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3 회: 76 애욕의 낚시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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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동창에다 대학 동기인 동호 녀석이 호프 잔을 내려놓으며 뜬금없이 물었다.
"진수 너, 내일 약속 있어?"
"왜, 좋은 건수라도 있는 거야?"
"응."
"뭔데?"
"낚시."
나는 낚시라는 말에 대뜸 손사래부터 쳤다.
"아서, 그 시간에 낮잠 때리는 게 나한텐 정신적으로 백번 나으니까. 경고하는데 나더러 같이 가자는 얘긴 안 꺼내는 게 좋을 거야."
그러자 녀석이 냉큼 친구니 우정이니 하는 말로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얌마, 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모르냐? 둘도 없는 친구가 회사에서 잘린 기념으로 낚시 한번 같이 가자는데 … 미친 척 아니지 못 이긴 척 따라 가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 의리도 없는 놈아!"
"이번만큼은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안 돼!"
그러자 이번에도 그놈의 친구를 앞세워 나를 압박했다.
"진수 너, 진짜 십년지기 친구 맞긴 맞아?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로 전락한 친구가 마음도 추스를 겸 낚시를 간다면 위로 차원에서라도 선뜻 같이 가자고 하는 게 친구 아냐? 정말 의리 부도낼 거야?"
나는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빌어먹을! 앓느니 죽지. 그래, 간다 가!"
안 간다고 하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한도 끝도 없는 사설은 물론이고, 종국에는 친구 의리를 끊자는 둥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둥 온갖 잡소리를 해댈 게 뻔한 친구 녀석이라 나로선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짜식, 진즉에 그럴 것이지."
녀석이 징그럽게 씨익 웃으며 반 정도 남은 호프를 단숨에 비웠다.
"내일 몇 시에 데리러 올 거야?"
"여덟 시."
녀석이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으면서 말했다.
"난 몸만 가면 되는 거지?"
"당근. 그럼 마저 마시고 2차로 노래방 가야지."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오늘은 친구 녀석이 백수 된 날이니만큼 가급적이면 녀석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친구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싶어 흔쾌히 오케이 했다.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헤벌쭉 웃어보이고는 곧장 카운트로 향했다.
***
녀석이 모는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낚시터로 가는 내내 나는 오늘 하루가 무척 지루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왠지 들러리 신세로 전락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제기랄! 그놈의 우정이 뭔지.'
그런 내 기분을 녀석은 아는지 모르는지 음악을 틀어놓고 어깨춤까지 추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뒤통수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얌마, 기상!"
그새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다 온 거야?"
녀석은 벌써 차에서 내려 뒷좌석에 있는 낚시 도구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녀석이 가방 하나를 던지다시피 건네며 말했다.
"얌마, 이거나 들고 따라 와."
나는 적군들만 득시글거리는 적지에 혼자 낙오된 병사의 기분이었다. 탈출구조차 없는 외롭고 곤란한 지경에 빠진 사면초가 신세나 다름없었다.
"어쭈, 아예 왕 노릇을 하겠다, 이건데. 좋아,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참는다, 참아."
나는 생수와 간식거리가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털레털레 녀석 뒤를 따라갔다.
녀석이 나를 납치하다시피 끌고 간 곳은 앞에는 긴 수평선이 가로놓인 넓은 바다가, 뒤로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울창한 숲이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파도 하나 없이 탁 트인 잔잔한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출발할 때부터 돌덩어리를 하나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하다 못해 뻥 뚫리는 듯했다.
내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여기가 바로 신선들 도 닦는 곳이구먼!"
나는 신선도가 남다른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며 처음으로 녀석을 따라온 게 잘한 짓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녀석은 벌써 큰 바위 위로 올라가 차양 막을 치고 있었다.
"얌마, 신선놀음이 뭔지 가르쳐 줄 테니까 이리 올라와."
"신선놀음 좋아하네."
그렇게 투덜거리며 바위로 올라가자 1미터 간격으로 바다에 드리워져 있는 2개의 낚싯대 앞에 낚시 의자 2개가 놓여 있었다.
"아무데나 앉아."
나는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찍소리 안하고 의자에 엉덩이를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녀석의 눈치를 봐가며 긴 시간을 돌부처처럼 죽치고 앉아 무작정 죽여야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고행을 왜 사서 하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체질에 안 맞는 짓이었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녀석은 곁눈질로 힐끔 거렸다. 녀석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기계처럼 낚싯대를 거둬들였다가 다시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친 놈!'
