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화 (2/403)

2. 다시 한 발짝.-1-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다.

아니, 사실 저것도 겸손에 가까운 표현이고, 술고래라는 표현의 반대말이 있다면 내가 딱 그짝일 것이다.

술고래의 반대니까 술멸치? 어감 괜찮다.

헬창의 반대는 멸치인 것처럼 말이다.

내 간이 그렇다. 멸치 수준의 알코올 해독 능력을 가진 자랑스러운 내 장기.

덕분에 회식에 나가면 고래 싸움에 멸치 간이 터지곤 했단다.

아무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어우, 쓰읍……. 숙취 장난 없네."

이렇게 술 마신 다음 날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을 때 늘 하던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뭐 많이 마신 것도 아니다. 소주 한 병?

소주 한 병 마시고 집에 두 발로 들어왔으면 그날은 꽤 술이 잘 받는 편에 속한다.

내 말이 엄살처럼 보이는가?

그렇다면 하루만 내 몸으로 살며 술을 마셔보길 추천한다.

소주 한 병으로 뚝배기를 압력솥으로 만든 느낌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물……."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난다.

방이 어두컴컴한 것이 어떻게 불은 잘 끄고 잤나 보다.

아니면 아예 들어와서 켜지도 않았던가.

어둑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방에서 벽을 더듬어가며 스위치를 찾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원래 이쯤에 스위치가 있어야 하는데?'

내 집의 침실은 굉장히 간단한 구조다.

테이블, 침대, 옷장. 끝.

스위치도 분명 이쯤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아직 취기가 덜 빠졌나 싶어 조금 더 찾으니, 이내 손가락 끝에 걸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찾았다."

─딱!

몇 차례 번쩍거리다 켜지는 형광등.

갑작스러운 광량에 눈을 찡그렸지만, 어둑한 방을 밝혔음에 만족했다.

그렇게 눈을 비비며 거실에 있을 냉장고를 찾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우윽……. 벌써 일어날 시간이야……?"

갑자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는 공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야!?"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여기?"

앞서 말했지만, 내 침실은 굉장히 단조롭다.

딱 수면과 환복, 요리 공부를 위한 가구만 들여놓았으니까.

그런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좌우로 똑같은 위치에 놓인 가구들.

두 개의 침대, 옷장, 책상, 사물함. 그리고 그사이를 양분하듯 놓인 커다란 냉장고.

'내 방이 아니잖아?'

묘하게 눈에 익은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여긴 내 집이 아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눈길을 빼앗기고 있을 때, 내가 일어난 침대의 맞은편에 있던 침대에 펼쳐진 이불이 불쑥 솟아올랐다.

"으앗……!"

나도 모르게 꾹 눌린 비명이 새어나왔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

문을 향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곁눈질한다.

"누구냐고!"

내 외침에 반응한 것일까.

꿈틀거리던 움직임이 멈추고.

이불이, 천천히, 내려온다.

"몇 신데 이렇게 시끄러워……?"

"…… 엉?"

이불 뒤에서 나타난 것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수상하다거나 흉측한 인상착의를 가진 것도 아닌, 평범한 생김새의 애가 한 명.

졸음을 채 떨쳐내지 못한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바라보고 있다.

근데,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상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여다보더니, 잔뜩 썩은 얼굴로 내게 성을 내기 시작한다.

"아니 야, 아직 6시잖아? 왜 이 시간에 사람을 깨우냐?"

"어, 어. 미안."

"미안하면 얼른 불 꺼. 눈 아파. 하 씨 진짜."

그렇게 소리치며 이불을 다시 뒤집어쓰는 아이.

마치 우리가 친한 동갑내기 친구라는 것 마냥 서슴없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사과가 튀어나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딴지조차 걸 수가 없었다.

'여긴 대체……?'

사람이 너무 당황스러우면 오히려 침착해진다고 하던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게 됐다.

'진정하자.'

마음이 차분하게 진정되니, 이제야 주변을 꼼꼼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침대를 비롯한 가구들은 방금 확인했으니 패스.

조금 더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눈에 확 띄는 물건을 발견했다.

냉장고 바로 위.

뽐내듯 홀로 걸려 있는 액자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간다.

액자 속에 담긴 것은 사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A4용지에 글귀가 적인 인쇄물에 불과했다.

적힌 내용도 내가 다 아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성심조리고등학교 기숙사 생활 규칙……?"

수십 년도 더 전에 내 발로 뛰쳐나온 고등학교의 이름.

그제야, 난 내가 깨어난 뒤부터 계속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방의 가구가 익숙한 것?

당연하다. 1년이나 이 방에서 살았으니까.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정체 모를 아이가 눈에 익는 이유?

모르는 게 이상하다. 전학 가기 직전까지 이 녀석, 김철정은 내 룸메이트였으니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잠시 가셨다고 생각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다시금 엄습했다.

"끄윽……!"

무릎을 꿇고 머리를 부여잡는다.

마치 누가 머리에 송곳을 꽂고 망치로 때려 박는 것만 같은 고통.

─벌떡!

"아 진짜, 잠 좀 자자! 불은 또 왜……?"

이불을 내팽개치듯 젖히며 침대에서 일어난 김철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

"…… 여긴."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날 반겼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목 바로 위까지 덮어져 있는 이불을 끌어 내린다.

"꿈이었나……?"

