, 박예휘 선생님이 다가와 내 앞자리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서는 그대로 맞은편에 앉았다.
"괜히 남게 해서 미안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어오는 박예휘 선생님.
하지만 실습 때의 모습을 빙산의 일각이나마 알고 있는 나이기에, 묘한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님이 내게 질문을 건네기 시작한다.
"아까는 시간이 없어서 묻지를 못했구나. 몸은 괜찮니? 열이 심했다던데."
"괜찮아졌어요. 잠자리가 어색해서 밤에 살짝 몸살이 온 것 같아요."
"큰일이 아니라면 다행이다."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웃는 박예휘 선생님.
나는 굳은 미소로 그 말에 답했다.
이후로도 선생님은 내게 지병의 유무나 현재 몸 상태 등을 질문했고, 나도 숨기는 것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몇 번의 대화가 오간 뒤, 박예휘 선생님이 마지막 당부를 하듯 말했다.
"지병이나 그런 게 따로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니, 잘 됐다. 하지만 혹시라도 또 어지럼증이 난다거나 한다면 꼭 선생님한테 말하도록 하렴. 몸조심하고."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너무 오래 잡고 있어서 미안하다. 이만 가도 괜찮아."
그 말을 들은 난 최대한 평범하게, 신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끔 주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찬혁이는 기숙사였지? 조심해서 들어가렴."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드는 선생님을 뒤로하고, 나는 교실을 나섰다.
***
"흐음……."
박예휘는 문을 닫고 나가는 류찬혁의 등을 보며 턱을 괴었다.
"쟤가 류찬혁이구나."
박예휘는 입학식 전 받은 1반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되새겼다.
대부분, 그가 예상한 범위 내의 생활상을 가진 학생들이었지만, 류찬혁이라는 학생은 조금 달랐다.
'편모 가정에, 2학년 때에는 기록은 안 남았어도 경찰서까지 다녀왔다는 소리가 있던데.'
쉽게 말하면 불량 학생의 표본 같은 느낌이었다.
성적 나쁘고, 담임을 비롯한 교사들에게 평판이 안 좋은.
'그런데 그게 1년 만에 그렇게 바뀌었단 말이지?'
성심조리고등학교는 특성화 고등학교,
성적은 물론 가벼운 실기를 통한 시험도 보기에 어중간한 준비로는 결코 쉽게 입학할 수 없는 학교다.
그런데, 2학년 때엔 전교생 중 뒤에서 세는 게 빠를 정도이던 불량 학생이 고등학교 원서를 넣을 때의 성적은 상위 50명 안에 들다니. 보통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그것도 나름 요리까지 배워서.'
학교가 학교이니만큼 식당을 운영하거나 현역 요리사인 학부모를 둔 학생이 많기는 하지만, 류찬혁의 가정은 요식업과는 별다른 관련도 없어 보였다.
'3학년 때 담임의 허가를 받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던가? 고작 반년 일하며 배운 것 치곤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지.'
입학 실기 시험 때 현대판 남자 대장금을 봤다며 교장을 놀라게 한 안창민.
면담 과정에서 고등학생답지 않은 지식을 뽐냈던 백예은.
그 외에도 천재라 부르는 것이 아깝지 않은 학생은 여럿 있었지만, 당장 박예휘의 눈길을 끈 것은 류찬혁이었다.
요리에 있어서 진정한 재능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
하루하루 쌓여가는 고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적어도, 박예휘의 사상은 그랬다.
'괜한 기대를 할 생각은 없지만……."
관심이 생기는 특이한 신입생.
류찬혁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한 박예휘였다.
아마, 본인은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