그런데 겨우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고역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맨손으로 고기를 잡는 게 백번 나을 성 싶었다.
"나 안 해. 아니, 못해!"
인내에 한계를 느낀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차양 막 밑으로 들어갔다.
녀석은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고 마치 충고를 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하긴 세월을 낚는 게 쉬운 건 아니지."
나는 들은 척 만 척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다말고 불현듯 시야를 가리는 물체에 고개를 들었다.
'어라!'
우리가 올 때만 해도 주위에 아무도 없었는데 몇 걸음이면 충분히 건너갈 수 있는 바로 옆 바위에 한 쌍의 남녀가 와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런데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게 있었으니! 아니,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쏠렸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죽이는데!'
한마디로 보기 드문 미모였다.
나는 담배를 연신 빨아대며 낚시 준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남자를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의 각선미는 족히 167~8은 되고도 남을 훤칠한 키에 어울릴 정도로 육감적이며 탄력적이었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은 낚시터에 오면서 어울리지 않게 하이힐에 원피스로 치장을 한 패션 감각이었다.
'혹시, 그렇고 그런 관계?'
의심의 눈으로 봐서 그런지 남자와 나이차가 꽤나 많은 듯했다. 내 눈에 남자 나이는 아무리 적게 봐준다 해도 띠 동갑은 될 것 같았다.
'젠장,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처구니가 없는 객기였다. 남이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는 걸 보고 왜 쑤시냐고 시비를 거는 꼴이었다.
바로 생각을 고쳐먹은 나는 눈앞에 삼삼하게 걸리는 여자를 다시 관찰하기 시작했다.
'거참, 아무리 봐도 당긴단 말이야.'
이번에는 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좌우 대칭에 윤곽까지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염색을 한 듯 어깨 밑으로 찰랑거리는 긴 갈색 머리에 뽀얀 피부, 거기다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는 볼륨감 넘치는 젖가슴, 그리고 정숙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묘한 색기 마저 묻어나는 백치미스런 이미지가 괜스레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빌어먹을! 용을 쓰면 뭐해. 그림의 떡인 걸!'
불현듯이 수작이라도 걸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았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남자가 여자 옆에 있는 한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괜히 씁쓸해지는 입맛을 다시며 녀석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때 녀석은 세월을 낚는 강태공 아니랄까봐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찌만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나는 얄미울 정도로 초연의 경지에 몰입해 있는 듯한 녀석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섞는다던데 … 야, 너무 몰입하면 맨 정신 달아난다, 너. 졸지에 미친 놈 된다 이 말이야."
그런데 녀석은 뉘 집 개가 짓느냐는 듯 대꾸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미친 놈, 딱 체질이구먼. 그래, 난 신선되기 싫은 놈이니까 아무튼 월척이든 뭐든 어서 낚기나 해. 매운탕은 내가 끓여줄 테니까."
나는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는 도로 돌아앉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눈길이 자연스럽게 여자 쪽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는 나처럼 무료함에 지친 얼굴로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고 있었다.
'저 여자도 나처럼 죽을 맛인 모양이지.'
사실 낚시에 전혀 취미가 없는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일단 낚시터에 오면 그건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말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있나, 그렇다고 대놓고 불평을 할 수 있나, 아무튼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전락하기 일쑤다.
지금 나라는 놈과 저 여자가 딱 그 짝이다. 환영받지 못하는 파티에 초대된 불청객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심결에 우연찮게 서로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불장난을 하다 들킨 악동처럼 지레 겁을 먹고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곁눈질로 여자를 예의주시 하고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내 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어라, 어쩌겠다는 거야.'
갑자기 묘해지는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다시 눈이 마주친 여자가 보란듯이 눈웃음을 치는 게 아닌가.
'뭐야, 지금 뭐하자는 거야?'
나는 얼떨떨해지는 기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화답이라도 하듯 씨익 웃어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이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여자가 갑자기 몸을 나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각도로 살짝 틀더니만 다짜고짜 한 손을 어디론가 쑥 집어넣는 게 아닌가.
'헉!'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의 손이 미끄러지듯 파고든 곳은 공교롭게도 사타구니 쪽이었다.
그 지경이니 두 눈이 부릅떠진 것은 물론이고 갑자기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설마?'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듯 여자의 즉석 도발은 내 눈을 황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