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8 회: 92 소유욕, 그 정염의 불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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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왔어요."
공인중개사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화기를 들다말고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내 바로 옆에 서있는 여자를 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이게 누구야?'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어느 틈에 심장은 막무가내로 쿵쾅쿵쾅 뜀박질을 해댔고, 손에는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때 여자는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 오랜만이네요."
그랬다.
오래간만이라 해도 좋을 듯싶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까.
"그,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그나저나 오정혜가 맞긴 맞는 거야?"
그렇듯 오정혜 그녀는 많이도 변해 있었다. 아니, 많이 변했다는 표현보다 더 없이 섹시해졌다는 게 어울릴 것 같았다. 내 눈에는 마치 천상의 여인이 환생이라도 한 듯했으니 말이다.
"어머! 당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
아내는 오정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는 내 표정에 시비를 걸듯 한소리 했지만 당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배는 보고도 몰라요? 한 때는 선배를 짝사랑 했던 오정혜가 나잖아요."
정혜 그녀는 작심이라도 한듯 '짝사랑'에 악센트를 넣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어머, 얘 좀 봐! 누가 오정혜 아니랄까봐 아직도 짝사랑 운운하는 거니? 하여간 둘 다 못 말려!"
아내가 정혜에게 눈을 살짝 흘기며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정혜가 아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커피색 루주 탓인지 고혹적인 매력을 풍기는 앵두 같은 작은 입술로 예전과 달리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얘는, 그래야 선배의 기억이 새삼스러울 게 아니니. 안 그래요, 선배?"
그녀가 공감내지는 동감을 구하는 듯하는 바람에 난처해진 건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후후, 새삼스럽다기보다는 … 그런 감정이야 세월 속에 자연스럽게 묻히는 거 아닌가? 자, 일단 앉기나 하지?"
이런 상황에서는 아내를 두둔하는 게 남편의 현명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소파에 앉기를 권하면서 힐끔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웬걸, 아내의 입가에 나만이 해석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파문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 미소 속에는 <오정혜 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내 남편은 결코 함락할 수 없는 철옹성이니 냉수 먹고 정신 차리라.>는 자만이 묻어나 있는 듯했다.
"선배, 사무실이 꽤나 아담해서 좋네요."
그런데 소파에 엉덩이를 내리는 정혜는 내 말에 상처를 받기라도 한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순간 왠지 모르게 일말의 연민 비슷한 감정의 회오리에 휩쓸리는 내 자신에 놀라고 말았다.
"좀 좁긴 하지만 그런대로 불편한 건 없어."
겉으로는 여유를 부리듯 했지만 정혜를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 아니 내 마음 속 감정의 골은 이미 평상심을 벗어나 있었다.
'정혜 너, 아직 그 감정이 남아있는 거니?'
내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늑해서 손님들이 편안하게 상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요. 이제는 한이 된 걸요!'
정혜의 까만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아내가 녹차 팩이 담긴 종이컵을 정혜 앞에 내려놓았다.
"정혜야, 녹차 괜찮지?"
"으응, 너도 앉아!"
아내가 정혜 바로 옆에 앉는 걸 보고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정혜 어디서 만난 거야?"
"사실 만난 건 며칠 전이었어요. 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 당신이 이런 일을 한다고 하니까 이 근처 아파트로 집을 옮길 계획이라면서 매물이 나온 게 있으면 상담도 할 겸 같이 가자고 해서 왔어요. 잘했죠?"
아내가 공치사라도 듣고 싶다는 듯 생긋 웃기까지 했다.
그러자 정혜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촉촉하니 젖어있는 듯한 까만 눈동자는 그윽하다 못해 은근하기까지 했다.
"그래요 선배, 한번 알아봐 주실래요?"
"그래, 때마침 로얄 층이 하나 나온 게 있는데 … 주인이 급하게 이민을 가는 바람에 급매물로 나온 건데 도배는 물론이고 구석구석 올 수리까지 다 해놨으니 정혜 마음에 든다면 언제든 입주를 할 수 있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혜가 활짝 웃으며 다그치듯 물었다.
"선배, 지금 볼 수 있어요?"
"그럼!"
그러자 아내가 대뜸 정혜는 물론이고 나까지도 반길만한 말을 불쑥 내뱉는 게 아닌가!
"여보,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그렇게 해요!"
"그럴까."
말이란 게 참 묘하다. 자신의 생각이 간파 당하듯 꿰뚫리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어눌해지니 말이다.
"얘는, 어서 일어나지 않고 뭐하니?"
아내가 이번에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정혜를 닦달하듯 채근했다.
"그래야겠지…"
정혜의 말꼬리가 흐릿했다. 정혜도 나와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힌 듯했다.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포만감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
아파트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정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동안 나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혜의 팔등신 알몸을 상상하며 단아하다 못해 고상하기까지 한 블랙 톤의 정장 아래위를 은근슬쩍 훔치기 시작했다.