현역 급식이던 시절이 대체 몇 년 전 일인데 이제 와 그런 꿈을 꾼 건지.

학교 애들 중에선 그나마 친한 편이었던 김철정의 얼굴을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괜히 한 번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비강에 스며드는 병원 특유의 알싸한 알코올 냄새.

아마 경찰이 벤치에서 꼴은 날 병원으로 끌고 온 걸지도 모르겠다.

"어머, 일어났니?"

"?"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목소리의 정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의사 선생님인가? 싶어 우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몸은 좀 괜찮고?"

"?"

뭐지 이 의사 선생님. 언제 봤다고 나한테 반말이지?

그런 내 의문에도 의사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새벽 일찍부터 큰일이었지 뭐니, 당직 선생님들이 새벽 댓바람부터 전화로 급한 환자가 생겼대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렇게 말하며 가운의 주머니를 뒤적이던 의사가 이내 안에서 온도계를 꺼내 들었다.

"자, 귀 줘보렴. 체온 한 번 재보자."

나는 순순히 고개를 틀어 귀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의사, 여자인데 뭔가, 나보다 크다.

나도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닌데. 아무리 침대에 앉아 있다지만 머리가 좀 위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어?"

그제야, 나는 의사의 가운 가슴 주머니에 박음질 된 글씨를 발견했다.

성심조리고등학교. 보건교사. 이경림.

2000년 개교 후 약 5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수많은 쉐프를 키워낸 명성을 가진 내 옛 모교와, 그 옆으로 쓰인 사람의 이름.

내 입이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진다.

"저기, 선생님?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나요?"

그 말에 이경림 선생님이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며 말한다.

달력에는, 2020이라는 숫자가 커다란 크기로 프린트되어 있었다.

"응? 3월 2일이잖니?"

생애 한 번뿐인 고등학교 입학식을 양호실에서 치르다니. 너도 참 안 됐다 얘. 라며 가엾단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의사. 아니, 보건 선생님의 말에 나는 현실도피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

잠시 후, 보건 선생님은 내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 내가 배정받은 반까지 안내해 주겠다며 나를 끌고 앞장섰다.

마침 당황스런 타이밍에 적절한 도움이었지만, 정작 내가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혼자 고민에 빠져 보건 선생님의 뒤를 따르던 중, 낯설지만 익숙한 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1학년 1반.

과거, 내가 수학했던 반.

사실, 기억에 남은 애라고는 김철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동창 중에서도 빼어난 애들 몇몇 정도야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뭐, 스타 쉐프 안창민이나, 1000만 구독자를 가진 쿡튜브 스타 백예은 같은…….'

그 외에도 몇 명 더 있긴 하지만, 딱히 신경 쓰고 살진 않았다.

동창이라며 학연에 매달릴 시도를 한다손 쳐도 고등학교 3년 중 고작 1년 같이 다닌 애들이랑 뭘 어쩌겠다고.

'말이 동창이지 걔들도 날 몰랐을 테니까.'

이번에는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교실 앞쪽의 미닫이문을 몇 차례 두드린 뒤, 열고 들어간다.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내게 꽂히는 수십 쌍의 시선들.

어설픈 미소로 그 시선들에 답하며 교탁을 보니, 자기소개 시간이었던 듯 교복을 입은 남자애 하나가 서 있었다.

"예휘 선생님. 아까 말씀드렸던 학생이 방금 막 정신을 차려서요."

"아, 감사합니다, 경림 선생님."

보건 선생님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마찬가지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답한다.

"네가 찬혁이니? 마침 자기소개도 마지막 차례였는데 시간 잘 맞춰 왔구나."

만면에 미소를 짓고 날 맞이하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

그것을 본 내 표정이 굳는다.

그러고 보니 하필 담임이 이 양반이었던가.

이름. 박예휘. 남자. 양식기초 및 양식 심화 담당.

프랑스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로 꼽히는    출신의 요리인.

특기 분야는 앞서 말한 대로 프렌치를 비롯한 이탈리안도 어우르는 양식.

처음 본 학생은 그 인자한 생김새에 속을지도 모르나, 진도가 조금 나간 2학년, 3학년들 사이에서는 선생 중 가장 미친놈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나야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학교 특성상 선배들하고도 종종 수업을 같이 듣거나 요리대회 등에 출전하는 일이 잦았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자, 그만 자리로 들어가렴. 찬혁이는 이리 오고."

엉거주춤하게 교탁 앞에 서 있던 학생이 박예휘 선생님의 말에 자리로 돌아가고, 박예휘 선생님의 손짓에 따라 이번엔 내가 교탁 앞에 선다.

"자기소개 부탁할게."

"아, 예."

한 차례 묵례하듯 꾸벅이곤, 교탁에 서서 반 아이들을 둘러본다.

다들 뚱한 눈으로 별 관심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다시 한번 얻은 기회.

이번에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사실, 생각해 볼 것도 없는 문제였다.

'당연하지.'

이제까지 온갖 눈초리 속에서도 꿋꿋하게 내 길을 걸어왔던 나다.

그런 내가 한 번 잡은 기회를 그리 쉽게 놓칠쏘냐.

시선에 기죽지 말자.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모르고 허무하게 놓쳤던 정상을 향한 동아줄. 나는 지금 다시 한번 그걸 손에 쥐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손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까지더라도 악과 깡으로 부여잡고 올라갈 뿐이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나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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