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23 회: 99 아, 꿈인 줄 알았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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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의 대학생활을 통해 알게 된 남자 후배들 중에 인간적으로 아니, 이성적으로 끌리는 후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장준하, 그 이름 석 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준하는 내가 졸업반이 되던 해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내가 준하를 처음 만난 것은 문학동아리 첫 미팅 때였다. 그때 나는 동아리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준하는 훤칠한 키에 계집애처럼 하얀 피부 그리고 잘생긴 얼굴 때문인지 새로 들어온 동아리 새내기 6명 중에 유독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그런 준하에게 첫눈에 호감을 느꼈고, 준하도 나를 선배가 아닌 누나처럼 대하며 살갑게 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선배라는 호칭보다 누나라는 호칭에 정겨움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시골에서 단신으로 서울로 유학 와 학교 앞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던 내게 준하는 그 언제부터인가 특별한 존재로 내 마음 한켠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준하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졸업을 하자마자 기억의 한 모퉁이로 사라지는 옛 추억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2년 후 나는 중매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고 현재는 남편 옆에서 편집과 교정 일을 보고 있다. 글을 좋아하는 내 성격에 맞는 일이라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끊어졌던 준하의 소식을 들은 건 다시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때 준하는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삼촌 회사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나는 심정적으로 애석했다. 나만큼이나 글을 좋아하는 녀석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게 왠지 안쓰럽기까지 했다.
나는 준하를 출판사로 불러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는 일을 도우면서 글을 쓰든 말든 그건 준하의 몫이었다.
그런데 준하를 보는 순간 몇 년 전의 후배가 아닌 듬직한 남자, 그것도 성적 매력이 다분한 사내로 내 머릿속에 각인될 줄이야 하늘인들 알고 땅인들 알았을까.
***
장맛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는 오후 나절이었다.
남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해마다 열리는 세계도서박람회에 참석 차 보름 예정으로 출장을 간 지 3일째 되는 날이었고, 나는 모 유명 작가의 장편소설 교정 작업 때문에 서재에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책상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남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잠시 며칠 전부터 온다온다 해놓고 전화 한 통화 없는 준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팔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는 준하를 예감이라도 한 듯 떨려 있었다.
"누나, 나 준하…"
"저, 정말 준하니?"
나는 귓전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낯이 익은 준하의 목소리에 반가움 마음이 앞서는 터라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응, 준하 맞아… 누나, 주택가라 그런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지금 있는 곳이 어디니?"
"사거리 앞 슈퍼 앞이야."
"거기서 기다려. 누나가 바로 나갈 게."
나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문득 그 언젠가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 우산을 들고 남편 마중을 나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이도 아닌데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의 나답지 않았다. 적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허둥대는 꼴이 왠지 우스꽝스러웠다.
'이런 감정의 정체는 뭐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러는 이유가 까닭 없이 의문스러웠다.
'아냐, 아닐 거야… 그냥 반가워서 이러는 걸 거야.'
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사거리 슈퍼 앞에 준하는 없었다.
"어딜 갔지. 여기가 맞는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바로 옆에 있는 전봇대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누나!"
"엄마야!"
나는 화들짝 놀라며 바로 코앞에 검은 우산을 받쳐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준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4년 만에 처음 만나는 준하는 변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좀은 생기가 없어 보이는 표정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긴… 아직 올바른 직장을 구하지 못했으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지.'
준하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 그때보다 훨씬 예뻐졌네. 형이 잘해주는 모양이지?"
"준하 넌 표정이 좀 어둡네."
순간 나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준하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아서였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하는 내가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알고나 있는 듯이 대뜸 한소리 했다.
"누난 이 준하가 한심하지?"
한심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화풀이를 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 한심해. 멀쩡하게 생긴 놈이 아직 빌빌거린다는 게 속상해."
"누나 미안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는 준호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그런 표정이었다.
"미안한 줄 알면 약속해."
"약속?"
"그래 약속. 앞으로 이 누나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약속 말이야. 할 거야 말 거야?"
"하, 할 게… 누나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할 거야."
"그럼 됐어."
나는 우산을 접고 준하 우산 속으로 들어가 우산을 들고 있지 않는 준하의 팔짱을 끼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 자신조차도 의아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점이었다.
"어어… 누, 누나 이래도 돼… 돼는 거야?"
준하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뭐 어때, 동생인데…"
나는 젖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준하의 신체 일부분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왠지 모르게 야릇해지는 기분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
"누나, 형은 언제 오는 거야?"
준하가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직 일주일 남았어… 준하 너, 옷이 다 젖었어. 다른 옷 준비할 동안 샤워나 해."
그러자 준하가 좀은 겸연쩍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돼?"
"얘는… 누나 집에서 샤워하는데 그런 말은 왜 하니?"
나는 겉으로는 당연한 것처럼 말했지만 속으로는 알다가도 모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딱히 뭐하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의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럼 나 샤워하고 나올 게."
준하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기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준하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샤워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작은 동요였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꿈틀거리는 상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망막 위로 준하의 근육질 알몸이 실루엣처럼 어른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쳤어, 미쳤어…!'
나는 속으로 나 자신을 질책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고집스럽게 한쪽 방향으로만 쏠리는 야릇한 감정이었다. 그 야릇한 감정은 다름 아닌 뜨거운 욕정에의 갈증이었다.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니 있었어도 안 돼. 준하는 그냥 후배일 뿐이야. 후배를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는 건 죄악이야. 그래, 나에겐 남편이 있어… 남편을 배신할 순 없어.'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준하에 대한 열정으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준하가 후배가 아닌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나는 교정 작업에 남편 출장 땜에 근 한 달 넘게 부부관계를 갖지 못했다.
'이건 아냐. 난 그런 여자가 아냐.'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남편이 입었던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들고 안방에서 나와 욕실 문 앞에 그것들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던 물소리는 이미 뚝 끊겨있었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나갔다.
'몸에 비누칠을 하고 있겠구나. 거긴 비누 거품이 수북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뜨겁게 역류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