정장 마이 안에 받쳐 입은 흰색 블라우스 위로 터질 듯 봉긋하니 솟아있는 젖가슴의 팽팽한 볼륨감도 볼륨감이지만 뽀얀 무릎 바로 위에 찰랑거리는 스커트 자락 밑으로 매끈하게 빠진 종아리 곡선하며, 검정 하이힐 굽만큼이나 잘록하니 패인 발뒤꿈치 하며, 바람을 타고 내 코끝을 간질이는 이름 모를 육향하며, 그 모든 게 나를 미치도록 곤욕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오정혜 너,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어!'
그렇게 밖에 달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듯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10년 전의 오정혜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농익을 대로 농익은 요염과 교태가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섹시미를 한껏 풍기고 있었다. 소위 사내라면 도시락을 싸들고 줄곧 치근덕거리며 줄줄이 욕정에의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후후, 세월이 무슨 소용이람!'
물처럼 흐르는 세월에 반감이 울컥 치밀 정도로 서른다섯 나이에 비해 폭삭 늙어버린 아내에 비하면 정혜는 피부며 얼굴빛이 한창 물이 오른 18세 소녀나 다름없었다.
순간 나는 은근히 가슴 한켠에 똬리를 트는 반발심에 나도 모르게 그만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정혜 너, 투자를 많이 했구나?"
그 말 속에는 나라는 놈의 무능함을 자책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2년 전 명퇴를 당하고 2년 전부터 복비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나 자신이 오늘처럼 비감으로 와 닿은 적이 없었다.
"투자라뇨?"
속눈썹이 긴 눈으로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정혜였다.
"후후, 몸매 관리를 두고 한 말이야."
그러자 정혜가 살가우면서도 간살스러울 정도로 눈을 살짝 흘기며 그제야 의미를 알았다는 듯 대거리를 했다.
"선배 그 말은 지금껏 내 몸매를 훔치고 있었다는 걸 공개한 셈이네요. 왜죠? 오늘에야 관심이 쏠리기라도 한 건가요?"
"후후, 그 말버릇은 여전하구먼! 그래, 쏠림과 꼴림은 동격이라던데 …."
나는 잽싸게 말꼬리를 잘라버렸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하고 있는가 싶어서였다.
'후후!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
"왜 말꼬리를 잘라 먹죠? 이럴 땐 서로가 솔직해지는 게 마음 편한 거 아닌가요, 선배?"
키로 아파트 현관문을 딸 때 정혜가 내 옆에 바짝 다가서며 그렇게 물었다. 콧속으로 강렬하게 파고드는 정혜의 향긋한 체취에 나는 숨을 안으로 몰아쉬었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원초적 본능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색은 절대 금물이었다. 내 오감을 경계하고 있는 아내 때문이었다.
"언제는 가식이었나?"
중문을 열고 구두를 신은 채로 거실로 올라서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정혜가 싱크대 쪽으로 방향을 잡은 내 뒤를 따라오며 마음에 담고 있었던 말을 오늘에야 죄다 퍼붓기라도 하듯 단호한 어조로 내 심장을 긁어댔다.
"지금도 선배는 가식의 가면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죠. 선배, 이건 내 황홀한 착각인지 모르지만 … 그때도 나영이 보다 내가 먼저 추파를 던졌다면 선배는 이 오정혜를 한번쯤은 품었을 거예요. 아닌가요?"
그 말에 문득 나는 외줄을 타는 듯한 아슬아슬한 위기감 같은 예감을 느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생리적 본능이라는 놈은 가당치도 않은 상상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었다.
한 입에 덥석 집어삼켜도 신맛이 전혀 나지 않을, 씹으면 씹을수록 달콤하고 향긋한 과즙이 입 안 가득 고일 것만 같은 정혜의 몸뚱이를 어찌하고 싶은 야릇한 성적 흥분이 아랫도리로 묵직하니 들러붙고 있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어때? 마음에 들어?"
정혜가 강경한 말투로 대시를 해왔다.
"선배, 내 눈 피하지 말고 이 오정혜를 똑바로 쳐다보고 얘기해요. 내 눈을 피한다고 이 오정혜의 한이 눈 녹듯 녹아내릴 것 같아요!"
"하, 한이라니?"
나는 한이라는 표현에 나를 짝사랑 한 정혜의 외골수 감정의 골이 깊이도 패였구나 싶어 머릿속이 텅 비는 듯했다.
그때 정혜는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는 선배가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나영에게 보란 듯이 날아가 버린 파랑새였지만 지금은, 지금은 …."
어느새 정혜의 뜨거운 눈길은 촉촉한 안개비까지 머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은 긴장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